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내정간섭이란 무엇인가

남미 베네수엘라에서 선거로 뽑힌 대통령 무시하고

친미파를 임시 대통령으로 ‘승인’한 미국
등록 2019-02-02 16:27 수정 2020-05-02 19:29
‘쿠데타는 없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지난 1월27일 한 군사기지에서 장병들과 함께 구보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쿠데타는 없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지난 1월27일 한 군사기지에서 장병들과 함께 구보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익숙한 표현, 잊힌 인물도 무대로 돌아왔다. 그래, 또 시작인가? 지난 세기에나 가능할 법한 ‘초현실적’ 상황이, 베네수엘라를 다시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고 차베스가 첫 임기를 시작한 게 언젠가? 20세기 막바지, 1999년 2월이다. 20년째 이어진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스토킹’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번에도, 심상찮다.

노동계급 마두로 vs 엘리트 과이도
‘내가 대통령이다.’ 1월23일 스스로 ‘임시 대통령’임을 선언한 후안 과이도 베네수엘라 의회 의장이 같은 날 열린 집회에서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얼굴을 표지로 한 헌법 사본을 손에 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REUTERS

‘내가 대통령이다.’ 1월23일 스스로 ‘임시 대통령’임을 선언한 후안 과이도 베네수엘라 의회 의장이 같은 날 열린 집회에서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얼굴을 표지로 한 헌법 사본을 손에 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REUTERS

우파 인민의지당 소속 후안 과이도(35) 의원이 베네수엘라 의회 의장에 오른 것은 지난 1월5일이다. 닷새 뒤인 1월10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취임식을 열고 두 번째 임기를 공식 시작했다. 그리고 1월23일 과이도 의장은 돌연 ‘임시 대통령’을 자임하고 나섰다. 미국은 즉각 ‘과이도 대통령’ 정부를 승인했다. 베네수엘라 헌법 제233조는 대통령 유고시 의회 의장이 임시 대통령이 돼 권력을 승계하도록 정해놓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카라카스의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을 멀쩡히 지키고 있다. 미국은 마두로 대통령을 ‘전 대통령’이라 부른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겨룰 수 있는 믿을 만한 경쟁자다. 베네수엘라를 미래로 이끌어갈 비전을 갖춘 인물이다.” 과이도가 임시 대통령을 자임한 직후 미국 일간 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통신도 사설에서 과이도가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것”이라고 전했다. 은 그를 “차세대 민주주의 지도자”라고 표현했다. 무엇에 근거한 판단일까?

과이도는 베네수엘라 정치권에서 ‘신예’로 불릴 만하다. 현지 여론조사 전문기관 ‘힌터레이시스’가 지난 1월7~16일 성인 1580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1%가 “후안 과이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답했을 정도다. 중산층 집안 출신으로 베네수엘라에서 공대에 다닐 무렵 반차베스 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으로 유학해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그가 정치권에 뛰어들었을 때 든든한 배후가 돼준 건 우파 지도자 레오폴드 로페스(47)였다.

이른바 ‘지배 엘리트’ 집안 출신인 로페스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뉴저지주에 자리한 기숙형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그는 1990년대 정유업계에 몸담기도 했지만, 차베스 정부 출범 이후 우파 시위대의 구심점 노릇을 하며 정치력을 키웠다. 그는 마두로 대통령의 첫 임기 때인 2014년 반정부 시위 당시 폭력 사태를 배후에서 사주한 혐의로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이후 수감과 가택연금 생활을 이어왔다. 과이도 의원이 일약 의회 의장에 지명된 것도, 사실상 인민의지당을 이끌어온 로페스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마두로 대통령은 ‘노동계급’ 출신으로, 버스노동자로 일하다 노동조합 운동에 투신했다. 차베스 정부 출범을 위해 헌신한 그는 2000년 의회에 진출한 이후 의회 의장을 거쳐, 2006년 외교장관에 임명됐다. 이어 2012년엔 부통령에 오르면서, 명실상부 차베스 대통령의 후계자로 떠올랐다. 차베스 대통령 사망 이후엔 집권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2013년 4월 첫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당시 대선 때도, 베네수엘라 야권은 선거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대선에서 67%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야권 일부는 선거 참여를 거부했고, 일부는 선거 뒤 패배가 확정되자 ‘부정선거’라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 야권은 차베스 정부 시절에도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주장을 되풀이해왔다. 흥미로운 점은 야권이 ‘선거 부정의 핵심’으로 지목한 국가선거위원회(CNE)가 야권이 압승을 거둔 2015년 총선 때도 선거 주무를 맡았다는 점이다. 당시 선거 결과에 야권은 ‘이례적’으로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원유 매장량 세계 1위라서?

터치스크린을 이용한 전자투표 방식으로 치르는 베네수엘라 선거는 각종 국제기구의 선거 감시 활동을 통해 “매우 투명하고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이란 평가를 여러 차례 받았다. 퇴임 뒤 전세계 90여 개국을 돌며 선거 감시 운동을 벌여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선거 시스템은 단연 세계 최고”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정작 미국은 2013년 대선 때도 베네수엘라 대선 결과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 베네수엘라는 ‘사회주의 형제국’인 쿠바와 볼리비아에 국제시장 값보다 턱없이 싼 원유를 제공할 정도로 여유를 부리던 중남미의 부국이다. 마두로 정부가 들어선 뒤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국제 원유 가격은 지속적으로 폭락했고, 미국은 잇따른 제재로 베네수엘라 경제의 목을 졸랐다. 생필품 부족 사태가 만연했고, 물가상승률은 ‘천문학적’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지난해 11월,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무려 130만%를 기록했다. 손에 든 돈다발을 다 세고 나면, 값어치 없는 종잇조각이 될 만한 수준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베네수엘라의 2019년 물가상승률이 1천만%에 이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칠레 대통령 출신인 미첼 바첼레트 유엔난민기구 대표는 1월25일 “이어지는 경제·정치적 불안정 속에 매일 5천 명가량의 베네수엘라 국민이 국경을 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이 저런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자원을 빼앗기 위해서다. 베네수엘라는 원유 매장량 세계 1위다. 금 매장량도 세계 최대 규모고, 천연가스도 세계 4위 매장량을 자랑한다. (희귀 금속인) 콜탄을 비롯해 다이아몬드, 알루미늄, 철광석 등도 그렇고 수자원도 풍부하다.”

마두로 대통령은 1월30일 러시아 관영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미국 에너지부에 딸린 에너지관리청(EIA)이 2017년 내놓은 자료를 보면, 베네수엘라의 원유 매장량은 3천억 배럴 수준으로 세계 1위를 자랑한다. 그 뒤를 사우디아라비아(2664억 배럴), 캐나다(1697억 배럴), 이란(1584억 배럴), 이라크(1425억 배럴) 등이 잇고 있다. 미국의 원유 매장량은 392억 배럴로 세계 10위권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의 40%를 차지한다.

군사 개입 공공연히 주장하는 미국

“원유 자산을 눈여겨보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현재 주요 미국 업체들과 대화하고 있다. 이제는 결론을 내야 할 것으로 본다. 미국 원유업체가 베네수엘라에 투자해 원유 생산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미국 경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본다.”

과이도 ‘임시정부’ 출범 다음날인 지난 1월24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케이블방송 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마두로 ‘전 대통령’에게 최후통첩성 발언을 내놓으면서 나온 말이다. 나흘 뒤인 1월28일 베네수엘라에 대한 추가 제재 조처 발표를 위한 기자회견이 백악관에서 열렸다. 회견장에 들어선 볼턴 보좌관이 오른손으로 받쳐든 메모장에는 문장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 (탈레반과) 대화 환영. 콜롬비아로 병력 5천 명 파병.”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면서 메모가 적힌 종이를 바깥쪽으로 향해 들었다. 출입기자들에게 ‘사진을 찍어 널리 알리라’고 말한 셈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베네수엘라를 겨냥해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을러댔다. ‘모든 옵션’은, 언제나 ‘군사행동’을 가리킨다. 볼턴 보좌관이 누군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으로 전쟁의 북소리를 울렸던 인물이다. 그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와 약 2200㎞에 이른 국경을 맞대고 있다.

눈여겨봐야 할 인물이 또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1월25일 베네수엘라 담당 특사로 임명한 엘리엇 에이브럼스다. 에이브럼스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0년대 국무부 국제기구 담당 차관보, 인권·인도지원 담당 차관보, 미주 담당 차관보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특히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 좌파 게릴라 탄압과 학살의 배후에 그가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에이브럼스는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실에서 민주주의·인권 담당 선임국장을 거쳐, 부시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국제 민주주의 전략 담당 국가안보 부보좌관에 올랐다. 이라크 등 중동 지역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게 그 시절 그의 주요 업무였단다. 그가 ‘베네수엘라 특사’로 임명된 시점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볼턴 보좌관이 1월28일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추가 제재의 핵심은 마두로 정부의 ‘돈줄’을 철저히 막는 것이다. 그는 이날 회견에서 “마두로와 그 일당의 부패상을 지속적으로 폭로해왔다. 그리고 오늘의 결정으로 그들이 더 이상 베네수엘라 국민의 재산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오늘 조처로 70억달러 규모의 자산이 동결될 것이고, 향후 1년간 110억달러 규모의 원유 수출을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베네수엘라 군부와 경찰 쪽에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헌정 권력이 이양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이쯤 되면, 뭔가?

‘쿠데타’가 거론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라틴아메리카 담당 부처장을 지낸 호세 카르데나스는 지난해 6월5일 외교안보 전문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베네수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야 할 때”라며 “민족주의적 군부만이 합법적인 헌정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1월26일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이제는 베네수엘라 국민을 지원할 때다. 과이도 임시 대통령이 이끄는 새로운 민주적 정부를 승인하고, 이 악몽을 끝내야 한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국민과 함께할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모두 선택해야 할 때가 됐다. 자유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마두로 전 대통령과 그가 벌인 혼란의 편에 서는 것이다.”

경찰 국가인가 깡패 국가인가

굳이 국제법을 말해야 할까? 제2차 세계대전의 광기에 대한 인류의 반성으로 태어난 유엔은 헌장 제2조 4항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모든 회원국은 국제관계에 있어 다른 국가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해, 또는 국제연합의 목적과 양립하지 않는 어떤 방식으로도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거나, 무력행사를 삼간다.” 미국 진보매체 은 1월25일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썼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 이건 쿠데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