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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을 얻고 ‘피플파워’를 잃다

제425호
등록 : 2002-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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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코라손 아키노를 필리핀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라고 말하는가

사진/ 마리테스 시손(Marites Sison) 전 <마닐라타임스>기자·칼럼니스트

코리(코라손 아키노의 애칭). 온후함을 뽐내며 이 세상 어디를 가나 환영받는 이 여인을 과연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러도 좋고, 인권투사라고 해도 괜찮은 일인가? 느닷없이 코리를 꼬집는 일은 간디를 뒤집어보겠다는 용기에 버금가는 일임이 분명하다. 특히 필리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더 그렇다.

도식적으로 따져보자면 가정주부였던 코리는 1986년 야비하고 썩어빠진 독재자 마르코스에게 살해당한 아키노 상원의원의 미망인이라는 사회성 높은 이름을 업고 ‘피플파워’의 중심에 선 뒤 무혈혁명을 거쳐 대통령에 이른 인물이다.

분에 넘치는 국제사회의 ‘온정’


사진/ 86년 '피플파워'가 성공한 뒤 대중들 앞에 나선 코리. 그는 20세기가 '만들어낸' 가장 그럴듯한 지도자였다. (GAMMA)
이런 코리를 1987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여성’으로 뽑았고, “코리 행정부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중요한 건 이미 그녀가 필리핀에 투명하고 신성한 기억을 남겼다는 사실”이라며 극찬했다. ‘아시아의 무능아’라는 비웃음을 사온 필리핀은 코리와 ‘피플파워’라는 두 단어로 이미지 회복에 상당한 도움을 얻었던 것이 사실이다.

“수십년간 남성우월주의와 군인정치에 물든 사회를 고요하고 우아하게 정복한 코리는 정치가 불가사의한 예술임을 보여주었다.” <타임>이 묘사한 대로 필리핀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분명 멋들어진 코리의 공간은 있을 듯싶다. ‘민주주의의 빛’이니 ‘인권 지킴이’니 하는 온갖 거룩한 찬사를 뒤집어쓴 코리는 20세기가 ‘만들어낸’ 가장 그럴듯한 지도자였고, 그런 코리에게 국제사회는 다투어 분에 넘치는 ‘온정’을 보여왔으니 말이다.

이러다 보니 그이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니라는 무슨 사회적 약조 같은 현상이 생겨버렸다. 필리핀 시민 입장에서 ‘메이드 인 필리핀’으로 코리처럼 잘 나가는 ‘상품’이 있다는 걸로 별 손해볼 일이 없다는 인식이 지배하는 셈이다.

코리는 마르코스의 반대편이 될 것을 서약하며 대통령이 되었고, 또 일부는 실천했다. 코리가 대통령직에 머무는 동안 아무도 그이가 전임자처럼 개인적으로 돈을 긁어모았다고 분통을 터트린 적이 없었다. 시민들은 “코리만은 절대 아니다”라고 믿었다.

그리고 2000년. 썩어빠진 대통령 에스트라다가 다시 한번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자, 시민들은 코리에게 다시 한번 짙은 애정을 드러내며 그이를 시위 현장으로 불러냈다. 장고 끝에 코리는 2001년 1월 들어 거리로 나섰고, 결국 에스트라다는 쫓겨났다. 두 번째 피플파워를 통해 부패한 대통령을 축출하고, 다시 여성대통령 글로리아 아로요를 탄생시켰다. 이는 순결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코리가 다시 사회 속에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난 6월 코리라는 이름은 또 한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임기가 끝나가는 메리 로빈슨 유엔인권고등판무관(UNCHR) 후임자로 거론되면서부터다. 아직 결정된 바도 없고, 다만 코리가 강력한 후보자라는 사실만 나돌고 있는 상태지만 전과 달리 어쩐지 이번에는 코리라는 이름이 달갑잖게 떠오르고 있다. 필리핀 내부에서 코리를 반대하는 인권운동단체들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투사’라 부르지 말아다오

사진/ 코리는 물론 마르코스 전임 대통령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AP연합)
“코리가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는 했지만, 결코 인권투사는 아니다.” 사실 필리핀 시민들은 국제사회가 코리를 흠모해온 것과 달리, 코리가 대통령직에 앉아 있던 6년을 모호한 일들이 계속됐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마르코스보다는 좀 나은 편이던가?” 코리에 대한 기억은 대개 이런 수준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코리가 필리핀 사회의 가장 기본적 모순인 토지개혁에도 또 인권회복에도 주춤거리다 말았으니, 그이가 민주주의를 복구했네 마네 따질 것도 없다는 게 비판론자들의 입장이다. 돌아보면 코리가 대통령이 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마르코스 시절에 투옥당한 정치범 석방과 대통령직속 인권위원회(PCHR) 설치였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군장성들과 장교들이 몇 차례 코리의 애송이 정부를 향해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코리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동정심을 지닌 여인으로 몰아붙이자, 인권 사안은 곧장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코리는 마르코스에게 투옥당했던 남편 아키노 상원의원을 지원한 인권운동가들과 마르코스를 쫓아내는 데 공헌한 군부세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마르코스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른바 혁명군의 실체는 코리의 목을 조르며 정권욕을 드러낸 결코 자발적이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집단이었던 게 초기부터 사실로 드러났고, 그 과정에서 코리는 시민사회 대신 군부쪽에 추파를 던지며 인권회복의 기회를 상실해버렸다. 지금 PCHR는 수천명에 이르는 인권유린 희생자들에게 정의의 정자도 가져다주지 못한 채 이름만 거창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인권유린을 명령하고 자행했던 장성들이나 장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단 한명도 정의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본 적도 없다. “종이 호랑이였다.” 전 PCHR 위원인 조세 레이어스는 조사기능만 있고 소추권이 없는 PCHR에 대해서 허망한 기억만 있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이런 코리를 지켜보며 시민들 사이에는 코리에게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된 1987년의 이른바 멘디오라 학살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서서히 자리잡아갔다. 수천명 농부들이 대통령궁과 가까운 멘디오라 다리 부근에서 군인들 총에 맞아 죽었던 그 기억과, 그 역사는 코리를 절대로 인권투사라 부를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일이 되었다. 순수한 토지개혁을 외치는 농민 13명이 총살당했고 수백명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 대통령 코리에게 국제사회가 지금도 인권투사의 월계관을 곱게 씌워주고 있는 꼴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황당했던 멘디오라 학살사건

필리핀 역사를 통해 그동안 최극빈층에 해당하는 소작농들이 땅과 관련된 희망을 외치며 400번도 넘는 민중봉기를 일으켰지만, 멘디오라 학살처럼 개명천지 인권투사 대통령 정부 아래서 총으로 무자비하게 진압된 경우는 없었다는 말이다. 이러고도 그 피 뭍은 손으로 1988년 10월 들어 코리는 포괄적 토지개혁법인 이른바 RA6657- 추후 포괄적 토지개혁 프로그램(CARP)으로 확대된- 에 서명했고, 이걸 코리는 정의를 뽐낼 때마다 늘 멋진 장식품처럼 치장하고 다녔다.

1천만ha 농지 가운데 70%가 넘는 땅을 몇몇 지주들이 독점해온 필리핀의 현실 속에서, 이 법은 지주가 5ha 이상을 소유할 수 없게 했고 또 지주는 15살 이상인 자에게 3ha 이내에서만 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못박아, 농민들은 감동적인 눈물을 뿌렸다. 그러나 코리의 동생 조세 코주앙코와 같은 이들을 포함해 의회에 포진해 있던 지주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내 결국 이 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양심적인 세력들은 “코리가 자신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물론 코리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코리 가족이 소유한 탈락의 광대한 토지를 지키고자 코리의 동생 조세 상원의원이 분주히 뛰어다니는 걸 모든 시민들이 눈여겨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코리가 임기를 마칠 무렵, 그 잘난 CARP는 단지 170만ha의 토지를 입수해 실제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렇다면 피플파워는 코리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진보진영에서는 코리가 피플파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일에도 실패했고, 또 피플파워를 신뢰하지도 않았다고 비판해왔다. 코리가 피플파워를 외친 건 오직 군부 쿠데타로 자신이 포위당했을 때뿐이었다는 사실은 물론 시민들도 잘 알고 있었다. 토지개혁이나 인권유린자 처벌 같은 일에 얼마든지 피플파워를 동원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뿐 아니라 마르코스에 대항할 때는 그렇게 뻔뻔스럽기까지 하던 코리가 미국이나 세계은행 또는 국제통화기금 같은 힘센 것들 앞에서는 ‘쥐 앞의 고양이’ 꼴이 되었던 것도 시민들을 매우 불쾌하게 했다.

1991년 코리는 상원에 필리핀-미국 신군사기지협정 통과를 요구하며 최초로 거리에 뛰쳐나온 대통령이 되었다. 코리는 진정으로 미군 철수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염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1986년 마르코스가 하와이로 도망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미국에 정치적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토지개혁? 노! 빈곤해결? 노!

사진/ 아로요 대통령과 함께한 코리. 필리핀 내부에서 그를 반대하는 인권운동단체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SYGMA)
어쨌든 그 협정안은 결국 상원에서 부결당했고 코리는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코리의 저자세는 부채처리 건에 이르러서도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코리가 정부를 구성할 무렵 필리핀은 270억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었는데, 국내외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코리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민주주의를 앞세워, 전임자 마르코스와 그 족벌들이 삼켜버린 부당한 돈과 부정한 관계에서 비롯된 채무에 대해 탕감을 요청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나 코리는 그 부정한 관계에서 비롯된 부당한 채무까지 자발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맹세해버렸고, 그 결과 오늘도 시민들은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며 후유증을 앓고 있다. 올 국민총생산의 1.6%가 공공의료 부문에 투입되고 있는 반면 채무 관련 부문에 9%를 쏟아붓고 있는 게 지금 필리핀의 정직한 현실이다.

필리핀 시민들이 코리에게 지나치게 기대를 걸었던 탓일까? 점잖은 시민들은 코리 비판자들에게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하자고 당부하기도 했다. “6번씩이나 쿠데타 기도가 있었던 상황 속에서 코리는 스스로 독재정부와 민주정부 사이에서 잠정적인 과도정부를 담당한 것으로 여겨 민주화 체계를 잡는 것만이 임무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통령직은 정책 실행의 중요성 못지않게 ‘희망 창조’라는 또 다른 차원의 임무를 부여받은 자리다. 적어도 배고픔에 허덕이며 먼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고통받는 시민들에게는 말이다. 더구나 그런 시민들이 전체 인구의 40%를 넘는 필리핀 사회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코리가 인권문제와 토지개혁에도, 또 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래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칭송받아야 할 것인가. 얻은 것은 배신감이요, 잃은 것은 피플파워였다.

‘코리 신화’는 더 이상 자라나서는 안 될 반역이다. 투명해야 할 시민사회는 찜찜하게 남을 속이는 기분으로 그 신화를 지켜볼 것이 아니라, 늦었지만 입을 열고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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