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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산불은 ‘기후 재앙’

“인도양 ‘쌍극화’로 기온 상승 영향”…

보수 정치권·언론은 ‘온난화 인과관계’ 부정
등록 2020-01-13 10:46 수정 2020-05-03 04:29
대형 산불이 휩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남동부 코바고에서 1월6일 한 주민이 재가 된 집터를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대형 산불이 휩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남동부 코바고에서 1월6일 한 주민이 재가 된 집터를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역사상 최초의 기후난민이 됐다.”

호주 빅토리아주 남동쪽 작은 마을 말라쿠타에 있는 처가를 방문했다가 산불에 갇혔던 닉 리타는 호주 해군에 의해 구조된 뒤 인터뷰에서 절망적인 심정을 토로했다.

“호주 역사상 첫 기후난민 됐다”

2019년 마지막 날, 리타 가족은 스마트폰으로 화재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여름(12월) 휴가를 처가에서 보내기 위해 말라쿠타로 왔지만 때마침 마을 서쪽에서부터 산불이 번져왔다. 처가를 떠나 마을 변두리 지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리타는 아이들을 콘크리트로 사방이 막힌 가장 안전한 방에 머물도록 했다. 아침이 됐으나 날이 밝지 않았다. 밤보다 더 어두웠다. 화재적운이 태양을 덮었기 때문이다. 어두웠던 하늘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빨갛게 물들었다.

리타는 “죽음의 공포와 침묵의 지루함이 기묘하게 섞인 가운데 우리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바람과 달리 바람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폭발음과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와 집이 폭발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오자 가족을 차에 태워 해안가로 향했다. 바닷가에는 보트에 식수를 옮겨싣는 사람도 있었다. 화염이 해안가까지 덮치면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주민과 관광객 수천 명은 말라쿠타 해변에 완전히 고립됐다. 배와 비행기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흘이 지난 뒤에야 호주 해군이 말라쿠타 해변에 도착했고, 리타 가족은 구조됐다. 가까스로 화재 현장을 벗어난 리타 가족은 태즈메이니아주에 있는 집에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보안검색대에서 안전요원이 얼굴을 찡그리며 리타 가족을 붙잡았다. 온몸에서 나는 불 냄새 때문이었다. 폭발물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리타의 아내 크리스틴 브래들리가 지친 표정으로 “우리는 말라쿠타 화재 현장에서 오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보안요원은 표정을 바꾸며 리타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1월5일께 무사히 집에 당도할 무렵 크리스틴은 친정집을 화마에 잃은 슬픔을 담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우리는 화재로부터 무사히 탈출했다. 하지만 호주 산불은 끝나지 않았다. 태즈메이니아도 언제 불에 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화재로부터 빠져나왔지만 동시에 또 다른 화재를 향해 가고 있다. 우리가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산불은 계속될 것이다.”

3월까지 계속 탈 가능성

지난해 9월6일부터 호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산불이 호주 전역으로 번지면서 4개월째 호주를 태우고 있다. 호주 전역의 3분의 1에 가까운 지역이 화재 영향권에 들었다. 호주 정부 당국 발표를 보면 1월8일 기준으로 남한 면적보다 넓은 1070만헥타르가 불에 탔다. 건물 5900여 채가 불에 탔고 최소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10만 명이 화재를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재산 피해는 정확하게 집계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자연 생태계의 보고인 호주에서 사상 최악의 산불이 계속되면서 동물이 입는 피해도 심각하다. 시드니대학 생태학자인 크리스 딕먼은 1월6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0억 마리의 동물이 목숨을 잃었다”고 분석했다. 환경단체들은 이번 화재로 호주에만 서식하는 쇠주머니쥐와 일부 개구리 종 등 멸종위기 동물을 다시는 지구에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화재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산불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부에선 고온건조한 호주의 여름이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산불이 3월은 돼야 끝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호주 소방 당국은 지난해 10월 산불이 확산한 뒤부터 소방대원 등 연인원 25만 명 이상을 투입하고 소방차량 700대와 항공기 100대 이상을 동원했으나 화재 진압보다는 인명·재산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해왔다. 산불 규모가 너무 커서 진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사리 진화되지 않는 호주 화재 현장 수습을 위해 국제사회도 공조에 나섰다. 미국과 캐나다, 뉴질랜드가 화재 현장 수습을 위해 호주로 소방관 수백 명을 보냈고, 싱가포르는 군인과 소방관 1천 명을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는 기온이 높고 건조한 여름(12∼2월) 날씨 때문에 크고 작은 산불로 매년 홍역을 치러왔다. 호주 당국은 1850년부터 최근까지 산불로 8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인명피해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진행형인 ‘2019~2020년 산불’보다 큰 규모의 산불도 여섯 번 있었다. 여섯 번 중 한 번은 태즈메이니아주에서 일어났고 나머지 다섯 번은 빅토리아주에서 불이 붙었다.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2009년 빅토리아주 산불은 17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호주에선 당시 산불이 처음 타올랐던 2월7일 토요일을 ‘검은 토요일’로 부르는데 불이 3월14일까지 계속됐다. 검은 토요일과 비교하면 ‘2019~2020년 산불’로 인한 인명피해는 크지 않으나 면적만 보면 압도적으로 넓다. 사상 처음으로 호주의 여섯 개 주 전부가 화재 영향권에 들었다.

호주 빅토리아주 이스트깁스랜드에 있는 관광도시 오보스트 동쪽이 1월4일 산불에 휩싸인 모습을 촬영한 위성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호주 빅토리아주 이스트깁스랜드에 있는 관광도시 오보스트 동쪽이 1월4일 산불에 휩싸인 모습을 촬영한 위성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시드니 낮기온 48.9도 치솟아

호주에서 기록적인 산불이 발생한 원인으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기후변화’를 꼽는다. 호주는 ‘인도양 쌍극화 현상’ 때문에 매년 더 더워지고 더 건조해지고 있다. 1910년 이후 평균기온이 섭씨 1도 올랐다. 인도양 쌍극화 현상은 서부 인도양의 표면 수온이 동부보다 높은 현상인데 인도양 동서부 수온 차가 최근 60년 만에 가장 크게 벌어진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18일에는 일평균 기온이 41.9도를 기록했고, 1월4일엔 시드니 서부가 낮 최고기온 48.9도를 기록하는 등 가장 더운 날씨를 보였다.

‘발화점 이상의 온도, 탈 것, 산소.’ 이렇게 세 가지가 있어야 불이 붙는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그 불을 붙였나,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던 불은 아니었나’라는 질문은 논란을 낳는다. 호주 산불도 그렇다.

사상 최악의 규모 산불에 삶의 터전을 잃은 호주 시민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번 산불에 대응하는 정부 정책은 적절했나’ ‘호주 정부는 대형 산불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는가’ ‘대규모 재난을 통해 호주 시민사회가 얻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온난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등의 문제의식이 화마가 태운 잿더미에서 피어올랐다.

이번 화재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됐던 사람은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였다. 모리슨 총리는 화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 말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휴가를 떠났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는 산불로 9명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는데 두 명의 소방관이 잇따라 목숨을 잃으면서 휴가를 떠난 총리에 대한 호주 시민의 분노가 들끓는 계기가 됐다. 귀국한 그는 몇 차례 대국민 사과에 나섰지만 화가 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모리슨 총리는 1월2일 산불 피해 지역인 뉴사우스웨일스주 남동부 코바고를 방문했다가 주민들에게 악수를 거절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모리슨 총리는 화재 진압을 위해 군 투입을 결정하면서도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집권 여당인 호주자유당 홍보 영상을 통해 병력 투입 소식을 알렸다. 문제는 소방 당국 관계자들이 해당 사실을 공유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불 최대 피해 지역인 뉴사우스웨일스주 소방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국방부의 지원 사실을 정부로부터 직접 전해듣지 못해 유감”이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기후변화 위기 막을 대안 정치세력 부재

호주의 자원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와 ‘산불’의 인과관계를 부정해온 보수 정치인과 산업계에도 불똥이 떨어졌다.

호주는 세계 1위의 석탄,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전세계 석탄 수출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호주는 세계 비영리 기후변화 연구기구가 지난해 말 발간한 ‘2020 기후변화 퍼포먼스 인덱스’ 보고서에서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정책 분야에서 57개 주요국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보수 정치인들은 여전히 기후변화와 산불의 인과관계를 부정한다. “환경단체가 산불에 대비해 맞불을 놓는 것을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에 화재 규모가 더 커졌다”고 맞선다. 맞불은 산불이 넓은 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숲을 태워 불길을 차단하는 방재 활동이다. 학계에서는 고온건조해지는 기후 상황을 고려할 때 산불 진압책으로 맞불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보수 정치인들은 막무가내다.

호주 시민사회는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도 집권여당을 견제할 만한 정치세력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2019년 12월 중순 산불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때 야당인 노동당의 당수 앤서니 앨버니지는 석탄 수출 산업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탄광촌을 방문했다.” 2014년 세계적인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1월4일 기고글 ‘호주는 지금 기후자살을 하고 있다’에서 대안 정치세력이 부재한 호주의 현실을 규탄했다. 플래너건의 글을 보면 보수 언론사가 언론을 장악한 현실도 큰 문제다. 호주에서 유통되는 신문의 58%가 루퍼트 머독 소유 언론사로부터 나온다. 루퍼트 머독은 대표적인 지구온난화 회의론자다. 호주 브리즈번에 사는 데이비드 제임스(38)는 1월8일 과의 메신저 인터뷰에서 “호주 지역사회에는 정치인에게 목소리를 내고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는 무력감이 짙게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속수무책에 민심 들끓어

‘호주 산불을 막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에 대한 답을 호주 정부와 시민사회가 찾지 못하는 동안에도 불은 계속되고 있다. 피해는 오롯이 시민의 몫, 화마와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 몫이다. 뉴사우스웨일스주 정부는 소방 당국의 구조 활동을 통해 1만 채 넘는 건물과 무수한 인명을 화재로부터 지켰다고 밝혔지만, 산불과의 싸움 끝에 3명의 의용소방대원을 포함한 소방관 1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호주 시민사회의 불만은 집권세력을 향하고 있다. 1월 여름을 태우는 호주의 산불, 그리고 대형 재난 앞에서 속수무책인 정부에 대해 들끓는 민심. 어느 쪽도 이른 시일 내에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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