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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 선거, 염불은 뒷전이고 잿밥에 이전투구

‘소처럼 일한 동네 이장’ 스가 총재 퇴진에 차기 총리 4파전 혼미
고노 다로 선두 속 아베 측근 다카이치 ‘다크호스’

제1380호
등록 : 2021-09-10 19:29 수정 : 2021-09-1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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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3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기자회견을 열어 9월 말에 예정된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스가 총리는 취임 1년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AFP 연합뉴스

2021년 9월3일 오전,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이달 말로 예정된 집권 자민당 총재(당대표) 선거에 갑자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유는 코로나19 대응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는 것. 총재 임기가 만료되면 총리직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한마디로 ‘총리 은퇴’ 선언이다. 일본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스가 총리는 연임을 위해 코로나19 위기에서 국민 안전은 뒷전이라는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총재 선거에 집중해왔다. 내각 지지율이 28%를 찍으면서도 출마 의지를 버리지 않던 그다.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스가 총리가 굳은 얼굴로 선거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일까?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마저 수개월 전부터 스가 총리 지지를 밝혀왔는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이에 대해 총리 관저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9월2일 밤, 스가 총리와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장관이 전화로 크게 싸웠다는 것.

스가 총리-아소 부총리, 한판 크게 싸웠다
스가 총리를 취재해온 한 일간지 기자는 “평소 아소 부총리는 아베 전 총리와 함께 스가 총리를 무시해왔다. 자신들 덕분에 지도자로선 턱없이 부족한 스가가 총리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다. 이런 상황에 스가 총리가 또다시 연임을 꿈꾸자 아소 부총리가 견제에 나선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가 총리는 일본을 대표하는 지도자 자리에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항간에는 ‘그림자 총리’ ‘설거지 전문 총리’라고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는 이들마저 있었다. 스가 총리 뒤에는 늘 아베 신조 전 총리와 아소 다로 현 부총리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졌다.

스가 총리는 2020년 9월 지병인 궤양성대장염 악화로 도중 하차한 아베 전 총리의 후임으로 잔여 임기를 채우는 단기 총리에 불과했다. 약 8년간의 아베 정부 아래서 장기간 관방장관으로 재직하던 스가가 아베 노선을 이어받는다는 조건으로 꿰찬 총리 자리다. 물론 아베 전 총리의 맹우이자 부총리인 아소의 지원도 한몫했다. 아베 전 총리와 아소 부총리의 스가 총리에 대한 인식은, 일국의 지도자보다는 자신들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강했다. 스가 총리는 지난 1년간 총리로서 정책다운 정책을 일절 펼칠 수 없었다.

일단 스가 총리는 인기가 없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잘 웃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부지런히 움직인다. 다만 성과가 없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국민으로부터 동네 ‘이장 총리’ 같다는 조롱 아닌 조롱을 받기도 하고, 일부 언론은 ‘부지런한 무능 정치인’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외교에서도 주요 7개국(G7) 회의 때처럼 적극적이지 못하고 겉돌았다. 인터넷 게시판과 기사 댓글난은 “코로나19 대응도 제대로 못하면 외교라도 잘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럴 바엔 차라리 아베 대리인 역할 그만두고 사임해라. 당신은 일본의 수치”라는 내용으로 도배됐다. 도쿄올림픽 역시 마찬가지였다. 잦아들 줄 모르고 치솟는 코로나19 감염 확산 속에 어렵게 올림픽은 개최됐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당장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매일같이 벌어졌다.

‘자민당 총재=일본 총리’ 공식이 파벌정치 폐해로
지난 1년 동안 스가 총리는, 비록 무능했지만 열심히 소처럼 일하다 쓰러져 숨진 우노 소스케 총리처럼 제2의 우노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을 만큼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런데도 끝내 무능한 정치인이라는 불명예를 씻어내지 못한 채 9월 말 총리직 임기를 마치게 된다.

일본 정치는 의원내각제다. 의원 수가 많은 정당이 정권을 주도하며, 다수당 총재로 선출되는 이가 자동으로 총리가 된다. 지금까지 1당 정치라고 할 만큼 자민당이 장기 집권을 해왔다. 이번 선거도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는 이가 곧 총리가 된다. 그런 만큼 자민당 내에서 선거운동은 대단히 치열하다.

일본 정치의 특색은 파벌정치라는 것이다. 자민당 내 파벌 수는 대략 7개. 총리 선거도 이 파벌에 좌지우지된다. 47명의 의원을 거느린 니카이파의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이 오랫동안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것도, 여러 파벌이 난립해 있어서 한 후보자가 과반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언론에 총리로 본격 거론되는 후보자는 기시다 후미오(의원 당선 9회) 전 정조회장, 고노 다로(8선), 이시바 시게루(11선),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장관(8선) 등 4명이다. 이 중 기시다 전 정조회장이 가장 먼저 입후보 선언을 했다. 그는 출마 선언을 하면서 아베 전 총리의 부정부패 사건을 비판했다가 아베 전 총리가 강하게 반발하자 발언 내용을 수정하는 갈지자 행보를 보여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다. 당선 가능성은 아직 반반 정도다.

아베 전 총리 비리 혐의 수사 덮을까
트위터 팔로어가 235만 명이나 되는 고노 다로 행정개혁 장관은 대중적 인기 또한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다. 스가 총리가 불출마 선언을 하기 전까지 그는 스가 총리를 지지했다. 지금은 기시다 전 정조회장과 더불어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소장파 의원들과 자민당 내 당원들의 지지도도 후보자 중 가장 높다. 현재 공식적으로 고노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스가 총리와 이시바 의원과 연대할 경우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 당선 가능성은 단연 1위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내용의 ‘고노 담화’(1993년)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겸 중의원 의장이다. 과거 한국인 보좌관을 둘 만큼 균형 잡힌 역사관을 지녔지만, 아베 내각에 입각하면서는 극우파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최근 다크호스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장관은 아베 전 총리가 적극 밀고 있다. 아베 전 총리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총리 재직 때 제기됐던 여러 정치 비리 사건 때문이다. 이번 선거가 ‘아베의 제2선거’라고 일본 언론이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차기 총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아베의 각종 비리를 재조사하느냐 이대로 덮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재조사가 이뤄져 비리 행위가 기정사실로 판명되면 아베 전 총리는 록히드 뇌물 사건으로 재임 중 체포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처럼 형사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아베 전 총리로서는 이번 선거가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선거가 되는 셈이다.

도쿄(일본)=유재순 JP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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