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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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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 난민을 만나다

미얀마 ‘인종 청소’ 이후 55만 명 방글라데시로, 가족 잃은 이들의 절규 이어지는 난민 캠프 르포
등록 2017-10-24 08:42 수정 2020-05-02 19:28
10월13일 방글라데시로 도망 나온 로힝야 가족이 서류 작성과 간단한 의료 검사를 받기 위해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런 로힝야의 80%가 여성과 어린이다.

10월13일 방글라데시로 도망 나온 로힝야 가족이 서류 작성과 간단한 의료 검사를 받기 위해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런 로힝야의 80%가 여성과 어린이다.

10월14일. 아직 아침 6시인데 햇볕이 사정없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체감 온도는 벌써 35℃. 저 멀리 오른쪽으로 벵골만을 마주하는 해안가는 파도가 거세지만,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의 국경을 형성하는 나프강이 벵골만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샤포리디프의 주변 파도는 잔잔했다. 섬으로 가는 포구 주변에 벌써 300여 명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대부분 어린아이와 여성이다. 최근 외신 보도를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진 로힝야다.

남편은 보름전 잡혀갔다

간밤에 미얀마 마웅도 해안에서 배를 타고 방글라데시로 건너온 하시나(25)는 피곤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휴대전화로 바쁘게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집에 남은 친정아버지예요. 잘 도착했다고….” 그녀는 이날 새벽 4시 섬에 도착했다. 미얀마 부티동이 고향인 하시나는 군인들이 마을을 한 달가량 봉쇄하자 식량이 바닥나 피란길에 올랐다.

그 옆에 앉은 미나라 베검(25)은 하시나와 동서지간이다. 그의 남편은 보름 전 미얀마 경찰에게 연행된 뒤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보름 전 경찰이 남편을 데려간 뒤 돌아오지 않았어요. 생사도 몰라요.” 남편과 같이 끌려간 마을 남성 15명도 같은 신세다. 갓 1개월이 지난 미나라의 딸 수야마가 방금 먹은 모유를 토해냈다. 수야마는 스카프 하나만을 걸치고 따가운 햇살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2017년 8월25일 로힝야 무장세력으로 추정되는 집단이 경찰초소 30여 곳을 습격하자, 미얀마 군부는 그들을 테러집단으로 규정해 토벌 작전을 펼치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이를 빌미로 로힝야 민간인들을 무차별 사격, 구타, 성폭행, 방화해 방글라데시로 몰아내고 있다. 그 여파로 지난 석 달 동안 로힝야 55만 명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밀려들었다.

로힝야는 남아시아 출신 사람들로 지금의 방글라데시 치타공과 콕스바자르, 미얀마 라카인주 등 벵골만 인근에서 불교도와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며 공존해온 민족이다. 14세기 무술제국의 영향으로 무슬림화된 로힝야는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인근 지역에 자유롭게 이동하며 살았다. 로힝야는 전세계에 200만 명이 존재하고, 이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미얀마에 130만 명이 살고 있었다.

불교도인 버마족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미얀마는 로힝야를 ‘벵갈리’라고 부르며 불법체류자로 취급해왔다. 영국 식민지 당시 농업노동자로 이주한 사람들이 방글라데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박해와 ‘인종청소’의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보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이 매장된 라카인주에서 로힝야를 보상 없이 쫓아내고, 군부가 대국민적 신뢰를 회복해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위해 이 문제를 확대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아시아 분쟁 지역의 피해자와 활동가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아시아 인권평화 디딤돌’(아디·ADI)는 이번 사태를 한국 사회에 소개하기 위해, 10월10∼17일 방글라데시에 조사단을 파견해 로힝야 난민캠프를 돌아보고 생존 피해자를 인터뷰하는 등 인권 실태를 파악했다. 아디는 지난 2월에도 조사단 활동을 통해 보고서를 제출하고 피해자를 대리해 유엔에 진정을 제기한 바 있다.

박해의 이유

로힝야 난민 사태의 가장 큰 비극은 툴라톨리 마을의 집단학살 사건이다. 이 마을은 두알톨리라 불리는 강이 북쪽-서쪽-남쪽 방향으로 감싸듯이 흐르는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8월23일 마을로 들이닥친 군대는 마을 사람들을 강가 모래사장에 모아놓고 집집마다 수색을 시작했다. 명목은 숨어 있는 로힝야 무장세력을 찾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주민들의 금·장신구·쌀·가축 등을 약탈해갔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8월30일 아침 8시. 군대가 다시 한번 마을에 들이닥쳤다. 미얀마군은 마을 북쪽으로 진입해 집에 불을 지르고 총을 난사했다. 군인들은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을 집에 가둔 채 불을 질렀다. 자누아라 베검(23)은 “엄마, 올케 3명, 조카가 그렇게 죽었다”고 말했다. 야쿱 나비(25)도 노환으로 걸을 수 없어 집에 남아 있던 고모를 피신시키기 위해 집에 되돌아왔다가, 군인들이 고모를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극이 벌어졌다. 이날 오전 9시. 마을 북쪽과 강변에 사는 주민 2천여 명이 두알톨리 강변에 모였다. 주민들이 피란처를 찾아 이곳에 모인 것인지, 집은 태우지만 안전을 보장한다고 약속한 군대를 믿고 모인 것인지 생존자들의 증언은 엇갈린다.

라미드 후세인(19)도 그 무리에 있었다. 모래강변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이 느닷없이 총을 난사했다. 이 학살로 라미드의 엄마 세몬 카툰(40), 여동생 카레다(12), 하시나 베검(10), 파테마(7), 수마야(1), 남동생 모하마드 수판(3)이 숨졌다. 군인들은 총에 맞은 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을 긴 칼로 죽였고, 어린아이를 강에 버려 익사시키기도 했다. 자누아라의 친정 식구들 16명은 전부 살해됐다. 누르 파테마(27)도 남편과 아이들이 살해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학살이 끝난 뒤 군인들은 헬리콥터를 통해 석유를 실어와 쌓아놓은 주검 위에 뿌려 태웠다.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과 아동이었다. 생존자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찍은 휴대전화 영상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리에 섞여 있던 누르 카이다(12)의 엄마, 오빠, 언니도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누르는 강을 헤엄쳐 건너와 간신히 살아남았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날 모래강변에서 숨진 이는 최소 500~1천 명으로 추정된다. 방글라데시 지역 언론에 따르면, 군인은 여성들을 한 줄로 세운 뒤 도망치라 명령하고 그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생존자 30여 명 가운데 다섯은 군인들이 데려가 성폭행한 뒤 장신구를 빼앗아 죽인 다음 불태웠다는 증언도 있다.

산 채로 불타고, 총에 맞아 죽고

유엔 집계에 따르면, 본격적인 폭력 사태가 시작된 8월25일부터 방글라데시로 유입된 로힝야 난민은 무려 55만 명에 이른다. 이번 사태 이전에 피신한 30만 명을 합하면 총 85만 명의 로힝야가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다. 로힝야 난민은 9월 중순부터 감소하다 최근 다시 늘어나고 있다. 미얀마 당국의 군사작전이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다. 조사단이 방글라데시에 머무르던 10월16일에만 2만5천 명이 국경을 넘었다.

로힝야 난민의 탈출 경로는 육로와 해상 등 여러 갈래지만, 안전한 길은 없다. 특히 나프강을 건너 도달하는 해상 경로에선 거센 파도에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역 언론에 따르면, 8월25일부터 45일간 발생한 25건의 전복 사고로 151명이 사망했다. 10월16일에도 11명이 나프강에서 익사했고 30명이 실종됐다. 전복된 배는 새벽 4시에 난민 65명을 태우고 있었다.

국경을 건넌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군인의 통제에 따라 등록과 정착 절차를 밟는다. 조사단이 둘러본 샤포리디프는 로힝야 난민이 유입되는 최남단 경로다. 군인들이 밀려든 난민들의 간단한 인적 사항을 적고 종이카드를 건넨다. 이후 1km를 걸어 집합소에 도착한 난민은 본격적인 정착 절차를 밟는다. 방글라데시 군, 적신월사, 유엔난민기구,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연합 등에서 파견된 직원과 봉사자가 이들을 돕고 있다.

집합소에서 난민들은 먼저 건강 상태를 점검받는다. 현지 의료진인 아샤드는 “여성은 탈수, 아동은 영양실조·설사·감기 등이 많다”고 말했다. 마웅도 출신 모하메드 아육(20)은 오른쪽 팔뚝에 생긴 깊고 넓은 상처가 덧나 긴급 처치를 받았다. 의사는 “칼에 베인 상처”라고 말했다. 난민들의 몸엔 총상, 방어 자세에서 날카로운 물건과 닿아 입은 상처, 넘어져 다친 상처 등이 남아 있다.

이어 난민들은 천막·쌀·스낵·물통·식수·옷 등 식량과 생필품을 지급받는다. 군인들이 물품을 지급받은 이들에게 이름과 출신 마을 등을 기재하고 손도장을 찍게 했다. 샤포리디프에서 10월13일에만 오전 11시를 기준으로 800여 명이 등록했다.

물자를 지급받은 난민들은 화물트럭에 올라 앞으로 생활할 난민캠프로 이동한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들을 위해 팔롱칼리, 테용칼리, 발루칼리, 쿠투팔롱 캠프 등을 지정한 상태다. 유엔은 쿠투팔롱 캠프에 17만8천 명, 발루칼리 캠프에 4만5천 명, 팔롱칼리 캠프에 7만1천 명이 정착했다고 밝혔다. 난민캠프는 점차 확장되고 있다.

“죽이진 말고 절름발이 만들어라”

캠프에 도착한 난민들은 이제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유엔이 지급하는 구호품은 보름에 한 번씩 배급되는 25kg 쌀뿐이다. 발루칼리 캠프에서 만난 지아 부라히만(32)은 아이는 하루 세끼 식사를 하고 어른은 점심을 거른다고 했다. 외부의 도움이 충분하지 않고 일할 기회도 거의 없다. 이들은 야산에서 땔감을 모아 팔거나 일용직 인부로 일하며 일당을 벌고 있었다.

식수와 생활용수는 캠프 곳곳에 마련된 수도로 해결한다. 지하수는 충분하지만 비소가 섞여 있고 약간 냄새가 난다. 아이들은 수돗가에서 목욕하며 더위를 식혔지만, 별도의 목욕시설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은 날이 저문 뒤 집 밖에서 옷 입은 채 씻는다. 하수 처리가 전혀 안 돼, 수인성 전염병이 우려된다.

다친 난민들은 캠프 근처 진료소를 거쳐 인근 큰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중 하나가 콕스바자르 시립병원이다. 10월16일 조사단과 만난 병원장 푸촤누는 “(로힝야 사태가 발생한 뒤) 10월16일까지 총 700명의 난민이 치료받았다. 8월25일 직후에는 대부분 심한 총상 환자였다. 그중 64명은 치타공의 3차 병원으로 후송됐다”고 말했다. 최근엔 설사, 고열, 피부병, 두통, 어지럼증 등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고 있다.

조사단이 방문할 무렵 시립병원에선 86명이 입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라티동 출신 아만 후세인(45)은 8월28일 정오께 마을을 봉쇄한 미얀마 군경이 총을 난사하고 집들에 불을 지르자 급히 피신하다 오른쪽 다리에 총알을 맞았다. 근처 덤불에 숨어 있던 그를 동생들이 발견해 둘러메고 국경을 넘었다. 25일간 입원 중인 몬수르 알리(35) 역시 8월28일 군인들이 마을의 집들에 불을 지르자 가족과 함께 도망쳤다. 그 와중에 여동생이 총에 맞아 숨졌다. 미얀마군 대대장이 “저놈, 절름발이로 만들어. 죽이지는 말고”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군인이 소총으로 그의 다리를 내리쳤다. 몬수르는 “이후 일은 기억할 수 없다. 잡혀온 5명은 모두 숨졌다”고 말했다.

입원환자 중에는 어린이도 적지 않았다. 유독 밝은 표정의 누르 파테마(6)도 그중 하나였다. 8월25일 새벽 1시, 군대가 그가 살던 마을을 봉쇄한 뒤 총을 난사했다. 누르의 집에 휴대용 발사대로 쏜 수류탄이 날아와 불이 났다. 2층 난간에 있던 누르는 아빠를 발견한 뒤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다. 그 일로 누르는 다리 양쪽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왼쪽 허벅지와 무릎이 골절됐다.

늘어나는 난민

지난 석 달 동안 미얀마군의 학살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흘러든 난민은 무려 55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고난 앞에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분명한 건, 뭐든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너무 늦기 전에.

테크나프(방글라데시)= 김기남 아디 상근활동가(변호사)
사진 조진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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