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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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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우릴 구원하지 못했다”

등록 2002-06-20 00:00 수정 2020-05-03 04:22

시장경제로의 이행 실패한 불가리아… 총리로 돌아온 국왕에 대한 기대도 허물어져

왕이 나타났다. 불가리아의 조용한 도시 카잔룩이 장미축제의 열기로 들떠 있을 때 왕이 행차했다. 화려하게 꾸민 황금마차나 롤스로이스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이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땅에 무릎을 꿇고 맞이하지도 않았다. 왕의 행차는 외국인인 필자가 상상한 것과는 180도 달랐다. 21세기의 불가리아의 왕은 총리로 변신해 있었다.

총리가 된 왕은 귀에 무전기 이어폰을 꽂고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경호원들이 에워싼 상태에서 장미축제가 진행되는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광장의 무대에서는 여전히 합창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고 모두들 총리가 된 왕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할머니가 시메온 2세 전 국왕이자 현 총리의 손을 마주잡고서는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면서 무언가 절박하게 호소했다. 자식들의 취직을 부탁했을까? 인파에 휩싸인 왕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그를 에워싸고 악수를 청했다. 그는 마치 중심을 잃은 듯 광장을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 악수를 한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 자신들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국민의 목을 조르는 부패

시민들은 그를 분명히 왕으로 대하고 있었다. 경외심이 가득 찬 눈으로 총리 일행을 바라보던 카잔룩의 컴퓨터 학도인 카르파체프는 “왕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했다. 시메온 2세가 광장 구석의 샘을 지나치자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긴 듯 그는 샘 옆에 있는 자그마한 카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경호원들에 의해서 출입문이 봉쇄됐다. 그러나 필자는 용케도 이들의 봉쇄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시메온 2세는 이곳의 주민에게서 광장의 샘에서 떠온 한잔의 물을 대접받았다. 이 샘은 시메온 2세의 할아버지인 왕 페르디난드 1세가 1903년에 만든 것이다. 5분 정도 휴식을 취한 시메온 2세는 밖으로 나왔다. 경호망을 뚫고 몇명의 시민들이 시메온 2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국민의 삶의 수준을 개선한다는 약속은 어떻게 됐느냐”는 불만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곤혹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의 일행은 광장의 중심으로 접근하여 시민들의 환호에 답한 뒤 광장에서 사라져갔다. 이와 함께 카잔룩의 축제 인파도 하나둘 사라져가면서 광장은 비어갔다.

55년 전 아홉살의 소년왕이었던 그는 소비에트군에 의해 불가리아에서 강제로 추방됐다. 총리가 되어 권좌에 복귀한 그의 인생 역정은 한편의 동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시메온 2세는 그의 아버지 보리스 3세가 히틀러를 만난 뒤 갑작스럽게 서거한 1943년 여섯살의 나이로 불가리아의 국왕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3년 뒤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당시 9살이었던 시메온 2세는 모친인 왕비 조안나와 여동생과 함께 기차로 이스탄불로 탈출하여 다시 이집트로 옮긴 뒤 몇년을 이집트에서 살다가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 정착했다.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큰 회사를 경영해왔다. 1996년 50년 만에 처음으로 조국땅을 밟은 그는 100만명의 시민들로부터 대환영을 받는 감격적인 귀국을 경험한다.

그는 지난해 총선에 뛰어들어 불가리아 정치에 일대 돌풍을 일으키면서 45%의 지지율을 획득했다. 결국 연정을 구성하여 합법적인 총리로서 권력을 되찾았다. 자연스럽게 선거기간 내내 언론에서 제기한 왕정복귀의 의혹은 그를 괴롭혀왔다. 그는 “이 문제는 다른 사안에 비하면 가장 하찮은 논란거리”라는 말로 왕정복고를 강하게 부정했지만 자신의 신분이 왕이라는 사실은 한번도 부정한 적이 없다. 기자회견장에서도 “과거의 신분을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솔직하게 밝힌 적도 있다. 대부분의 국민도 그를 총리가 아니라 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총선기간 중 그가 거리에 나타나자 수만명의 소피아 시민들은 “왕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절박한 구호를 외친 적이 있다. 도탄에 빠진 불가리아 국민에게 시메온 2세는 구세주의 이미지로 비쳐졌다. 덕분에 ‘시메온 2세를 위한 민족운동’은 일약 집권당으로 부상했다. 그가 선거 때 내건 공약은 ‘새로운 불가리아의 건설’이었다. 불가리아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 안정된 경제성장과 외자유치, 나토와 유럽연합에의 신속한 가입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와 더불어 동구권의 고질적인 문제인 ‘부패와의 전쟁’도 선언했다. 55년 전 혁명의 열기에 들떠 왕을 추방시킨 불가리아 국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왕을 불러들였다.

1989년 동구권 몰락 이후 불가리아도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제개혁을 추진해왔으나 그 결과는 국민을 과거보다 더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았다. 평균 월급이 100달러 수준이며, 고물가의 압박 속에서 70%의 국민은 절대적 빈곤상태에서 살아간다. 50년 이상의 공산당의 집권이 남긴 것은 가난과 부패, 그리고 절망이었다. 불가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광활한 불가리아의 푸른 평야를 보게 되는데 사람들의 손이 가지 않은 땅이 대부분이다. 인구 1천만명에 광활한 농업지를 갖춘 불가리아가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소비에트 시대 잘못된 경제개발계획(농지를 버리고 불가리아를 무기생산에 집중시킨)을 진행한 지도자들과 관료들 때문이다. 장미축제가 열린 카잔룩만 하더라도 주민들 대부분 무기공장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왔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무기수출에 차질이 생겼다. 공장이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카잔룩은 세계에서 가장 질좋은 장미기름과 향수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카잔룩 시장은 이들 산업을 특화하기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기보다는 무기 생산과 수출의 길을 막은 미국만을 비판하고 있다.

“자식을 위해 나라를 떠나고 싶다”

왕이 총리로 재임한 지도 거의 일년이 다 돼간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변화가 없자 불가리아 국민의 기대도 계속 무너져내리고 있다. 왕은 불가리아 국민을 도와주고 싶다는 심정을 수차례 피력한 적이 있다. 그의 순수한 의도를 의심하는 불가리아 국민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소피아과학대의 경영학 교수인 체네쉐프는 “그를 둘러싼 대부분의 관료들이 공산당의 잔당들이어서 국왕의 순수한 의도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동구권의 보편적인 문제인 공산당 출신의 부패 관료와 마피아의 결탁은 이미 위험수위에 올라 있다. 불가리아도 예외가 아니다. 통계상의 실업률이 18%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실업률은 거의 30%에 육박한다. 즉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실업자인 셈이다. 당연히 경제는 파탄상태다. 카잔룩에서 두개의 작은 키오스크(가판대)를 경영하면서 스스로를 중산층에 속한다고 말하는 카차로프는 필자에게 유럽행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알코올 중독자들, 마피아들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어요. 돈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서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요.”

높은 실업률은 많은 불가리아의 젊은이들을 외국의 불법노동자로 내몰고 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그리스가 가장 만만한 목적지가 된다. 그리스로 향하는 밤기차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 떠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그리스 국경검문소에서 추방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다시 한번 ‘슬픈 불가리아’를 느껴야 했다.

카잔룩(불가리아)=글·사진 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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