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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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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 학살을 기록하는 사람들

아시아 분쟁 지역 피해자 지원 사업 펼치는 ‘아디’ 활동가들

“공동체 치유 프로그램도 운영”
등록 2018-03-14 02:54 수정 2020-05-02 19:28
아시아 분쟁 지역에서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하는 단체 ‘아디’의 김기남, 황정은, 공선주, 이동화 활동가(왼쪽부터). 정용일 기자

아시아 분쟁 지역에서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하는 단체 ‘아디’의 김기남, 황정은, 공선주, 이동화 활동가(왼쪽부터). 정용일 기자

아시아 분쟁 지역의 피해자와 활동가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아시아 인권평화 디딤돌’(아디·ADI)이 전하는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의 상황은 참담하다. 지난해 8월 말 미얀마 군부가 로힝야에 탄압과 학살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90만 명이 고향을 등지고 방글라데시 난민캠프로 흘러든 것으로 추산된다. 난민이 늘어나는 만큼 캠프도 확장돼, 비탈길을 깎아 대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자리를 하나 까는 식으로 난민 텐트가 만들어졌다. 4월 우기가 다가오면서 산사태와 전염병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먹을 게 없어, 아이들은 밥에 설탕을 뿌려 먹고, 어른들은 소금에 비벼 먹는다.

설탕·소금에 밥 비벼 먹는 난민촌 사람들

2016년 1월 문을 연 아디는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 인종차별과 혐오가 남아 있는 아시아 국가를 돕는 여러 활동을 해왔다. 대표적으로 2013년 미얀마 중부 메이크틸라에서 벌어진 미얀마 무슬림에 대한 학살 실태 조사와 그에 따른 트라우마 치료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난해 8월 ‘로힝야 사태’가 터진 뒤에는 그해 12월부터 방글라데시 난민캠프 등에서 생존자들에게 학살 실태 조사를 하고 있다. 현재 아디를 이끄는 것은 변호사에서 아시아 분쟁 지역 피해 생존자를 지원하는 전업 활동가로 변신한 김기남, 플루트 전공자로 공동체 음악치유 활동을 위해 지난 2월 합류한 황정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충격받고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돌아본 뒤 평화활동가가 된 이동화, 단체가 원하는 지원이 아니라 현장에서 원하는 연대사업을 해야 한다는 고민으로 가득 찬 공선주 등이다. 미얀마, 방글라데시, 한국 등을 오가느라 바쁜 아디 활동가 4명을 3월6일 서울 동작구 아디 사무실에서 만났다.

현재 로힝야 난민을 수용하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 상황은 어떤가.

김기남 2017년 2월 처음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의 실태를 조사했다.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 토벌은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때는 2016년 10월 학살 뒤였다. 이때 방글라데시 난민캠프로 넘어온 사람이 7만5천 명 정도였다. 이때만 해도 유엔난민기구(UNHCR)가 관리하는 등록 난민캠프 2곳과 그 외 미등록 난민캠프들에서 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민 수가 90만 명에 이르자 기존 커뮤니티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됐다.

난민캠프에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생활하수가 그대로 주변에 버려지고 있다. 2017년 2월에는 물이 흙탕물이긴 했지만 물 색깔이었다면 지난해 10월에 갔을 때는 녹조로 녹색이었고, 올해 1월 말에는 까만색이었다. 물에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이동화 난민들의 영양 상태도 매우 나쁘다. 세계식량기구는 한 달에 두 차례 콩기름과 렌틸콩, 쌀을 배급한다. 난민들은 이것만으로 견디고 있다. 다들 채소와 고기가 너무 먹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로힝야 박해에 대해 잘 모른다.

김기남 미얀마에 거주하는 로힝야에 대한 차별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벌어지지만, 2012년부터 심해졌다. 그해 (무슬림인) 로힝야 청년 3명이 불교도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교도들이 보복 공격을 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이를 방관했다. 이후 로힝야 억압이 사회구조적으로 고착화됐다. 이동의 자유가 제한돼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행정관에게 신고하고, 돈을 내야 한다. 아파서 병원 갈 때도 돈 내고 허가를 받아야 하고 결혼도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이도 2명 이상 낳을 수 없다. 종교 행사도 통제당해 모스크에 가서 기도할 수 없다. 학교에서도 차별받고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다. 2015년에는 투표권까지 박탈됐다.

2020년 로힝야 학살 온라인 뮤지엄 계획 로힝야 사태의 가장 참혹한 비극인 툴라톨리 학살에 대한 기초조사를 하고 있다.

김기남 학살이 벌어졌는데 아직 몇 명이 죽었는지 조사되지 않았다. 진상이 규명돼야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고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여건이 만들어진다. 미얀마 정부는 학살을 부인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치적 해결이 불가능하고 전범재판이 열릴 수도 없다. 시간이 흐르면 증거는 사라지고 기억은 왜곡된다. 나중에 로힝야들이 자신들의 인권침해를 호소하려면 증거 수집과 기록이 필요하다.

이동화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지금 기록돼야 한다. 한국전쟁 양민 학살을 40~50년 지나서 밝히려고 하니 제대로 규명되는 게 없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아직까지 미해결이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도 너무 시간이 흐르다보니 증언할 피해자가 숨지는 등 문제가 많다.

툴라톨리 학살 외에 여러 학살이 있을 텐데.

김기남 지난해 일어난 대량 학살은 다섯 개 마을에서 벌어졌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툴라톨리 마을 생존자 기초조사를 했다. 올해는 인딘 등 4개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 생존자의 증언을 채록하고 실태조사를 할 예정이다. 2019년에는 학살이 일어난 전체 350개 마을에서 최소 1~2명이라도 생존자를 인터뷰해 학살 전체의 그림을 그리려 한다. 2020년에는 ‘온라인 뮤지엄(기록보관소)’에 보존할 계획이다.

그 밖의 사업은?

공선주 기록만이 아니라 공동체 치유 작업도 함께 하고 있다. 2013년 무슬림-불교도 간 분쟁이 있었던 미얀마 메이크틸라 지역에서는 연극으로 평화를 말하는 ‘따따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올해는 메이크틸라에 평화도서관을 만들 생각이다.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는 여성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난민의 대부분이 여성과 아동이다. 로힝야 무슬림 여성은 남편의 허가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여성 대부분은 텐트 안에 숨어 있다. 이들은 학살과 탈출의 과정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혼자 외롭게 안고 있다. 2012년 이후 먼저 난민촌으로 탈출해 온 ‘선 난민 여성’과 지난해 8월쯤 탈출한 ‘후 난민 여성’들이 동료 그룹을 만들고 서로 지지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 공동체 회복을 돕고자 한다.

음악으로 트라우마 치유·공동체 회복

황정은 음악공동체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음악으로 대화를 하면 즐거움, 안전함 등을 느낄 수 있다. 지난 2월 쿠투팔롱 난민캠프에서 한 아이를 따라가 아이의 가족을 만났다. 아이의 삼촌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아이의 엄마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뭐라도 하고 싶어서 플루트를 꺼내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뒤 아이에게 악기를 내줬다. 아이가 악기를 탐색하고, 그 과정을 온 가족이 기쁘게 바라보면서 훌쩍 1시간이 지났다. 그 순간 아이 가족과 우리가 무언의 대화를 하게 됐다. 이런 시간을 통해 (난민들과) 관계를 만들어나갈 예정이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아디는 현재 350여 개인 회원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아디 후원으로 ‘로힝야 학살 생존자 지원사업’ 등에 함께할 수 있다. 후원계좌 신한은행 100-031-396381(예금주 아디), 자세한 내용은 www.adians.net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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