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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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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정 ‘신호등’ 켜지나

총선 1, 2위 당 득표율 20%대로 낮아 ‘사민당-자민당-녹색당’ 첫 3당 신호등 연정 가능성 높아
등록 2021-10-02 04:03 수정 2021-10-05 08:59
2021년 독일 총선 다음날인 9월27일, 사회민주당의 올라프 숄츠 대표(가운데)가 베를린에서 열린 당 대표자 대회에서 당원들과 함께 16년 만의 선거 승리를 자축하며 활짝 웃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1년 독일 총선 다음날인 9월27일, 사회민주당의 올라프 숄츠 대표(가운데)가 베를린에서 열린 당 대표자 대회에서 당원들과 함께 16년 만의 선거 승리를 자축하며 활짝 웃고 있다. AP 연합뉴스

‘포스트 메르켈’ 시대를 앞둔 독일 정국이 안갯속으로 빠져들었다. 2021년 9월26일 총선에서 유권자의 표심이 유례없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성향이 다른 3개 정당이 연립정부(연정)를 구성하는 ‘한 지붕 세 가족’ 정권이 불가피해 보인다.

선거 결과 중도 좌파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이 25.7% 득표율로 16년 만에 제1당으로 올라섰다. 최근 네 차례 총선에서 내리 패배한 뒤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끌어온 중도 보수 정당 연합인 기독교민주연합(CDU·기민당)/기독교사회연합(CSU·기사당)은 24.1%를 얻어 제2당이 됐다. 득표율만 보면 역대 최저 수준의 참패다. 한때 50%에 육박했던 총선 득표율이 30% 아래로 떨어진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녹색당은 14.8%를 얻어 자유민주당(FDP·자민당, 11.5%)을 제치고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현지 일간 <도이체벨레>는 “중도 좌파 정당들 대약진, 보수 진영 참패”라고 보도했다. ▶관련기사= 코로나19 통해 존재증명한 ‘숄츠 자판기’

2021년 9월26일 독일 총선 투표가 치러지는 가운데, 베를린의 기민당 본부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왼쪽)가 아르민 라셰트 기민련 대표를 바라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1년 9월26일 독일 총선 투표가 치러지는 가운데, 베를린의 기민당 본부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왼쪽)가 아르민 라셰트 기민련 대표를 바라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빌리 브란트, 제2당으로 연정 구성한 전례

독일은 각 정당의 지역구 후보 투표와 정당 투표를 합산한 총선 득표율에 비례해 의석수가 할당된다. 이에 따라 차기 연방의회에선 전체 735석 중 사민당이 206석, 기민/기사당 연합이 196석, 녹색당이 118석, 자민당이 92석을 확보하게 됐다. 이번 총선에서도 단독 과반 정당이 나오지 않은 까닭에 다수 득표 당이 중심이 된 연정을 구성해야 한다. 대다수 내각제 국가들이 총선 뒤 제1당에 정부를 구성할 우선권을 주는 것과 달리 독일에선 모든 정당에 동등한 기회를 준다. 문제는 주요 정당들의 득표율이 10~20%대로 저조해 압도적 다수당이 없는데다, 양대 정당인 사민당과 기민/기사당 연합 모두가 연정 구성의 주도권을 쥐겠다며 집권 의지를 밝히고 나섰다는 점이다.

올라프 숄츠 사민당 대표는 총선 승리가 확인된 직후 “나는 유권자로부터 명백히 연정 구성 임무를 위임받았다”며 “기민/기사당 연합은 (선거 결과에 승복해) 물러나야 한다”고 압박했다. 기민/기사당 연합의 아르민 라셰트 대표는 “항상 최고 득표율 정당에서 총리가 나온 건 아니다. 우리 주도로 연정을 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제2당이 연정 구성에 성공한 전례가 있긴 하다. 1969년 총선이다. 당시 사민당 득표율은 2위였으나 빌리 브란트 대표가 3위를 차지한 자민당과 연정 구성 협상을 성사시키면서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20년 만에 처음 집권당이 됐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사민당이 42.7%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2021년 총선에선 사민당과 기민당 모두 득표율이 20%대로 낮은데다 1·2위 격차도 1.6%포인트에 그친다. 이에 따라 연정 구성 셈법도 전례 없이 복잡해졌다. 시나리오는 대연정, 신호등 연정, 자메이카 연정 등 크게 3가지로 압축된다. 대연정은 양대 정당인 기민/기사당 연합과 사민당의 좌우 합작 정부를 말한다. 좌우 합작 정부는 1966년 처음 구성된 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앙겔라 메르켈 정부가 출범한 2005년 총선에서 재연됐다. 메르켈 정부 3기(2013년 총선)와 4기(2017년 총선)인 현 정부도 대연정 체제다. 독일 역사에서 3개 정당 연정은 단 한 차례, 그것도 옛 동독에서 전례가 있을 뿐이다. 동·서독 통일 직전인 1990년 3월 동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러진 자유 총선에서 승리한 동독 기민당 연정에 소수정당 독일사회연합(DSU)과 민주궐기당(DW)이 참여했다. 당시 민주궐기당 대변인이 바로 앙겔라 메르켈이다.

“잠재적 총리가 둘, 잠재적 킹메이커도 둘”

독일에서 3개 정당 연정은 각 정당 상징색의 조합과 일치하는 사물 또는 나라의 국기를 빗대어 ‘신호등 연정’(사민당-빨강, 자민당-노랑, 녹색당-초록), ‘자메이카 연정’(기민/기사당-검정, 녹색당-초록, 자민당-노랑), ‘독일 연정’(기민/기사당-검정, 사민당-빨강, 자민당-노랑), ‘케냐 연정’(기민/기사당-검정, 사민당-빨강, 녹색당-초록)으로도 불린다. 모두 이론적으로 가능한 조합이지만 한 번도 실현된 적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번 총선 결과 어떤 조합으로도 2개 정당만으로 과반 의석의 안정적 연정 구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3개 정당 연정 중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는 사민당이 주도하고 자민당과 녹색당이 참여하는 ‘신호등 연정’과, 기민/기사당 연합이 주도하고 자민당과 녹색당이 참여하는 ‘자메이카 연정’이다. 양대 정당 중 어느 쪽이 연정 구성을 주도하든 자민당과 녹색당을 끌어들여야 한다. 독일 ARD 방송은 이런 구도를 “잠재적 총리가 둘, 잠재적 킹메이커도 둘”이라는 표현으로 압축했다.

사민당과 기민/기사당은 모두 올해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자기 당 중심의 연정 구성을 마치겠다고 공언했다. 각 정당의 물밑 움직임도 바빠졌다. 양대 킹메이커인 자민당과 녹색당은 9월29일 첫 협상을 한 데 이어 10월1일에도 만나 이견을 조율했다. 10월2~3일엔 자민당이 연거푸 기민당, 사민당과 접촉하며, 녹색당도 3일 사민당과 만나 ‘신호등 연정’ 실현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친환경과 기후변화 의제를 중시하는 중도 좌파 녹색당과 친기업 자유주의 성향의 중도 우파 자민당이 정치적 노선 차이를 얼마나 좁히느냐가 연정의 색깔을 결정할 핵심 변수다.

현재로선 사민당이 주도하는 ‘신호등 연정’ 출범 가능성이 가장 크다. 첫째, 사민당이 16년 만에 찾아온 집권 기회를 포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둘째, 차기 총리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숄츠 사민당 대표의 지지도가 라셰트 기민당 대표를 압도한다. 셋째, 킹메이커 중 하나인 녹색당이 사민당과의 연정을 원한다. 9월29일 아날레나 베어보크 녹색당 공동대표는 “선거 결과 우리는 진보적 연립정부 구성을 명확히 위임받았다”고 밝혔다.

라셰트 기민당 대표의 연정 구성 주도 선언에 대해서는 집권 여당 안에서조차 싸늘한 분위기다. 총선 이틀 뒤인 9월28일 기민당의 자매당인 기사당의 마르쿠스 죄더 대표는 “총리가 될 가장 절호의 기회는 올라프 숄츠에게 있다.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며 사민당 중심의 ‘신호등 연정’ 쪽에 무게를 실었다. 9월29일에는 기민당 정부 대변인이 공식 논평을 내어 “메르켈 총리가 올라프 숄츠의 선거 승리를 축하했다”고 발표했다. 정부 구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짤막하고 원론적인 성명이지만 발표 시점과 맞물려 메르켈 총리의 속뜻을 놓고 미묘한 해석을 낳았다. AFP 통신은 “숄츠가 연정 구성 경쟁에서 메르켈의 축하로 힘을 받았다”고 전했다. 메르켈 총리는 2018년 “새로운 장을 열 때가 왔다”며 2021년 총선에서 총리직 사임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당에서 민주적으로 결정된 대표를 받아들이겠다”고도 했다. 후임 당대표 선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단일정당 구성하지 않는 배경엔 히틀러

독일은 다당제와 비례대표제에 바탕을 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 이래 지금까지 100년 넘도록 어느 한 정당이 단독 과반 득표로 집권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연정 구성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전통으로 굳어졌다. 단 한 차례의 예외가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ZI), 즉 나치당의 집권(1933~1945) 시기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3%를 얻어 제1당이 됐지만 다른 어느 정당도 나치당의 연립정부 구성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넉 달 뒤인 11월 재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정치 공백과 혼란이 이어졌다.

1933년 1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결국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했다. 두 달 뒤 3월, 히틀러는 의사당 방화 사건을 구실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를 전격 해산한 뒤 다시 총선을 치러 의회를 장악했다. 의회가 정부에 전권을 위임한다는 수권법을 통과시켜 종신집권의 길도 열었다. 1933년 한 해에만 정치범 10만 명이 체포됐다. 그해 11월, 히틀러는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실시한 일당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92.1%)로 집권해 총통에 올랐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제3제국이 탄생했다. 국민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구성된 나치 정권의 출현은 유럽에 재앙과 학살극을 불러오는 서곡이 됐다.

독일인은 나치즘의 트라우마가 깊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단 한 번도 단일정당으로 정부가 구성된 적이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1953년에는 연방선거법에 ‘5% 장벽’ 조항도 신설했다. 연방의회 또는 주 의원 선거에서 정당 후보자 명부에 의해 의석을 배분받으려면 적어도 전체 투표자의 5% 이상 득표하거나 3개 이상 지역구에서 당선자를 내야 한다는 규정이다. 앙겔라 메르켈 정부 이전까지 독일은 경제적 강국임에도 유럽과 국제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꺼려 ‘머뭇거리는 마이스터’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독일은 뼈아픈 역사적 경험과 정치적 견제 장치 위에서 전통적으로 2개 정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를 구성해왔다. 중도 우파 정당인 기민당과 사민당이 역대 총선에서 번갈아 1, 2위를 차지하는 양대 축이다. 그러나 두 정당의 총선 득표율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지속적인 하향 추세다. 독일 주재 대사(2018년 1월~2020년 11월)를 역임한 정범구 청년재단 이사장은 “2021년 총선에서 양대 정당의 득표율 합계가 50%를 넘지 못했다. 이는 통일 이후 독일 사회에서 계층 분화가 다양화하고 복잡해진 현실을 반영한다”고 짚었다.

“계층 분화 복잡해진 현실, 득표율 합계 낮아”

실제로 독일에선 옛 동독 출신 주민의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을 대변하는 좌파당이 건재하고,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 등 시대 변화를 반영한 녹색당이 급부상했으며,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범구 이사장은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이제는 3당 연정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연정 구성 협상이 쉽지 않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를 이끌어낼 것”이라며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정당들이 어느 수준에서 합의를 보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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