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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사태의 내막은

등록 2002-04-25 00:00 수정 2020-05-03 04:22

베네수엘라 사태로 곤혹을 치른 건 차베스 대통령만이 아니다.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르게 전개되는 쿠데타와 반쿠데타의 와중에 한국 언론들은 연이은 ‘오보의 행진’을 벌였다. 4월11일 시위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9명, 12명, 13명 등 제각각이었다. 카르모나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일부 신문들은 노동자 계급과 군부가 완전히 차베스에게 등을 돌린 양 보도했으나 실제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틀 뒤에 증명됐다. 그뿐이 아니다. 대다수의 매체들은 카르모나의 발표만을 믿고 4월12일 쿠데타 세력에 밀려 차베스가 스스로 사임의사를 밝힌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권좌에 복귀하자마자 차베스는 이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처럼 언론을 허둥지둥하게 만든 베네수엘라 사태, 그 전모를 정리해본다.
1992년 당시 공수부대 중령이었던 차베스는 부패한 페레스 정권에 대항해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해 2년의 옥고를 치른 뒤 쿠바로 망명을 떠났다. 1998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며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차베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단임제를 연임제로 바꾸고, 각종 사회개혁의 내용을 담은 개혁헌법을 통과시킨다. 이 헌법에 의거해 2000년 다시 치러진 대선에서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좌파 지도자가 미국이나 자국 내 기업가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갈등은 끊임없이 증폭됐으며, 결국 지난 4월9일 베네수엘라 국영석유노조의 총파업으로 폭발했다.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은 사사건건 차베스의 정책에 반기를 들던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 경영진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차베스의 측근을 임명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개혁정책에 대한 기업가들의 불만이 숨어 있었다. 파업을 계기로 카르모나가 이끄는 상공인연합회, 반정부적 성향의 노동자총연맹(CVT), 일부 군부세력의 ‘합작품’인 반정부시위는 연일 격화됐다.
이번 사태의 정점은 4월11일 시위였다. 이날 10만여명의 반정부시위대가 애초 일정을 벗어나 대통령궁으로 행진하자, 그곳에 모여 있던 차베스 지지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대통령이 국영방송에서 사태를 설명하는 연설을 진행하는 동안, 갑자기 옥상에서 총격이 시작됐다. 이날 최소 1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100여명이 다쳤다. 유혈충돌이 결정적으로 차베스의 발목을 잡았다. 반정부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4월12일, 결국 합참의장 등은 차베스를 카라카스 남서쪽의 포르트티우나 육군기지로 강제 이송했다. 차베스는 쿠바로 망명하기를 원했으나 이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어떤 식으로 개입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의 보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다양한 반대파들이 미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방문했고, 는 지난 2월에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일부 베네수엘라 장교들이 미국의 협조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경제학자이자 성공한 기업인인 카르모나는 임시대통령이 되자마자 차베스가 시행한 각종 정책을 되돌려놓아 민중들의 반발을 샀다. 그의 ‘과격함’이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판 셈이다. 빈민들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었고, 차베스를 추종하는 장교들의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카르모나는 이틀 만에 사임을 발표했고, 4월14일 헬리콥터로 날아온 차베스는 그의 질긴 생명력을 과시했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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