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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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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있어요?” 로힝야의 절규

아시아인권단체 아디, 툴라톨리 학살 생존자 1599명 첫 실태조사…

조사대상 78% 가족 절반 이상 숨져
등록 2018-03-13 09:09 수정 2020-05-02 19:28
2017년 8월 미얀마 툴라톨리 학살이 있은 뒤 로힝야 사람들은 방글라데시로 탈출을 시도했다. 전날 몰래 배를 타고 방글라데시로 넘어온 사람들이 2017년 10월 13일 쿠투팔롱 난민촌으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탔다.

2017년 8월 미얀마 툴라톨리 학살이 있은 뒤 로힝야 사람들은 방글라데시로 탈출을 시도했다. 전날 몰래 배를 타고 방글라데시로 넘어온 사람들이 2017년 10월 13일 쿠투팔롱 난민촌으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탔다.

2017년 8월30일, 무함마드 파룩(40)의 세상은 무너졌다. 며칠 전부터 들이닥칠 것이라던 군인들이 잠잠해 긴장을 늦춘 날이었다. 아침 8시, 200여 명의 군인이 마을로 진격했다. 파룩은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강변으로 내달렸다.

전날 마을행정관은 ‘유사시에 강변에 모여 있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많은 아이들과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곧 총을 쏘며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파룩은 딸들과 아내를 두고 헤엄쳐 건너편으로 도망갔다. ‘남자만 죽이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딸의 총살 장면 눈앞에서 지켜본 파룩
한국의 시민단체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는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학살 생존자들에게 피해에 대한 기초조사와 면접조사를 했다. 이야기하며 눈물 흘리는 로힝야 할아버지.

한국의 시민단체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는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학살 생존자들에게 피해에 대한 기초조사와 면접조사를 했다. 이야기하며 눈물 흘리는 로힝야 할아버지.

파룩의 예측은 빗나갔다. 강기슭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을 에워싸던 군인 하나가 전화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살육이 시작됐다. 군인들은 무릎 꿇고 머리 숙인 남성들을 하나씩 쏴 죽였다. 그리고 잠시 뒤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파룩은 강 건너에서 큰딸 누르 하리마(16)가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총에 맞기 직전 딸이 울며 외쳤다. “아빠, 어디 있어요? 아빠!” 지난해 8월25일 시작된 로힝야 사태의 최대 비극 툴라톨리 학살의 시작이었다.

미얀마 군대는 라카인주 북부에 살던 로힝야족을 총칼로 베고 강간하고 불에 태우는 등 잔혹한 방식으로 학살했다. 피해 마을은 350여 개에 이른다. 불교도인 버마족을 비롯해 150여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다민족·다종교 국가인 미얀마는 유독 무슬림 로힝야족을 ‘벵갈리’라 하며 박해했다.

로힝야족은 자신들이 8세기 무렵부터 미얀마 서쪽 해안 라카인주에 살아온 토착민족이라고 주장하지만, 미얀마 정부는 이들을 1824년 미얀마-영국 전쟁 이후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무슬림으로 본다. 1962년 소수민족 토착화를 추진한 네윈 군사정부가 박해를 시작했고, 1982년 시민권 법을 개정하며 시민권을 박탈했다. 이 길고 오랜 탄압과 차별의 역사 속에서 툴라톨리 학살이 벌어졌다. 그동안 많은 국제인권단체와 언론이 툴라톨리 학살에 관심을 가졌지만, 학살 규모에 대한 정확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시아 분쟁 지역의 피해자와 활동가를 지원하는 한국의 시민단체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아디·ADI)은 8월25일 이후 툴라톨리 마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의 정확한 사망자 수와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사건 발생 뒤 다섯 번에 걸쳐 생존자들을 면접조사했다. 지난해 12월부터 6주 동안 방글라데시 난민캠프로 피해 온 툴라톨리 마을 생존자 185가족을 만나 학살 관련 기초조사를 했다. 거기다 가족 구성원 전원이 사망한 7가족까지 합쳐 모두 192가족(전체 구성원 1599명)이다.

빈집으로 여성 끌고 가 강간하고 방화

조사 결과 충격적인 학살 실태가 드러났다. 아디가 조사한 192가족의 구성원은 모두 1599명이었지만, 학살로 970명(사망률 60.7%)이 살해됐다. 툴라톨리 마을 인구가 4천 명임을 고려하면, 규모는 훨씬 커질 것으로 보인다. 가족을 ‘단위’로 삼아 계산하면 결과는 더 참혹하다. ‘(방글라데시로 넘어오기 전) 미얀마에서 한집에 같이 살던 혈연관계인’을 가족으로 파악하면, 가족 구성원 절반 이상이 숨진 가구가 전체의 78%(133가구), 2명 이상이 죽음을 당한 가구는 88%(169가구), 전체가 몰살당한 가구는 7가구였다. 툴라톨리 학살은 미얀마 군부가 주도한 군사작전 중 최악의 범죄로 기록될 것이다.

파룩은 강 건너에서 지옥 같던 학살 현장을 맨주먹만 움켜쥔 채 지켜봐야 했다. 아침 8시에 시작된 살육은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이날 모든 가족을 잃었다.

큰딸이 총에 맞아 죽은 뒤 군인들이 아내와 아이들 넷을 빈집으로 끌고 갔다. 10여 분 뒤 가족들이 끌려 들어간 집에서 연기가 솟았다. 군인들은 집 밖으로 나왔지만, 부인 라이라 베검, 11살 딸 사이프 울라, 9살 토이다 베검, 7살 옴말 하프사, 3살 자히드 올라는 나오지 못했다.

군인들은 학살 과정에서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을 죽였다. 군인들은 남성들을 총으로 다 쏘아 죽인 뒤, 여성과 아이들을 강가 모래사장 한켠의 넓은 웅덩이에 앉혔다. 둘째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쿠쉬 베검(25)도 아이와 함께 무리에 있었다. “300~400명쯤 됐어요. 연령대도 다양했어요. 어린아이들도 상당수 있었어요.” 3~4명의 군인들이 여성들을 무작위로 불렀다. 곧 쿠쉬의 차례가 왔다. 다섯 명의 여성들이 아이와 함께 이동했다. 그는 불타버린 집을 지나 이웃집으로 끌려갔다.

방 안에는 여섯 명의 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군인이 쿠쉬의 아들 무함마드 유로칸을 낚아채 바닥에 내리찍어 죽였다. 유로칸은 생후 28일이었다. 이어 쿠쉬의 옷을 찢고 강간했다. 강간이 끝난 뒤 쿠쉬의 머리를 둔기로 때리고 목을 칼로 두 번 베었다. 쿠쉬는 의식을 잃었지만 죽진 않았다. 가까스로 의식을 찾았을 때 방 안은 불타고 있었다. 같은 방에 있었던 다른 여성들은 모두 숨져 있었다. 그는 기어서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계와 휴대전화를 갖고 당시 상황을 함께 목격했던 생존자 하심(57)은 “끌려간 여성들이 들어간 집에는 항상 불길이 일어났다. 오전 10시부터 15~20분 간격으로 계속됐다. 군인들은 밖으로 나왔지만 아이들과 여자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학살을 주도했던 군인들이 킨차웅 타운십에 군영을 둔 부대라며 군복에 그려진 빨간 꽃문양 부대마크를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또 라카인족, 쿠이족, 므롱족 출신의 소수민족으로 보이는 민간인 50여 명이 군인들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고 증언했다. 미얀마 정부는 이 학살 등 350여 마을에서 발생한 학살에 대해 “정당한 대테러작전”이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8월25일,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 라카인주 북부의 경찰 초소와 군영 30곳을 급습한 것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계속 들리는 총소리… 트라우마 겪는 생존자

가족들의 죽음을 목격한 파룩은 지난해 8월30일 함께 숨어 있던 이들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는 로힝야 사태 이후 방글라데시로 밀려든 65만 명의 로힝야 난민 중 하나가 됐다. 그로부터 다시 6개월이 흘렀다.

수십만 명의 난민으로 차고 넘치는 난민캠프 생활상은 참담하다. 생활하수로 캠프엔 악취가 진동한다. 4월부터는 방글라데시에 우기가 시작돼 산사태는 물론, 설사·콜레라 등 전염병이 번질 것으로 예상된다. 난민캠프에서는 생존자들의 경제활동이 금지돼 있어, 난민들은 배급품인 쌀, 식용유, 렌틸콩에 의존해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생존자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기가 없는 캠프에서 밤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을 청하는 것뿐이다. 생존자들은 ‘그럴 때마다 희생된 자식, 부모, 형제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누우면 총소리가 들린다’는 이도 있었다. 한 생존자는 아디 조사단에게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잘 수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로힝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방글라데시 정부는 지난해 11월23일 미얀마 정부와 로힝야 난민 송환에 합의했다. 2018년 1월23일부터 방글라데시 정부가 로힝야 난민들을 일주일에 1500명씩 송환한다는 내용이다. 합의에 따르면 송환 대상, 즉 생존자들은 미얀마에 거주했다는 사실과 2016년 10월 이후 출국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 경우 미얀마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국민임을 증명한다는 ‘국민확인카드’를 지급한다. 이들은 임시 캠프에 머물다가 재건축된 집에 돌아가게 된다.

이런 송환 조건에 대부분의 로힝야는 부정적이다. 학살을 피해 도망친 이들에 대한 안전 보장, 이동의 자유 제한 등 각종 차별 조처 철폐 등의 내용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올 2월 2500명이 추가로 방글라데시 국경을 넘는 등 로힝야들의 국외 탈출은 이어지고 있다.

아디의 면접조사에 응한 생존자들은 툴라톨리 학살의 진실이 전세계에 전해지길 원했다. 파룩은 “내 경험을, 내 이야기를 미얀마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쿠쉬도 “내 의료 기록을 증거로 제출할 것이다. 진실은 가릴 수 없다”고 했다. 다섯 아이와 아내를 잃은 파룩의 삶은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28일 된 젖먹이를 눈앞에서 빼앗기고 존재를 모욕당한 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쿠쉬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누가 책임지고 사과해야 하는가.

증거가 사라지기 전 국제사회 개입해야

미얀마 정부는 학살과 관련된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도 마찬가지다. 인권단체들은 미얀마 정부가 학살 관련 증거를 제거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휴먼라이츠워치가 위성사진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미얀마 정부는 잿더미가 된 로힝야족 거주지를 정리하고 있다. 학살의 증거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고 퇴색된다.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시급한 개입이 필요하다.

김기남 아디 인권담당 변호사

사진 조진섭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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