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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만보

[북경만보] 아버지를 ‘개새끼’라 부르고 뺨 때린 아이들

문화혁명 초기, 피와 살이 튀는 ‘붉은 8월’의 희생자 라오서, 그가 자살한 타이핑후

제1314호
등록 : 2020-05-25 03:05 수정 : 2020-05-2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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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작가 라오서가 살던 베이징 집에 놓인 두상. 라오서는 문화혁명 뒤 복권됐다.

3월 초지만 여전히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베이징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의 작은 거실에서 만난 녜위안쯔는 머리가 파뿌리처럼 하얀 85살 할머니였다. 하지만 기억력은 여전히 이팔청춘이어서 40년 전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술술 풀어놓았다. 녜위안쯔를 만난 때는 2006년으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문혁)이 일어난 지 40주년 되는 해였다.

본격적인 문혁 시작을 알린 대자보

“나는 그저 마오 주석과 장칭(마오쩌둥 부인으로 ‘문혁 사인방’의 일원), 그리고 캉성(문혁 때 중앙문혁소조 고문과 선전조직 조장으로 역임) 동무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고, 내가 한 일은 마오 주석의 혁명사업이었다. 절대 개인적인 원한 해소나 출세를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 모든 것은 그저 혁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차례 ‘혁명’을 강조하며 ‘나는 억울하다’고 항변하던 녜위안쯔는, 1966년 5월25일 베이징대학에 ‘전국 최초로’ 문혁 대자보를 붙인 인물이다. 당시 베이징대 철학과 당지부 서기이던 녜위안쯔는 교직원 5명과 함께 ‘부르주아 세력이 베이징대를 장악했다’며 관련 인물 3명의 실명을 밝혀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대자보는 마오쩌둥에게서 ‘전국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라는 칭찬을 받으며 며칠 뒤인 6월1일 전국의 신문과 잡지, 텔레비전, 라디오로 전파됐다.

녜위안쯔가 주동한 베이징대 문혁 대자보는 마오쩌둥이 기획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녜위안쯔의 대자보 내용이 전국에 방방 울리던 6월1일, <인민일보>는 ‘모든 우귀사신(괴물과 악마)을 척결하자!’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전국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아이들은 책상을 박차고 나와 빨간 완장을 달고 ‘모든 낡은 것을 때려 부수러’ 거리를 휩쓸며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다녔다.

이 아이들은 마치, 1496년과 1497년 이탈리아 피렌체 거리에서 세상의 모든 허영과 사치품을 불태우고 다녔던, ‘사보나롤라의 소년들’을 연상케 한다. 사보나롤라는 당시 피렌체공화국을 지배하던 광적인 수도사로, 그는 타락한 피렌체를 정화해 신의 가르침이 지배하는 신정국가를 만들려면 ‘허영의 소각’을 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1496년 2월7일, 두건을 쓴 소년들이 떼지어 거리를 누비면서 조금이라도 사치품을 몸에 지닌 사람들한테서 그것을 몰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타락한 습관을 추방하려는 ‘사보나롤라의 소년들’의 행동을 찬양했다. …1497년. 사육제 마지막 날인 오늘… 모두가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대행렬에 참석했다. 대부분 사람이 흰옷에 붉은 십자가를 들었다. …광장에는 커다란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어진 사치품의 산이 쌓여 있었다. …사보나롤라가 평소에 설교한 ‘허영의 소각’이 집행될 판이었다. …소년들이 늘어서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불은 순식간에 피라미드 전체를 휘덮는다.”(시오노 나나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인민이 아끼던 작가, 의문의 자살

문혁 때 ‘사보나롤라의 소년들’은 홍위병이다. 대부분 10대로 마오 주석이 ‘너희는 아침 8시의 태양’이라고 한 ‘마오의 아이들’이다. 홍위병은 마오 주석에 의해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성’이라고 불린 ‘네 가지 낡은 것’을 타도해서 세상을 정화하려고 했다. 타도하고 정화해야 할 대상은 대부분 자신의 스승이거나 부모 세대였다.

유명 작가 톈한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개새끼’라고 하며 비판 대자보를 쓰기도 했다. 지금은 감금된 전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도 홍위병 시절 자기 아버지이자 원로 혁명가인 보이보를 반동분자로 비판하며 뺨을 때렸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반혁명분자로 밀고해 비판하는 일은 문혁 때 ‘집밥 먹듯’ 흔한 일이었다. 혁명 영웅과 존경받던 지식인, 예술가가 줄줄이 끌려나와 어린 홍위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갖은 모욕을 당했다. 그중 상당수는 자살하거나 맞아 죽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불길처럼, 피렌체를 정화한다며 온 거리에서‘허영의 소각’을 벌인 ‘사보나롤라의 소년들’처럼, 중국 홍위병은 ‘낡은 문화를 활활 태운다’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의 부모와 스승, 노작가를 질질 끌고 다니며 ‘계급정화’ 운동을 했다. 누군가는 그 시기를 중국판 ‘제노사이드(대학살) 시대’라고 했다. 문혁 전에도 지식인이 계급혁명과 사상정화운동을 빌미로 숙청됐지만, 특히 문혁 기간에 그들은 마녀처럼 집중적으로 사냥되고 불태워졌다.

1966년 8월23일 아침, 라오서가 마당에서 노는 네 살 손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간다. ‘잘 가’라고 말해줄래?” 그날 아침 집을 나간 라오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의 아내가 저녁 늦게 연락받고 라오서를 찾았을 때는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 주검이 발견된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공원에 있는 호수 타이핑후였다. 아침에 집을 나간 라오서는 종일 타이핑후 주변에 혼자 앉아 ‘마오 시선집’을 읽었다. 그리고 인적이 뜸한 저녁쯤 호수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 증언은, 아내가 연락받고 타이핑후로 갔을 때 처음 라오서의 주검을 발견한 공원 관리인이 들려주었다는 내용이다.

소설 <낙타 상자>와 <찻집>의 작가인 라오서는 마오의 사회주의 신중국에서 중요한 지식인이자, 당시 미국과 일본 등 세계에 널리 알려진 작가였다. 신중국 건국 전,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에 머물던 라오서는 저우언라이가 친서를 보내 ‘신중국 건설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중국 정부와 인민이 아꼈던 작가다. 그런 라오서도 ‘마오의 아이들’ 홍위병의 박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라오서는 타이핑후에 투신하기 전날 늦은 밤까지, 베이징 중심가인 궈쯔젠에서 문인협회 사무실까지 홍위병에게 끌려다니며 온몸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어른들은 부추겼고 그들은 혁명이라 믿었다

라오서가 자살하기 약 2주 전,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여자중학교에서는 볜중윈 부교장이 자신의 제자인 그 학교 학생 홍위병에게 고문과 구타를 당하다 죽었다. 스승을 죽인 주범이자 당시 그 여학교 홍위병 지도부인 쑹빈빈은 8월18일, 천안문(톈안먼)에서 열린 전국 백만 홍위병 대회에서 천안문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의 찬사를 받았다. 마오가 친히 ‘쑹야오우’(무력을 원한다)라고 이름까지 바꿔주었다. 문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해 8월은 홍위병의 ‘공포정치’로 온 거리에 피와 살이 튀는 ‘붉은 8월’이었다.

“당시 십 대 애송이에 불과했던 우리에게 누구도 그런 (때리고 부수는 등 폭력적인) 행위가 패륜이고 범죄라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어른들은 우리를 부추겼고, 우리는 그것이 정말 위대한 혁명을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문혁이 끝난 뒤, 우리는 마오쩌둥의 충실한 어린 혁명가에서 하루아침에 부모와 선생을 고발하고 학대한 패륜아가 되었다….”

문혁 때 베이징 중학생 홍위병 지도부이던 리둥민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 역시 2006년 문혁 40주년에 만났던 인물이다. 녜위안쯔와 달리 리둥민은 문혁 때 자신의 행위를 반성했다. 실제로 문혁 때 수많은 스승과 지식인을 ‘타도하고 정화하는 데’ 앞장섰던 어린 홍위병 중 일부는 훗날 사과문을 발표하거나 참회록을 썼다. 하지만 라오서를 비롯해 자신의 스승을 죽음으로 몰았던 수많은 ‘마오의 아이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일부 홍위병 출신 지식인(현재)은 문혁 때 경험을 ‘후일담 문학’ 형식으로 출판해서 자신들의 행위를 ‘민주수업’으로 미화하거나, 농민·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며 인민의 위대함을 체험했다는 식으로 낭만적인 일로 포장하기도 했다.

문혁을 겪은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한, 보고문학 <백 사람의 십 년>을 쓴 펑지차이는 “나중에 태어난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을까?”라며 “정치에서 휴머니즘이 빠지면 사회적 비극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문혁이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문혁은 20세기 인류 최대 비극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시진핑의 아이들은 ‘인터넷 홍위병’일까

1966년 8월 라오서가 빠져 죽었던 타이핑후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1971년 지하철 공사를 하며 호수가 있던 자리가 매몰됐다. 2005년 타이핑후라는 같은 이름으로 새롭게 복원되기는 했지만, 예전 위치와 모습은 아니다. 라오서의 죽음과 함께 타이핑후도 문혁처럼 과거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1498년, 피렌체공화국 사람들은 사보나롤라가 신의 예언자가 아니라 사실은 미치광이고 사기꾼 예언자로,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해서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불태워 죽였다. 사보나롤라가 불타 죽은 곳은 바로 자신이 세상을 정화한다며 ‘허영의 소각’을 벌인 중심광장이었다. 뼛조각과 재만 남은 사보나롤라는 병사들에 의해 수레에 실려 피레네 아르노강에 던져졌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소년들’이 사보나롤라의 사후에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기록해놓지 않았다. “마오 주석은 우리의 붉은 사령관이며, 우리는 마오 주석의 홍위병”이라고 노래했던 ‘마오의 아이들’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1월21일 이후,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생기면서 세계적인 감염병 유행을 몰고 왔을 때, 우한의 작가 팡팡은 매일 ‘우한 일기’를 썼다. 얼마 전 그 ‘일기’가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간되자 팡팡은 ‘중국인의 양심’에서 하루아침에 중국의 비극을 외국에 팔아먹고 자기 잇속을 챙기는 뻔뻔한 매국노로 돌변했다. 인터넷에서는 팡팡을 저격하는 ‘웹자보’가 끝도 없이 쏟아지고, 우한의 한 아파트에선 문혁 때처럼 팡팡을 비난하는 글이 나붙기도 했다.

졸지에 중국의 비극을 팔아먹는 파렴치한이 된 팡팡은 21세기 ‘마오의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다. 그들은 라오서를 때려 타이핑후에 빠져 죽게 했던 것처럼, 팡팡도 ‘여론의 매’에 맞아 죽기를 바라는 듯하다. ‘마오의 아이들’ 후계자를 자처하는 ‘인터넷 홍위병’은 그들의 세계 ‘유토피아’(烏有之鄕)에서는 팡팡을 향한 비난을 ‘자발적인 애국주의 군중운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운동은 ‘중국 사상문화운동과 이데올로기 전쟁의 영광스러운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라오서는 죽고 타이핑후는 사라졌지만 ‘마오의 아이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지금도 곳곳에서 ‘허영의 소각’을 벌이고 있다.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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