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배짱 두둑한 러시아-서방의 치킨게임

러,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막으려 군사 긴장 극대화
미-중 경쟁 속 존재감 과시, 경제난 탈피 목적도
등록 2022-02-18 17:37 수정 2022-02-19 02:18
2022년 2월16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북부 리우네에서 기갑부대가 러시아 침공에 대비해 전술훈련을 벌이면서 탱크로 사격하고 있다. 이날 훈련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참관했다. 연합뉴스

2022년 2월16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북부 리우네에서 기갑부대가 러시아 침공에 대비해 전술훈련을 벌이면서 탱크로 사격하고 있다. 이날 훈련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참관했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의 대립이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국면을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는 2022년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우크라이나 국경 쪽에 최대 15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병력을 전진 배치했다. 러시아와 접경국인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추진하면서 자국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는 구실에서다. 러시아는 2월10일부터 닷새간 우크라이나 북쪽 접경국 벨라루스와 합동 군사훈련을 벌였다. 기갑부대와 S-400 지대공미사일, 수호이-35 전투기와 전략폭격기까지 첨단 공격 무기들이 동원됐다. 러시아의 중무장 군대가 우크라이나 국경 북쪽에서 동쪽까지 ‘ㄱ’자로 바짝 에워싼 모양새다.

전운 짙어지자 탈출과 대피 이어져

앞서 2014년 3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령 크림자치공화국의 ‘러시아 편입’ 주민투표 결과를 근거로 크림반도를 무력 합병했다.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흑해로 뻗어나간 전략적 요충지다. 현재 우크라이나로선 폴란드·루마니아 등과 접경한 동남부 지역을 뺀 국경 지역 70%가 러시아군에 포위된 사면초가 형국이다. 2월15일 러시아는 자국 군대가 벨라루스와의 훈련을 마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연합은 “철군의 징후가 없으며, 오히려 일부 지역에서 러시아군 병력이 증강됐다”고 반박했다.

2월17일 새벽(현지시각)에는 우크라이나군이 친러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루간스크공화국 4곳에 박격포와 수류탄 공격을 감행했다고 러시아 관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이 보도했다. 사실 여부와 러시아의 대응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에선 러시아 쪽의 ‘자작극’ 의혹도 나온다. 돈바스의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은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자신들도 독립하겠다며 자칭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두 ‘나라’는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지만, 러시아는 이 지역을 사실상 자국의 위성국가로 여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파병을 검토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2월13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한 전화 통화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신속하고 결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2014년 우크라이나와 친러 반군 사이의 내전과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지금까지 27억달러(약 3조2350억원)가 넘는 안보 지원을 해왔다고 <뉴욕타임스>가 2월15일 미 국방부를 인용해 보도했다. 특히 2021년 12월에는 대전차 무기와 총류탄 발사기, 대포와 개인화기 등 실전용 무기를 대량 공급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무기 지원이 러시아의 침공을 둔화시킬 순 있지만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크라이나에 전운이 짙어지면서 주요 국가들의 위험 지역 탈출과 대피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2월13일 우크라이나 전역에 ‘여행 금지’를 긴급 발령했다. 우크라이나 언론 <노보예 브레먀>는 39개국 정부가 자국민에게 우크라이나 여행 자제를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2월10일 미국은 자국민에게 “지금 당장 우크라이나를 떠나라”고 권고했으며, 외교관도 소규모 필수 조직만 남기고 본국 복귀령을 내렸다. 영국 등 서방 외교관들도 속속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떠나 서부 도시 리비우로 이동하고 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운영하는 우크라이나 동부 분쟁 지역 감시 담당 직원들도 현지에서 철수했다.

“전쟁을 원치 않는다”며 내세우는 조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군사적 긴장을 극도로 끌어올린 이유는 뭘까? 나토의 팽창을 차단할 뿐 아니라 러시아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유럽과 국제사회에서 자국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재원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는 “국제질서가 미-중 경쟁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에서 러시아가 적어도 유럽의 안보를 좌우할 수 있다는 존재감을 과시하고, 서방 제재로 심각하게 악화한 경제난을 협상으로 극복하려는 구상도 깔렸다”고 짚었다.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자국과 같은 뿌리로 보고 ‘기득권’을 확신한다는 것도 서방과의 시각차를 좁히지 못하는 걸림돌이다.

러시아와 서방은 팽팽한 대치 국면에서 협상에 따른 위기 수습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양쪽 입장 차이가 워낙 커서 좀체 접점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2월15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모스크바에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회담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으나 진짜 속내는 알기 어렵다. 러시아는 서방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허, 러시아를 겨냥한 서방의 중·단거리 미사일 철수 등 안보 확약을 요구한다. 러시아로선 자국 턱밑까지 다가선 나토의 팽창이 달가울 리 없다. 푸틴은 또 발트해 해저를 통과하는 러-독 직결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가 가동되길 기대한다는 뜻도 밝혔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줄곧 미국이 주도한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다. 반면 서방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여부는 주권국의 결정권이라는 원론적 태도를 고수하며 러시아가 군사도발을 감행할 경우 강력한 제재를 경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 반군 지역도 ‘뜨거운 감자’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압도적 득표율(73%)로 당선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돈바스 지역 회복’과 ‘나토 가입’을 공약으로 내걸고 추진해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그런 의도를 용인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정재원 교수는 “러시아로선 돈바스 지역을 분쟁지역으로 유지하는 것이 나쁠 게 없다”고 짚었다. 나토 회원국 가입 기준에 ‘영토분쟁 지역이 없어야 한다’는 규정을 우크라이나가 충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완충지대로서 서방과의 협상에서 유력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쟁 땐 시리아 이어 유럽 난민 사태 재현될 수도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 위기로 자국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잇따라 전화 회담을 했을 뿐 아니라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핵심 국가들이 앞다퉈 러시아와 접촉하며 위기 진화에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현실화할 경우 유럽으로선 시리아에 이어 또다시 대량 난민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부담이 된다.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와일드카드 삼아 위험한 ‘조커 플레이’를 하는 셈이다. 러시아와 서방의 치킨게임에 가까운 기싸움과 협상은 한동안 위태롭게 이어질 전망이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