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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파푸아엔 얼씬도 마세요”

등록 2003-09-18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의 분쟁 | 인도네시아]

이주민-원주민 충돌로 다시 사상자 발생… 인도네시아 정부는 ‘외국인 여행금지’ 발표

“외국인이라고? 그러면 파푸아로 가지 마시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 9일 외국인의 파푸아 여행을 금지했다.

자카르타의 이런 결심은 외국인이 많을수록 파푸아 사안이 더 뜨거워진다는 판단에서다. 정치안보조정장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는 “파푸아 독립을 지원하는 국가와는 외교를 단절할 수도 있다”며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관광객 보호 차원’이라는 정부 발표를 곧이들을 이는 아무도 없다. 속된 말로 ‘켕기는 데가 있다’는 뜻이고, 외국인이라는 성가신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 ‘맘껏 밀어붙여 보겠다’는 의도란 것쯤은 이미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8월23일 인도네시아 정부가 기존 파푸아 행정구역에서 새로 ‘중부 일리안자야’를 만들겠다고 밝히면서부터 파푸아 사안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런 정부 계획을 지원한 이주민들과, 거부한 파푸아 원주민들 사이의 충돌로 이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돌이켜보면 파푸아 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면서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서쪽 파푸아를 인도네시아 영토로 선언해 수하르토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파푸아에 파견하면서부터 분쟁의 불길이 올랐으니.

한번 보자. 제2차 세계대전 뒤 네덜란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서파푸아 주민들이 친인도네시아계와 친독립계로 나뉘어 분쟁상태에 휘말리자, 유엔은 뉴욕법(New York Act)이라는 결의안을 통해 서파푸아를 유엔임시행정기구(UNTEA) 아래 두고 1969년 8월2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투표 결과 서파푸아 주민 다수는 인도네시아로의 합병에 찬성했고, 유엔은 1969년 11월19일 결의안 2504를 통해 서파푸아를 인도네시아의 합법적인 영토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 선거는 전함과 전투기를 동원한 인도네시아 정부군의 협박 속에 치러진 탓에 여전히 국제사회는 정당성에 회의를 품고 있지만.

개발 노린 국제사회의 이기심

그리고 1970~80년대 수하르토 집권 동안 수천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살해당하면서 서파푸아는 일상적인 마찰과 충돌이 이어지는 비극의 섬이 되고 말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군과 친독립계 무장게릴라 자유파푸아운동(OPM)은 여전히 교전상태이고, 정부군과 경찰은 현지 주민들을 보복대상쯤으로 여겨 불법 체포, 고문, 살해 같은 만행을 저질러왔다. 그럼에도 1990년대 이후 파푸아가 마치 잠잠해진 것처럼 보였던 건 국제사회의 이기심 탓이었다. 1990년대부터, 막대한 천연자원을 지닌 파푸아를 놓고 수하르토에게 빌붙었던 나라 안팎 사업가들이 투자라는 이름 아래 대거 몰려들면서 파푸아 분쟁은 왜곡당하기 시작했다. 잇속을 노린 각국 정부에게 파푸아의 인권유린도 파푸아의 분쟁도 모두 더 이상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시민들도 ‘뻔한 해결책’ 알고 있다

지난 8월23일 정부가 새 행정구역을 발표하고부터 인도네시아합병파와 친독립계가 충돌하자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매우 간단했다. “더 많은 병력 파견.”

그러나 군대 증강으로 파푸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파푸아 문제는 불평등한 부의 분배와 인권유린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막대한 구리와 황금과 천연가스 그리고 원목이 넘쳐나는 땅에서 주민들은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현실, 그 이익을 모조리 미국계 다국적기업과 인도네시아 군부, 그리고 부패한 공무원들이 싹쓸이해 가는 현실, 이게 바로 파푸아 독립운동이 생존할 수 있는 터전이었다.

“정부가 인권유린부터 뿌리 뽑고, 파푸아에서 거둬들이는 돈을 조건 없이 모조리 파푸아에 되돌려줘야 한다. 파푸아에서 사업판을 벌인 미국계 업체들을 경비해주기 위해 군대를 증강하는 게 사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흔히, 자카르타 커피숍에 둘러앉은 이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다.

시민들이 알고 있는 해결책을 정부가 모르는 천박한 정치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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