커버스토리
1997년02월27일 제 146호 한겨레21

북한 개방파를 주목하라

(사진/붉은 기 사상은 95년 8월 이후 각종 언론보도를 통해 계속 강조돼왔다. 사진은 타도제국주의동맹결성 70돌 경축 평양 청년학생들의 붉은 기 집체무용.)

주체사상은 황장엽 비서의 망명신청 이후에도 북한의 지도이념으로 계속 남을까. 아니면 새로운 지도사상이 등장할까.

황장엽 비서의 망명신청이 남북한 사회에 던진 충격은 ‘북한 서열 21위 ’라는 그의 지위보다 훨씬 큰 느낌이다. 이는 그가 북한 사회를 지탱하 는 한축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인물인 탓이 크다. 황 비서는 김일성대학 총장, 노동당 사상담당 비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 요직을 거치면서 ‘혁명적 수령론’,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등 “인민대중의 자주성과 수령의 지도성의 결합”을 핵심으로 하는 주체사상을 사실상 체계화했다. 이런 그가 망명신청을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건 ‘주체사상의 위기’로 인식될 수 있다.


붉은 기 사상, 구호차원에 머물러

현재 이 ‘위기’를 해석하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주체사 상 왜곡에 따른 위기’이고, 또다른 하나는 북한 사회 전체가 이미 주체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체제와 사상의 갈등론’이다.

먼저 ‘주체사상 왜곡론’은 황장엽의 망명신청 이후 공개된 소위 ‘황장 엽 서신’ 등에 근거한 분석이다. 이 서신들은 현재 북한의 주체사상을 ‘가짜 주체사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분석은 현재 북한에서는 “통 치자들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주체사상이 왜곡되어 독재의 무기로 이용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인민대중의 자주성’만을 강조한 ‘진짜 주체사상’에, ‘수령의 지도’라는 독재논리가 덧붙여져 ‘가짜 주체사 상’이 됐다는 것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북한 사회에서 계속 지도사상으로 남을 공 산이 높아진다. ‘가짜 주체사상’을 필요로 했던 김정일 등 북한 지도부 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 비서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등 현 주체사상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이런 전망은 설득력이 떨어 진다는 지적도 높다.

최근의 북한 동향도 이런 지적을 뒷받침한다. 주체사상 자체가 북한에서 퇴조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6년 상반기에 3번째로 북한을 방문한 한 재미동포는 “지난해 방북 때 북한 인사들의 주체사상 언급이 예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음을 느꼈다”고 말한다. 또 김일성 주석 사망 뒤 ‘붉은 기 사상’이라는 새로운 주의가 대두돼온 것도 주체사상을 대 하는 북한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지난 95년 8월28일자 <노동신문>을 통해 처음 등장한 붉은 기 사상은 “ 일심단편의 상징이며, 혁명적 지조와 절개를 강조하는 신념체계”이다. 붉은 기 사상은 그 뒤 신년공동사설을 비롯한 각종 언론보도를 통해 계속 강조돼왔다. 붉은 기 사상의 부각은 북한이 김정일 비서 체제를 맞아 새 로운 ‘사상’을 필요로 했기 때문인 것으로 것으로 풀이된다. 상황이 변 한 데 따라 사상의 변화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붉은 기 사상은 아직까지 구호 차원에 머물고 있다. 이는 ‘주체 의 사상’ ‘주체의 혁명이론’ ‘주체의 영도방법’ 등 사상으로서의 짜 임새를 갖춘 주체사상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붉은 기 사상이 주 체사상의 지위를 물려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체제와 사상의 갈등’을 강조하는 전문가들은 오히려 또다른 곳에서 북 한 지도사상의 변화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현재 북한 체제가 처해 있는 어려움이다. 이들은 북한이 지금과는 ‘다른 정책 ’을 취하려 할 땐 주체사상도 함께 퇴조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 이데올로기는 정책의 변화에 뒤따라 변하는 것’이라는 근본명제에 따른 분석이다. 한 예로 만일 북한이 개방정책을 취할 경우 중국의 경우와 같 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나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등 새로운 이 데올로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개방파의 시련 계속될 것인가

결국 북한이 ‘주체사상의 위기’를 극복하고 어떤 사상으로 다시 체제를 정비할지는, 북한이 어떤 방향의 국가운영전략을 세우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히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때 주목되는 것이 북한 개방파의 향배다. 황장엽 비서가 북한 개방파로 분류되는 상황에서 이들 개방파가 단기적으 로는 어려움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개방파 의 어려움이 장기간 지속될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주체사상의 1인자 인 황 비서마저도 ‘주체사상의 위기’를 느꼈다면, 이는 역설적으로 체 제 변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 라서 황 비서의 망명신청을 계기로 강경론자가 주도권을 잡는다고 하더라 도, 그것이 오랜 시간 지속되리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황 비서가 속한 개방파가 주도권을 잡게 되면 황 비서의 뜻과는 무관하게, 주체사상은 새 로운 지도이념에 자리를 내줘야 할 것이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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