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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라는 썰렁한 축제

등록 2000-10-04 15:00 수정 2020-05-02 19:21

“현실문제에나 신경써라!”… 기권율 ‘기록 경신’한 프랑스 국민투표

프랑스에서 127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대통령 임기 7년제’가 지난달 24일 국민투표를 거쳐 5년제로 단축됐다. 시라크 대통령의 공화국연합(RPR)과 조스팽 총리의 사회당(PS)을 비롯한 6개의 주요 좌·우파 정당들이 ‘찬성’ 입장을 표명한 가운데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5년 단축안’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헌법을 마구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드골 전 대통령의 말을 신조처럼 되풀이하는 보수우파 프랑스연합(RDF)은 “시라크 대통령이 5년제에 동의한 것은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7년제보다는 차라리 5년제에서 재임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극우파인 국민전선(FN)과 함께 반대를 호소했지만 ‘찬성’이라는 대세에 밀려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승리를 축하하는 축포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선거결과가 이미 예상됐기 때문이다.

경이적인 기록, 69.68% 기권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69.68%라는 엄청난 기권율은 ‘5년 단축안’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을 우울한 분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선거 전부터 기권율이 높을 것으로 점쳐지면서 1988년 뉴-칼레도니아의 독립여부에 관한 투표 당시의 63.11%의 기권율 기록이 깨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치권은 그래도 사안이 대통령에 관한 문제이니만큼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현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민투표 사안이 현재 국민들이 안고 있는 현실문제와 거리가 멀다며 기권을 표명했던 공산당(PCF)과 혁명적 공산주의자 연맹(LCR), 노동자투쟁(LO) 등은 투표결과를 놓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더욱이 16.27%의 투표자들은 시민의 권리인 선거에 참여는 하되 백지투표를 하거나 찬성과 반대표 두장을 동시에 봉투에 넣는 방식으로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불만족을 표출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정당과 차별성을 강조하는 보수우파 경향인 ‘사냥, 낚시, 자연과 전통’(CPNT)을 비롯한 다양한 이익단체들이 유권자들에게 이러한 선택을 할 것을 호소했다.

정치권이 대통령 임기 5년제를 제기한 배경에는 프랑스에 심각한 정치적 폐해를 낳고 있는 좌우 동거정부의 출현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4∼5년제를 실시하고 있는 현실도 고려됐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5년 단축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를 비롯해 대통령의 권한과 기능 등 핵심적인 문제들은 심도깊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정치권이 의도적으로 논쟁을 접으려고 애쓴 점도 국민을 냉담하게 만든 한 요인이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국가의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서 완전히 들러리로 밀려났다고 느꼈다. 일부 유권자들은 “주요 여·야당의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하원과 상원의원의 90%가 원할 경우 비준이라는 간단한 형식으로 헌법개정을 할 수 있는데 국민투표를 실시할 필요성이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관심도 없고, 끌어내지도 못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어내려는 캠페인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시라크 대통령은 지난 6월5일 방송을 통해 “국민이 찬성이라고 답변하면 아주 좋은 것이고 반대라고 답변해도 아주 좋은 것이다”라는 모순적인 주장을 해 선거에서의 선택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프라드몰로라는 작은 도시에서는 투표함을 여는 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888명의 유권자 가운데 단지 35명만이 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은 그 지역 온천장 건물이 계속 무너지는데도 정부에서 지원을 안 해주는 데 항의하기 위해 투표를 고무하기보다는 오히려 기권을 ‘종용’했다. 메독지방의 시장 57명은 지난 겨울의 폭풍우 피해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했다는 이유로 투표 홍보에 아예 무관심했다.

프랑스의 ‘썰렁한 국민투표’는 국민들의 현실문제를 도외시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치러지는 선거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보여준다.

파리=신순예 통신원 soonye.sin@liberty.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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