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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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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 망한 말뫼시 기적의 탈바꿈

일마르 레팔루 전 말뫼 시장 “시민 끝장토론으로 신산업 합의”

일자리 25% 사라진 스웨덴 중공업 도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등록 2020-01-18 05:54 수정 2020-05-02 19:29
1월13일 서울 중구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사무실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는 일마르 레팔루 전 스웨덴 말뫼 시장.

1월13일 서울 중구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사무실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는 일마르 레팔루 전 스웨덴 말뫼 시장.

2002년 9월25일, 1980년대까지 세계적인 조선 강국이던 스웨덴 코쿰스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이 한국 현대중공업에 단돈 1달러에 팔려갔다. 스웨덴 국영방송은 장송곡을 틀며 이 모습을 생중계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말뫼의 눈물’이었다. 지역의 주력 산업이 무너지면서 1990~95년 말뫼시에서 사라진 일자리는 2만7천여 개에 이른다. 공장도, 노동자도 떠난 말뫼시는 낮은 고용률과 높은 실업률 등으로 재정 파탄 직전까지 갔다. 이후 6개월 동안 계속된 끝장토론 결과, 시민들은 기존 산업과 결별하고 새 산업을 일으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2007년 말뫼시는 유엔환경계획(UNEP)에서 꼽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가 됐다. ‘눈물의 도시’에서 ‘친환경 에코 도시’로의 대전환이었다.

골리앗 크레인 1달러에 넘긴 ‘눈물의 도시’

일부 전문가는 말뫼시의 성공적인 전환은 외레순대교(말뫼와 덴마크 코펜하겐을 연결하는 대교)와 터닝토르소(조선소 터에 지은 친환경 에너지 자립 주상복합건물) 건설 등에 따른 건설 경기 붐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일마르 레팔루 전 말뫼 시장은 “외레순대교와 터닝토르소 건설은 ‘내일의 환경도시’라는 더 큰 비전을 실현하는 하나의 예시에 불과했다”고 일축했다.

은 1월13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사무실에서 일마르 레팔루 전 말뫼 시장을 만났다. 레팔루 전 시장은 ‘말뫼의 눈물’의 산증인으로 1994년부터 2013년까지 19년 동안 시장을 하며 말뫼시를 되살렸다. 레팔루 전 시장은 1월9∼10일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0 경남 사회혁신 국제포럼’(경상남도·한국토지주택공사 주관, LAB2050·경남연구원·경상대학교·창원대학교·경남대학교·경남과학기술대학교·인제대학교 주최)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노동자와 주민들은 어떻게든 조선업을 유지해달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혁신산업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나.

말뫼시는 대규모 실직을 막기 위해 조선소 자리에 ‘사브의 상용자동차 조립공장을 유치했다. 하지만 사브도 미국 지엠(GM)에 팔리면서 문을 닫았다. 사브는 조선소 자리의 3분의 2 정도를 사용하며 상용자동차를 조립했다. 남은 일부 자리에서는 스웨덴 해군의 잠수함을 건조했다. 이때만 해도 조선소 노동자가 하던 작업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사브 공장이 폐쇄된 뒤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말뫼시 일자리의 25%가 사라졌고, 말뫼시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3만여 명이 실직했다.

지식·관광·서비스 도시 전환 대성공

기업인, 노조, 시장, 대학교수 등이 참여한 위원회를 만들어 ‘20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도시의 장기적인 산업은 무엇일까’를 두고 끝장토론을 벌였다.

말뫼시 역시 전통 제조업 도시로서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코쿰스도 사브도 실패하자, 시민들은 기존 산업으로는 더는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경쟁력을 잃은 산업도시를 직시했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중요한 건 ‘비전’이었다. 1992년 브라질 리우 환경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 선언’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행동계획을 담은 지침서 격인 ‘어젠다21’이 채택됐다. 당시 스웨덴도 이 협약에 가입했다. 스웨덴 정부와 말뫼시는 리우 환경회의가 가진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지역 도시와 정부, 유럽연합(EU) 차원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했다.

시장 취임하고 두 달 뒤 주민, 기업인, 대학교수, 공무원 등 각계 인사가 참여한 토론그룹을 만들었다. 3~4개월 동안 10년, 20년 뒤에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뭔지 토론했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냈다. 교통 허브, 문화 허브, 지속가능성 허브 등 말뫼시를 되살릴 여러 비전이 제시됐다. 이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현장에서 논의가 살아 숨 쉬게 했다. 신문 지면에서 토론을 벌였고 콘퍼런스가 열렸다. 끝장토론 결과 말뫼시가 그동안 해온 전통 제조업과 결별하고 지식, 정보, 관광 서비스 등 신산업을 유치, 개발하자는 사회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말뫼시는 2002년 코쿰스조선소 터를 모두 사들여 비전을 실현해갔다. 조선소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말뫼시와 덴마크 코펜하겐을 연결하는 외레순대교를 짓는 걸 보면서 말뫼시의 변화를 실감했다. 말뫼시에 대한 신뢰도 회복됐다. 1997년 말뫼대학이 설립됐다. 하지만 이미 말뫼시 인근에 있던 룬드대학이 스웨덴의 명문으로, 학생 수만 5만2천여 명이고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대학이었다. 말뫼대학은 기술·환경, 건강·사회 등 교차 응용 학문에 집중했다. 기존 학문에 한계를 느낀 학자들과 학생들이 말뫼대학으로 오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만들려면 기업 유치도 중요했다. ‘지속가능한 환경도시’라는 도시 이미지는 브랜드 이미지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는 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모든 정보와 결정 과정에서 시민이 변화의 주체로, 쉽게 접근하고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시민 참여를 어떻게 구현했는가.

시민들이 직접 말뫼시를 바꾸고 있다는 효용감을 느끼게 하는 게 중요했다. 말뫼시 동부의 오래된 주택단지에선 홍수가 자주 났고 사회적 불신도 높았다. 이 주민들에게 말뫼시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자고 했다. 4천여 명에 이르는 주민의 10%가 토론에 참여했다. 빗물을 지하 저장고에 모아 조경수로 쓰고 음식물 쓰레기를 바이오가스 에너지원으로 활용했다. 주민들은 자신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가 차량용 바이오가스로 재생돼 버스 연료가 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시민들이 변화의 주체가 된 거다. 하다못해 외레순대교를 지을 때도 시민들이 직접 한 삽씩 뜨게 했다. 시민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사업 초기, 조선소 터에 들어선 친환경 에너지자립 건물인 터닝토르소의 독특한 외관에 부정적인 시민도 많았다(움직이는 인간의 뒤틀린 몸통을 형상화해 지상 1층에서 최상층인 54층까지 시계방향으로 90도 비틀어져 있다). 하지만 2005년 ‘엠포리스 스카이스크래퍼 어워드’에 선정되면서 세계 최고의 마천루가 된 뒤 터닝토르소는 시민들의 새로운 자부심이 됐다. 터닝토르소와 외레순대교 건설 등이 비전을 현실화하는 한 방법이었다면, 젊은이들이 계속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학이 필요했다. 당시 말뫼시 인구는 23만 명으로 대부분 고령이었다. 지금은 말뫼시 인구 34만 명의 절반이 35살 이하다. 40%는 29살 이하다. 1992~95년 2만8천여 개 일자리가 사라진 말뫼시에는, 1999년 이후 7만여 개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

울산도 20년 뒤 지속가능한 ‘비전’ 실험해야

한국 현대중공업이 크레인을 매입한 뒤 조선업이 주력 산업이던 울산 동구는 10여 년 만에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었다.

지난 경험에 비춰보면, 상황은 더 나빠질 수도 있다. 10년, 20년 뒤에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어떤 비전으로 도시를 되살릴지 고민해야 한다. 시민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새로운 산업을 시도해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로 만들어 누구든 와서 도전할 수 있는 시험대로 바꾸는 건 어떤가. 도시에서 가장 혁신적인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한국의 다른 산업도시를 위한 새로운 모델이 될지 모른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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