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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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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발 뗀 바이든 시대, 화합의 약속

분열된 미국 사회 통합하면서 ‘트럼프 지우기’ 과제
등록 2021-01-22 16:37 수정 2021-01-23 06:58
2021년 1월20일(현지시각) 오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워싱턴 연방의회 앞에서 열린 제4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질과 함께 의사당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1년 1월20일(현지시각) 오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워싱턴 연방의회 앞에서 열린 제4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질과 함께 의사당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AFP 연합뉴스

4년. 긴 시간이었다. 미국과 전세계에 트럼프 시대가 가고 바이든 시대가 열렸다.

2021년 1월20일 정오(이하 현지시각),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이 연방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지 48년 만에 최고령(78) 대통령으로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떠맡았다.

신임 대통령 취임식은 수십, 수백만 명이 모여 한껏 고양된 흥분과 축제 분위기를 즐기던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숙연함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참석 인원은 1천여 명으로 제한됐다. 하나같이 마스크를 썼다. 코로나19 탓이다. 워싱턴 전역에는 군 병력 2만5천 명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불과 2주 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부추긴 대선 불복 시위가 의사당 점거 폭동 사태로 이어졌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바이든은 취임 연설에서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겠다. 항상 여러분과 눈높이를 맞추겠다”며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고, 힘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미국을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 ‘미국 국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선 “동맹을 복원하고 세계(의 현안들)에 다시 관여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히 ‘힘의 본보기’가 아니라 ‘본보기의 힘’으로 앞장서겠다. 평화, 진보, 안전을 위해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나라 안팎에 대한 화합의 메시지이자, 전임 트럼프 정부의 노골적인 기득권 옹호, 사익 추구, 소수자 차별,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의 전면 폐기 선언이다.

취임 전 코로나19 희생자와 소외계층 찾아

트럼프는 바이든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직전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셀프 환송식’을 연 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플로리다주로 떠났다. 전임자가 후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1869년 이후 152년 만에 처음이다. 트럼프는 ‘고별 연설’에서 지지자들에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돌아올 것”이란 말도 남겼다. 이날 트럼프가 서명한 마지막 권한 행사는 사면과 감형이었다. 사면 대상엔 스티븐 배넌(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엘리엇 브로이디(정치자금 후원자), 폴 에릭슨(공화당 전략가) 등 부패와 금융범죄 혐의로 복역 중이던 옛 측근들이 다수 포함됐다.

트럼프와 지지자들에게 4년 단임은 아쉽고 짧은 시간이다. 반면 트럼프 비판자들에게 미국의 정권 교체는 끔찍한 혼돈의 끝이자 대대적인 복구와 변화의 시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년간 전임자 트럼프가 ‘아메리카 퍼스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세우며 미국과 전세계에 극단적인 분열과 갈등을 퍼뜨린 어두운 유산을 넘겨받았다.

취임식 바로 전날인 1월19일 저녁, 조 바이든과 카멀라 해리스 정부통령 당선자는 링컨기념관을 찾았다. 워싱턴 내셔널몰을 사이에 두고 양쪽 끝에서 연방의사당과 마주 보는 석조건물이다. 앞에는 길이 620m, 폭 51m의 ‘반사의 연못’ 가장자리를 따라 400개의 전등이 빛을 밝혔다. 지난 1년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에 희생된 미국인 40만 명을 기리는 추모 행사였다. 바이든은 “치유를 위해선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론 힘들지만 기억하는 게 우리가 치유하는 방식입니다. 국가가 (희생자와 교훈을)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미국 최초의 유색인종, 이민자 2세, 여성 부통령인 해리스도 “오늘 저녁 우리는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함께 치유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1963년 8월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향한 꿈이었다.

마침 바이든 취임 이틀 전인 1월18일은 연방 공휴일인 마틴 루서 킹 기념일(매년 1월 셋째 월요일)이었다. 이날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소외계층에 식료품을 나눠주는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미국에서 개인의 탄생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인물은 마틴 루서 킹과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매년 2월 셋째 월요일, 대통령의 날) 두 명뿐이다. 미국 역사상 최다 득표(8127만 표)로 당선한 바이든이 취임 전 이틀 새 보여준 행보는 상징적이다. 그가 ‘국가의 기억과 치유’를 강조한 게 코로나19 희생자만이었을까?

미국 제46대 대통령 취임식 하루 전날인 2021년 1월19일 저녁,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 부부(오른쪽)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자 부부가 워싱턴 내셔널몰이 한눈에 보이는 링컨기념관 앞 광장에서 열린 미국의 코로나19 희생자 추모 행사에 참석해 ‘반사의 연못’에 비친 추모등을 바라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 제46대 대통령 취임식 하루 전날인 2021년 1월19일 저녁,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 부부(오른쪽)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자 부부가 워싱턴 내셔널몰이 한눈에 보이는 링컨기념관 앞 광장에서 열린 미국의 코로나19 희생자 추모 행사에 참석해 ‘반사의 연못’에 비친 추모등을 바라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초기 과제는 트럼프 적폐 청산

바이든 대통령은 2020년 선거 유세와 당선 연설에 이어 이날 취임 연설에서도 거듭 ‘치유’와 ‘화합’을 강조했다. 지금 미국 사회의 병증과 분열, 불신과 적대감이 그만큼 깊다는 뜻이다. 1월19일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대통령직 수행은 진실 자체를 둘러싼 투쟁으로 얼룩졌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짚었다. 바이든 정부의 초기 핵심 과제가 트럼프 적폐 청산과 공동체 회복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미국이 처한 현실을 뼈아프게 드러낸다.

바이든 정부의 치유 회복 프로그램은 출범 첫날부터 곧바로 시작됐다. 그 윤곽은 앞서 1월16일 론 클레인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가 백악관 고위직 내정자들에게 보낸 ‘첫 10일 개관’이라는 제목의 대통령 구상에 잘 나타났다. 바이든 정부는 미국이 당면한 4대 위기로 △코로나19 △경제 침체 △인종 불평등 △기후변화를 꼽았다. 첫 열흘 동안 취할 수십 개의 행정 조처는 “4대 위기에 대응하고, 그 밖의 급박하고 돌이키기 힘든 위험을 예방하며, 세계에서 미국의 지위를 복원하기 위한 결정적 조처들”이다. 이 모든 게 의회 입법이나 동의가 필요 없는 행정명령, 대통령 교서(메모랜덤), 내각 지시 등의 형태로 신속하게 집행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첫날인 1월20일 모든 연방시설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시작으로, 파리기후협약 복귀, 일부 이슬람 국가에 대한 입국 금지 철회, 학자금 상환 유예, 세입자 강제퇴거·압류 제한 확대, 포괄적 이민 관련법 정비 등 17가지 행정 및 기관 조처에 서명했다. 21일엔 진단 검사, 각급 학교의 재개교, 노동자 보호 등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한 다수의 행정 조처가, 22일엔 최저 시급 인상을 포함해 노동자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경감해줄 다양한 경제·복지 정책이 즉각 시행된다. 그 뒤로도 유색인종 공동체 지원, 형사법 개혁 착수, 기후변화협약 이행을 위한 시행령, 보편적 건강보험 확대, 트럼프 시절 멕시코 국경에서 생이별을 당한 난민 가족의 재결합 등 다방면의 행정 조처가 숨가쁘게 이어진다.

미국 내 정치·경제 상황 녹록지 않아

바이든의 정치 경력은 화려하다. 36년간 상원의원(1973~2009년)을 거쳐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8년간 부통령(2009~2017년, 상원의장 겸임)을 지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많이 겪었다. 상원의원에 처음 당선한 직후인 1972년 12월, 아내와 막 첫돌이 지난 딸을 한꺼번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1988년 대선에선 민주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연설문 표절 시비로 중도 하차했고, 얼마 뒤엔 자신이 뇌동맥 질환으로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 부통령 재임 때인 2015년에는 아끼는 아들이자 정치적 후계자인 장남 보 바이든(당시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을 뇌종양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바이든의 절친인 밥 케리 전 상원의원은 2월19일 미국 온라인 매체 <데일리 비스트> 기고에서 “그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그로 인해 지금 그가 이끌게 될 수많은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드문 능력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케리는 “바이든은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아이비리그 명문대 출신도 아니다. 그는 상원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하루 일을 마치곤 했으며, 거의 매일 여느 직장인처럼 서류 가방을 들고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 열차를 타고 귀가하곤 했다”고 돌이켰다. 바이든의 성실함과 소탈함에 대한 찬사다.

바이든이 부통령 시절 호흡을 맞췄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흙수저 출신의 자수성가한 인물로 세계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그 역시 안으론 변화를, 밖으론 ‘주먹’이 아닌 평화와 인류애를 역설했다. 취임한 지 채 1년이 안 돼 노벨평화상을 받는 극히 이례적인 영예도 누렸다. 그러나 인품이나 명민함, 공감 능력이 곧 그에 걸맞은 정치적 업적을 보증하는 건 아니다. 언행과 정책에 상관없이, 미국 대통령은 인류 보편의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세계 최강국의 이해관계를 판단하고 집행하는 정치 지도자인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바이든이 처한 정치적 환경은 우호적이지 않다. 집권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하고 상원에서도 전체 의석 100석을 공화당과 50 대 50으로 양분했지만,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 사회의 정치적 분열과 적대감은 심각한 수준이다. 트럼프 지우기나 진보적 의제를 마냥 강력하게 밀어붙이기엔 조심스럽다는 뜻이다. 좀체 꺾이지 않는 코로나19의 기세, 중산층이 무너진 경제 양극화, 엘리트 정치에 대한 반감과 포퓰리즘의 유혹도 여전하다. 바이든 특유의 유연한 균형감과 절차적 합의를 중시하는 태도도 보기에 따라선 유약한 리더십으로 비칠 수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신호는 “문화전쟁, 정치전쟁과 현실적인 내전의 위협 속에 앞길을 내다보는 게 쉽진 않지만, 바이든이 갈림길에 선 것은 분명하며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아직도 확신이 없다”고 꼬집었다. 바이든이 초당파주의, 예의, 타협을 추구하며 기업 권력까지 수용한 오바마의 길을 따를 수도, 과두정치와 싸우고 파시즘을 물리치고 부자들의 증오를 기꺼이 환영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길로 뚫고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두 개의 길을 동시에 갈 순 없다는 점이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2021년 1월20일, 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신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고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따로 연 송별 행사에서 연설하기 앞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AFP 연합뉴스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2021년 1월20일, 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신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고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따로 연 송별 행사에서 연설하기 앞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AFP 연합뉴스

“차이는 우리의 공통 가치를 이길 수 없다” 49년 전 출사표처럼…

바이든은 1972년 스물아홉 나이에 연방 상원의원으로 첫 출사표를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국민이 분열돼 있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습니다. (…) 우리는 너무나 자주 야망에 찬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 차이를 이용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차이를 넘어 우리를 이끌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우리는 너무 자주 후퇴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우리의 공통 가치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체제를 정상화하고 싶습니다.”

반세기 뒤인 지금 미국 현실과도 놀랍도록 닮았다. 바이든은 ‘공통의 가치’를 믿고 ‘다시 체제를 정상화’하는 책무를 이번엔 대통령으로서 수행하게 됐다. 그는 자서전 <지켜야 할 약속>에서 “나는 미국인들의 판단과 지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나는 미국인들의 심장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한다”고 했다. “그들의 투지, 결심, 용기, 기본적인 품위, 그리고 시민들의 변치 않는 자부심이 이 나라의 가장 큰 자원”이라고도 했다. 바이든의 믿음이 트럼프 시대의 ‘오류’를 바로잡고 미국에 치유와 화합을 가져올지, 나아가 세계 평화와 공동선에 얼마나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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