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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리얼리티쇼’에 얼마나 더 죽을 것인가

‘재선’에 몸 달아… 코로나19 확진 뒤 입원 사흘 만에 백악관행 ‘경악’
등록 2020-10-10 07:33 수정 2020-10-11 00:11
2020년 10월5일 오후(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으로 군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은 지 사흘 만에 퇴원을 강행해, 백악관으로 돌아온 직후 마스크를 벗고 있다. UPI 연합뉴스

2020년 10월5일 오후(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으로 군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은 지 사흘 만에 퇴원을 강행해, 백악관으로 돌아온 직후 마스크를 벗고 있다. UPI 연합뉴스

2020년 10월1일 저녁(미국 동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에 있는 자기 소유의 골프클럽 연회장에 들어섰다. 한 달 앞으로 바짝 다가온 대선(11월3일)의 돈줄인 정치자금 기부자 초대 행사였다. 이날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몹시 지쳐 보였다. 연일 강행군을 한 선거 유세로 목소리가 거칠어진데다, 샹들리에 불빛에 안색이 창백하게 비쳤을 수도 있다. 참석자 대다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불과 몇 시간 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게 되리라는 걸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회장에 도착하기 직전 본인과 보좌관들까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다는 신속검사 결과를 통보받은 사실은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느 때처럼 이 자리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고, 몇 시간 뒤 확진 판정을 받았다.

확진 가능성 감추고 공개 석상 참석 ‘충격’

10월3일 미국 방송 은 이틀 전 일을 자세히 전하면서 “트럼프가 호프 힉스 백악관 보좌관의 감염 사실이 공개된 뒤에야 2일 이른 새벽 트위터에 발표한 자신의 ‘양성 진단’ 소식은 미국의 리더십을 대혼란에 빠뜨렸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19 확진은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암살 미수범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이후 가장 심각한 ‘미국 대통령 신변 이상’ 사태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2일 오후 워싱턴 인근 군병원에 입원해 격리치료를 시작했다. 첨단 과학기술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심장부 백악관도 수백 나노미터(1㎚=10억분의 1m) 크기의 미물인 바이러스 침투를 막지 못했다. 문제는 그 빈틈이 보건의료의 한계가 아니라 최고 지도자의 무지와 부주의에서 생겼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자신의 코로나19 확진 가능성을 알면서도 그것을 숨긴 채 공개 석상에 참석한 사실은 충격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19 감염과 입원은 빅 뉴스였다. 병세를 두고도 불투명하고 엇갈리는 전언이 쏟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약된 덱사메타손(염증치료제)과 렘데시비르(항바이러스제)가 중증 환자에게만 사용되는 약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병세가 위중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74살 고령에 과체중인 ‘고위험군’ 환자인데다, 한때 혈중 산소포화도가 급락해 산소 치료를 받은 사실도 우려를 보탰다.

다음날 오전 백악관 의료진은 언론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상태가 아주 좋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브리핑 뒤 마크 메도스 백악관 비서실장은 기자들과 따로 만나 “트럼프 대통령의 활력 징후가 최근 24시간 동안 매우 우려스러웠다. 향후 48시간이 치료의 고비가 될 것”이라며 정반대 상황을 귀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서실장의 말이 인용된 언론 보도를 보고 ‘격노’했다고 한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병원에서 정장 차림의 영상 메시지를 트위터에 올려 ‘조기 퇴원’ 가능성을 내비쳤다. “지금 나는 훨씬 좋아졌다. 나는 백악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변 사람 전염되거나 죽을 수도, 미친 짓”

입원 이틀 후인 10월4일, 트럼프 대통령은 ‘깜짝 외출쇼’를 벌였다. 병원 밖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경호원들까지 동승한 차량을 타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돌아와서는 “매우 재미있는 나들이였다. 나는 코로나19에 대해 많이 배웠고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격리치료 원칙을 어긴 무책임과 무감각에 의료 전문가들은 경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입원치료 중인 월터리드 군병원의 내과 전문의 제임스 필립스는 “대통령의 ‘정치쇼’가 수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다. 주변 사람들은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도 있다. 이건 미친 짓이다”라고 혹평했다.

10월5일 오후, 트럼프 대통령은 끝내 퇴원을 강행했다. 입원 사흘 만이다. 숀 콘리 백악관 주치의는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위험한 상황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면서도 “모든 의료적 판단에 비춰 대통령의 안전한 퇴원에 동의한다”는 모호한 의견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질병관리청과 세계보건기구(WHO)의 임상 조사 결과를 보면, 코로나19 환자가 완치되기까지 경증은 평균 2~3주, 중증은 최대 6주가 걸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병원을 나서기 직전에도 트위터에 특유의 허세 가득한 글을 올렸다. “기분이 정말 좋다. 코로나19를 두려워 말라. 당신의 삶을 지배하게 놔두지 말라. ‘트럼프 정부’ 아래서 우리는 정말 위대한 약들과 지식을 발전시켰다. 나는 20년 전보다 더 느낌이 좋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완치되지 않은 채 퇴원을 강행하고 잘못된 자신감을 부풀리는 데 대한 우려와 비판도 거세다. 미국 시민단체 ‘퍼블릭 시티즌’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트위트 때문에 더 죽을 것인가?”라는 짧고 강렬한 촌평을 날렸다. 진보 성향 시민단체 ‘인디비저블’의 리아 그린버그 공동대표도 “코로나19를 두려워 말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역겹고 무책임한 메시지다. ‘대통령’에게서 나온 이 메시지가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불필요한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병색’보다 ‘패색’ 더 짙어져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시민의 안전’보다 ‘대통령 재선’이 더 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트럼프의 ‘병색’보다 ‘패색’이 더 짙어지고 있다. 집권 공화당 선거캠프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현직 대통령 프리미엄을 쥔 후보의 대면 유세가 막힌데다, 코로나19 사태가 새삼스레 대형 악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악관과 선거캠프의 측근들이 줄줄이 코로나19 확진 또는 예방적 격리 조처를 받은 것도 타격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입원치료 중이던 10월1~4일 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투표 의향 응답자의 57%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트럼프 지지율은 41%에 그쳤다. 8월 양자 대결이 확정된 뒤 최대 격차(16%포인트)로 벌어진 것이다. 트럼프는 퇴원한 다음날인 6일 밤, 불과 두 시간 새 무려 40건의 폭풍 트위트를 날렸다고 <블룸버그뉴스>가 보도했다. 대부분 숙적 때리기, 온갖 추문에 대한 항변, 여러 현안에 대한 주장이었다.

한편, 지구촌을 휩쓰는 코로나19 대유행은 중국에서 첫 발병 보고가 나온 지 9개월이 넘도록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0월7일 현재 전세계 누적 확진자 수는 3600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105만 명에 이른다. 미국에서만 확진 772만여 명, 사망 21만6천여 명이 나와 가장 심각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70년 동안 미국이 치른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이라크전쟁 전사자 수를 모두 합친 것(약 10만2천 명)의 두 배가 넘는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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