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2월27일 제 146호 한겨레21

황장엽 망명드라마의 처음과 끝

(사진/그의 가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평양에서의 단란한 한때.)

1995년 4월21일 중국 선양. 북한의 무역회사인 ‘려광무역련합총회사 평 양회사’(여광무역회사) 김덕홍(59) 총사장과 중국 무역회사인 ‘심양명 흥무역공사’(명흥무역공사) 사장인 박아무개(34·여)씨는 두쪽 분량의 업무협의서에 서명했다. 무역업무에서 상호 편의를 최대한 보장하는 한편 무역합영회사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데 합의한다는 내용이다. 외견상 단순 한 무역계약처럼 보이는 이 만남이 약 2년 뒤 황장엽(74) 북한 노동당 국 제담당 비서의 역사적인 한국 망명 시도로 이어지게 될 줄은 그들 자신조 차 몰랐다.


수양딸 박씨와 김덕홍의 만남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박씨는 조선족 출신으로 랴오닝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박씨는 90년대 초 부터 북한과의 무역관계로 평양을 자주 드나들며 황장엽 비서를 알게 돼 92년 부녀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박씨는 황 비서와 친한 랴오 닝대학 전 총장 펑위충의 소개로 황 비서를 만날 수 있었다. 황 비서는 김일성대 총장 재직시부터 자신을 보좌해온 여광무역 사장 김덕홍씨를 박 씨에게 소개했다. 이때부터 박씨는 김씨와 함께 황 비서가 망명을 요청하 게 될 때까지 그림자처럼 황 비서를 보좌하게 된다.

마침 95년을 전후한 시점은 남한 기업의 대북교역과 투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때여서 남북한기업인과 중국쪽 중개인 사이에 사업교섭이 다양하 게 이뤄지고 있었다. 중개무역이나 북한인력 송출을 전문으로 해왔던 김 씨와 박씨는 좀더 많은 서울의 기업인들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다양한 ‘ 비즈니스’에 손을 대게 됐다. 직접 사업을 하지 못할 경우 관련 북한 기 업인을 소개해서 사업이 성사될 때까지 뒤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방식 이었다.

남한 기업인들은 대북교역이나 투자를 위한 파트너를 물색할 때 으레 북 한 권력층의 ‘실세’를 찾게 된다. 다른 경쟁회사보다 빨리 대북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규모가 클수록 이를 보증하거 나 강력히 지원할 수 있는 ‘거물’이 필요한 것이다. 남한 기업인들은 김씨 및 박씨와 자주 ‘사업’을 하면서부터 이들 뒤에 북한의 거물급 인 사가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들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사진이나 자신들을 돌봐주고 있음을 암시하는 메모 지, 편지 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남한 기업인들이 이를 믿지 않았다. 황 비서의 사진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편지의 필체가 황 비서의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황 비서와 자기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남한 기업인들에게‘절대 비밀’을 전제로 황 비서에 관한 좀더 구 체적인 속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부 남한 기업인들은 이들과 손을 잡고 일을 해나가면서 황 비서의 위력 을 실감하게 됐다. 처음에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업 들, 즉 작게는 단순임가공사업에서부터, 크게는 북한 내에서 대규모 인원 을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합작사업 등이 차질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일부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이들간의 신뢰는 더욱 확고해졌 다.


황장엽 ‘신주체사상’의 좌절

이제 이들은 단순히 비즈니스만을 화제로 삼지 않을 만큼 ‘친숙’해졌다 . 자연스럽게 북한권력 핵심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입에 오르내렸 다. 또한 이들의 최대 후원자인 황 비서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갔다. 부인 인 박승옥은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의 가정교사를 지내 김정일-김경희 와의 친분이 유달리 남다르다. 1남3녀중 외아들인 황경모는 64년생으로 아버지 황 비서와 같은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하고 주체과학원 연 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며느리 전혜영은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의 누나 딸이다. 둘째딸 황노선과 셋째딸 황선옥은 각각 57년, 61년생으로 평양 의학대학을 졸업했다. 황 비서의 세딸은 모두 북한의 권력서열 상위권에 드는 최고 실력자 집안의 자제들과 결혼했다는 등등….

이들을 접촉한 남한 기업인들은 든든한 후원자가 있음을 뿌듯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북한 권력층 내부의 깊은 얘기를 접하면서 전율까지 느끼 게 된다.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얘기들이었다. 그래서 이들 은 관련 정부기관과 이 문제를 은밀히 협의해왔다. 설마 설마 하면서…. 박씨를 접해온 일부 남한 기업인들은 95년 말께 처음으로 황 비서의 심경 을 전하는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들었다. “나(황 비서)는 학자로서 뜻 을 펼치는 게 욕심이다. 그런 목적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한계를 극복 한 주체사상을 현대에 맞게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김일성-김정일의 체제 유지수단으로 전락한 게 매우 비관스럽다”는 내용이었다. 이 밖에도 북 한의 심각한 경제난, 식량난 등을 우려하면서 “북한실정에 맞는 시장경 제원리를 도입해야 된다. 중국은 강력한 공산당 지도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시장개방을 통해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 부럽다”는 등 황 비서의 내밀 한 심경을 읽게 됐다.

황 비서는 특히 김일성 사망(94.7.8) 이후 무력감에 깊이 빠져든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정립한 주체사상의 고수라는 폐쇄성 때문 에 사회주의권 시장의 상실 이후 북한경제가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는 자 책과, 시대변화에 맞는 개혁개방을 주장해도 색안경을 쓰고 보는 군부 중 심의 보수세력과의 싸움은 그 자신도 버거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황 비서는 지난 95년께부터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분적으 로 수용하는 ‘신주체사상’을 주장하며 북한체제의 개혁개방을 촉구했으 나 그의 이런 주장은 김정일 비서를 중심으로 한 현 지도부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황 비서는 95년 11월 앙드레 오브리 프랑스- 조선 친선협회 부회장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해 프랑스 상원에서 주체사상 을 강연했을 당시에도 “주체사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계속 발전하는 것”이라며 예의 신주체사상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정일이 자신의 친인척과 비서국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황 비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96년 7월에는 급기야 신주체사상 을 둘러싸고 김정일 측근 신진세력과 황 비서쪽간에 심한 사상적 마찰이 빚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황 비서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신주체사상을 북한에서 출간할 수 없게 되자 ‘신주체사상’이란 가제가 붙은 그의 저 작의 일부를 김덕홍씨를 통해 원고 형태로 미국 등지의 해외동포들에게 배포했다. 배포의 명분은 국제주체재단의 운영자금 모금이었다.


이산가족 상봉에 각별한 관심

황 비서는 이에 앞서 지난 95년 3월 해외의 주체사상 연구학자들을 지원 하기 위해 라오스에 본부를 둔‘국제주체재단’(총재 섬번)을 만든 뒤 이 번에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를 재정부장으로 임명해 자금 모금을 담당케 했다. 김씨는 모금을 위해 해외동포는 물론 한국 기업인들까지 접촉했다. 일부 소식통은 김씨가 노동당 국제부에 필요한 연간 2억달러 규모의 물자 를 조달하는 여광무역의 경영이나 국제주체재단의 모금과정에서 북한당국 에 의혹을 산 점이 이번 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여광무역과 교역을 해온 국내의 한 기업인은 “황 비서가 비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북한을 탈출할 사람이 아니다”면서 “북 한체제의 특성상 권력층은 함부로 못 건드린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황 비서의 가족들이 북한의 핵심 권력층과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어 이 정도 의 문제 때문에 황 비서를 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한편 황 비서는 96년 7월 고향을 북쪽에 두고 월남해 자수성가한 남한의 대기업 총수들도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황 비서와 철학 문제부터 시작해 민족문제, 국제현안까지 폭넓게 의견을 나눴다. 몇몇 기업인은 구 체적인 사업까지 협의했다는 것이다. 이중 ㅅ기업은 북한의 식량난을 덜 어주기 위해 극동 러시아에서 농장을 개발할 구상까지 했다. 농사인력은 북한에서 데려올 것이 검토됐다. 과거 시베리아에 벌목공 등 북한 노동자 를 보내왔던 김덕홍씨는 북한 농업인력을 이 지역에 보낼 계획을 구상했 다. 또한 황 비서는 남북한 체제경쟁으로 인한 폐해에 가슴아파하며 이산 가족의 상봉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국내 한 인사는 “지난 95년 이후 매년 2~3가족을 베이징에서 상봉시켜주고 북쪽 에 있는 남한가족의 주소를 파악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황 비서는 또한 남한 인사와의 학술교류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황 비서의 일본방문을 수행했던 진영걸 조선사회과학자협회 부위원장이 창구 역할을 했다. 국내 유명 대학의 연구소와 공동으로 연변 혹은 베이징 등 에서 학술세미나를 열곤 했다. 황 비서가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그 는 진영걸 라인을 통해 세미나의 방향과 토의내용을 구체적으로 직접 지 시해 관심을 표명했다. 이중 한 세미나를 준비했던 한 인사는 “황 비서 의 학문적인 야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면서 황 비서는 가끔 자신이 집대 성한 신주체사상 관련 내용이 적힌 종이쪽지를 밖으로 흘리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황 비서의 망명 동기와 관련해 주목되는 부분이다.

황 비서는 또한 중국 랴오닝대학의 펑위충 전 총장과 긴밀한 교류를 가져 왔으며 이 과정에서 펑 전 총장을 통해 한국쪽 인사들과도 접촉해왔다는 것이다. 황 비서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북한 사회과학자협회와 중국 랴오 닝대 사회과학연구소 사이에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 온 터이다.


박씨의 한국방문 수수께끼

(사진/"한국에 올 수 있을 것인가."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자필진술서를 작성하는 황장엽.)

황 비서는 이와 같은 다양한 라인을 통해 남한인사를 접촉했으며 이들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인사에게 망명가능성을 타진하고 그의 운명을 맡긴 것 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대화창구 역할과 자금관리를 맡고 있는 황 비 서의 수양딸 박씨와 김덕흥씨가 보이지 않는 ‘활약’을 했으리란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박씨는 적어도 두차례 이상 한국을 다녀간 것으로 확인됐으며 국내에서 우리 정부의 고위 인사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와 교역을 해온 한 기업인은 “96년 여름 한국을 방문한 박씨는 나를 포함한 몇명의 한국 기업인들과 며칠 동안 제주도에 머물다 돌아갔다”고 밝혔으나 박씨가 수양아버지인 황 비서의 한국 망명의사를 국내의 관계 당국과 협의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을 거부했다. 그러나 96년 7월 전후 신주체사상을 둘러싸고 김정일을 포함해 김정일 측근들과의 마찰 이 후 그의 위상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관계 소식통의 얘기를 고려 할 때 박씨의 한국 방문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공교롭게 시기가 일치한다. 아마도 이즈음부터 황 비서는 97년 2월16일 김정일 생 일을 기점으로 4월25일 북한 인민군창건기념일까지 기간에 김정일의 소장 측근들이 권력승계를 마무리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자신을 포함한 대규 모 숙청작업을 벌일지 모른다는 예상을 하고 ‘대책’을 심각하게 고민하 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황 비서는 마침내 지난 1월30일 평양을 떠나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엄청 난 파장을 몰고 올 ‘거사’를 눈앞에 둔 채 짐짓 비장한 여유를 보여줬 다. 2월4일 일본 국제문제연구협회가 마련한 도쿄세미나에서 그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입장에서 본 21세기를 향한 동북아시아 전망’을 주 제로 강연했다. 이 자리에서 황 비서는 “사회주의 사회의 인기가 없어졌 다”면서 “인간중심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때 도쿄의 북한전문가들은 황 비서가 스스로 정립한 주체사상의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놓고 고민하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10일 오전 11시, 황 비서가 도쿄에서 다음날 평양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쯤 베이징에 있는 김 덕홍씨와 수양딸 박씨는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던 국내의 한 무역업체 사 장에게 급박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큰일났다. 빨리 중국으로 들어 오라”는 내용이었다.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워 하던 중 12일 황 비서가 베이징의 한국영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황 비서의 망명은 이렇게 이뤄졌다.


황장엽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북한의 혁명1세대이자 주체사상의 핵심 이론가인 황장엽은 ‘적국’이나 다름없는 남한 망명을 통해 북한지도부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고 했을 까. 그가 망명신청 전날인 11일 일본방문을 마치고 도쿄 나리타 공항을 떠날 때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던 한마디처럼 “평화”인가. 12일 베이징 의 한국영사관에서 망명동기와 관련해 쓴 자술서처럼 사심없는 지식인으 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인민이 굶주리는데도 권력투쟁에만 골몰하는 북한지도부에 대한 경고인가. 분명한 것은 어떤 쪽이든 남과 북이 공히 안고 있는 이런 문제 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남아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점일 것이다.

임을출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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