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골리앗’ 이스라엘의 내부고발자

국내 이슬람 전문가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묻고 <6일 전쟁, 50년의 점령> 저자 아론 브레크먼 영국 런던 킹스칼리지 교수가 답하다
등록 2016-07-15 05:58 수정 2020-05-02 19:28
니케북스 제공

니케북스 제공

9살이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6일 만에 가자지구,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지구, 동예루살렘까지 무력으로 점령한 직후 아론 브레크먼은 부모님과 예루살렘을 여행했다. 점령 초기여서 이전의 ‘활기’를 잃지 않은 당시 예루살렘은 색깔이 선명한 곳이었다. 아랍인들은 체크무늬 두건 케피예를 쓰고 생기 있는 표정으로 시장을 채웠다. 아랍어가 박힌 신문지에 싸인 아랍빵 카크, 아랍과자 쿠나파, 성전산(솔로몬왕이 기원전 10세기 유대 성전을 세운 자리) 위에서 무함마드가 승천한 바위사원이 황금 지붕을 번쩍였다.
10여 년 뒤, 20살 브레크먼은 가자 거리를 순찰하는 이스라엘 군장교가 됐다. ‘점령지’가 된 곳은 색깔을 잃었다. “오물이 흐르는 도랑, 먼지투성이 비포장도로, 부패와 악취, 쓰레기 더미를 달리는 쥐떼….” 브레크먼은 “무엇보다도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지역 주민들의 극심한 적대감”이라고 썼다.
다시 10년 뒤인 1987년. 예비역 장교로 네팔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던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운동 ‘인티파다’를 보도한 신문에서 총 개머리판으로 팔레스타인 시위자의 머리를 후려치는 이스라엘 병사의 사진을 봤다. 이후 그는 이스라엘 신문 편집장에게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유대인이 그와 유사한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논지의 글을 써서 보냈다. 이스라엘에 돌아가서는 “점령지 복무를 위한 소집 명령이 오면 거부하겠다”는 ‘복무 거부 선언’을 이스라엘인 가운데 최초로 했다. 이스라엘에 계속 있다가는 감옥에 갈 수도 있게 된 브레크먼은 결국 영국으로 ‘일종의 망명’을 했다.
브레크먼은 이후 영국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전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같은 대학 전쟁연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꾸준히 이스라엘과 아랍의 관계·전쟁 역사 등을 세밀히 살피고 사료를 챙기며 연구하고 여러 권의 대중서를 냈다.

아론 브레크먼의 책 은 지난 3월 국내에 처음 번역됐다. 이슬람 전문가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브레크먼의 책에 대해 “이스라엘 군장교 출신 역사가가 직접 기록한 불편한 진실과 증언들, 자칫 매국노로 취급되기 쉬운 상황에서 참회록 같은 고백을 했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책에는 이스라엘 정보요원들이 비밀리에 녹취한 미국 대통령과 각국 지도자 간의 전화 통화 내용을 비롯해 그동안 출처를 밝히지 않고 암암리에 얘기돼온 증거들이 ‘레퍼런스’를 충분히 달고 실려 있다. 이희수 교수는 “지식인으로서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라며 아론 브레크먼에게 전자우편으로 인터뷰를 청했고, 런던의 브레크먼이 답을 보내왔다. 그 문답을 에 게재한다.왜 이스라엘을 떠나 영국에서 살게 되었나.

팔레스타인인들의 1차 봉기, 곧 인티파다가 시작됐을 때 나는 극동 지역을 여행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봉기에 대처하는 이스라엘군의 야만성을 기사와 사진으로 접하고 이스라엘 유력 일간지 에 편지를 썼다. 야만성에 항의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폭력 행위가 그치기 전에는 이스라엘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쓴 편지였다.

군 야만성 고발하고 복무 거부한 예비역 장교

당시 나는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이스라엘 국민이었다. 그러나 편지가 신문에 실리면서 많은 지지와 그에 못지않은 비판을 받았다. 1년 뒤 고국 이스라엘에 돌아갔다가, 다시 와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점령지 복무 거부’ 선언을 최초로 하게 됐다. ‘불복종’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불복종’이란 매우 이례적인 행위였고, 여러 논란 속에 이스라엘에 계속 살 수 없었다.

당신의 개인적 경험과 중동전쟁사 연구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나는 이스라엘군 포병장교였다. 1982년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다. 6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뒤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에서 속기사로 일했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군대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관심 갖게 됐다. ‘복무 거부’ 인터뷰의 여파로 이스라엘을 떠나게 되었을 때, 군 경험과 크네세트에서 배운 정치 관련 지식을 결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에서 군과 민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이스라엘에서 군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이스라엘이 거의 항상 ‘전쟁 중’이어서 더욱 그렇다. 정치인들이 군사행동을 허가하는 순간, 군은 매우 신속하게 움직이며 통제가 어려워진다. 1967년 이스라엘 국방장관 모셰 다얀이 군에 가자지구를 점령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군대는 가자지구를 점령했다. (군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결국 난민이 여럿 살고 있는 만큼 이스라엘이 상황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예측한 다얀이 옳았고 이 때문에 2005년 군을 철수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여러 문제에 봉착했지만, 당시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면서 군은 군 지휘부로부터도 통제받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잔인한 점령군으로
이스라엘 낙하산부대원들이 1967년 6월 6일간의 전쟁을 통해 점령한 유대교 성지 ‘통곡의 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사진은 유대 이스라엘 역사의 위대한 순간을 상징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주받은 승리로 판가름 났다. 니케북스 제공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낙하산부대원들이 1967년 6월 6일간의 전쟁을 통해 점령한 유대교 성지 ‘통곡의 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사진은 유대 이스라엘 역사의 위대한 순간을 상징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주받은 승리로 판가름 났다. 니케북스 제공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책에서 1967년 6월에 벌어진 6일간의 전쟁을 주요하게 다룬다. 중동 분쟁 역사에서 1967년 6월 전쟁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1967년 6월 전쟁은 중동을 여러모로 바꿔놓았다. 6월 전쟁 이후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강렬한 주목을 받게 됐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등은 이스라엘에 영토를 뺏겼다.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영토는 대폭 늘었다(상단 지도 참조). 이집트 땅이던 시나이사막과 가자지구, 요르단 땅이던 서안지구와 예루살렘, 시리아 땅이던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이 점령하면서 ‘점령지’가 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랍의 패배에 깊이 좌절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기대감이 꺾였다. 결국 6월 전쟁 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이스라엘에 항거하는 ‘무장투쟁’을 천명하고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 전쟁 뒤 이스라엘에 대한 세계의 시선은 완전히 변했다. 1967년까지 이스라엘은 아랍의 공격에 시달리는 피해자였다. 그러나 이후 오슬로 평화협정, 마드리드 평화협정 등에도 불구하고 점령지 반환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면서 이스라엘은 ‘점령자’가 됐다. 더 이상 ‘다윗’ 이스라엘은 없고 ‘골리앗’ 이스라엘만 남아 있다.

“두 나라의 땅과 사람을 분리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전역에 수백 곳의 검문소를 설치해 팔레스타인 주민의 자유를 구속해왔다. 니케북스 제공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전역에 수백 곳의 검문소를 설치해 팔레스타인 주민의 자유를 구속해왔다. 니케북스 제공

역사학자 아비 쉴레임은 영국 일간지 에서 이 책을 평하며 “이스라엘의 승리는 승자에게도 저주였다. 그로 말미암아 본래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작은 공동체였던 이스라엘이 식민제국으로 변모했다”고 썼다. 이 책의 원제는 ‘저주받은 승리’(Cursed Victory)다. 쉴레임의 말처럼 1967년 승리로 이스라엘이 ‘나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의미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저주는 어떤 뜻을 갖고 있나.

군사적 차원에서 보면 1967년 전쟁에서의 승리는 눈부셨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이 ‘이 승리가 이스라엘 사회를 내부에서부터 망가뜨릴 것’이라 경고했고, 그들의 경고는 옳았다. 점령이 지속될수록, 점점 거세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을 억제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무력과 강제력이 필요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 자신이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비극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어느 점령군 못지않은 잔인한 점령군임을 입증해버렸다. 총 개머리판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때려서 요르단으로 이주시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허가 없이 토마토·가지를 심을 수 없게 했고, 집에 흰 도료도 바를 수 없게 했다. 팔레스타인 국기 색깔이 든 셔츠를 입을 수도 없게 했다. 비교적 최근인 2007년에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서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공식을 개발해 식품의 상한선·하한선을 정하고, 식량 보급을 제한했다.

1967년까지 이스라엘은 세계의 연민의 대상이었지만, 지금 그 동정과 연민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1967년 6월 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저주받은 승리’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개인과 단체는 얼마나 있나.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지지하고 인권 보호를 위해 활약하는 개인과 단체는 주로 이스라엘 좌파를 기반으로 하는데 최근 들어 이들 세력은 급격하게 약해졌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서는 두 국가의 사람과 땅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장벽으로라도 그들을 갈라놓아야 한다. 프랑스와 독일을 보면, 그들은 오랫동안 싸웠고, 전쟁이 끝난 뒤 경계선을 세우고 검문소·국경경비대를 설치한 철천지원수였다. 2016년 현재,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를 오가는 데 출입국 신고도 할 필요가 없는 좋은 이웃이 됐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도 초기에는 철저한 분리와 장벽이 필요하다. 그렇게 지배-피지배 관계를 넘어 분리되면 50년, 100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분리와 장벽 또한 제거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처럼.

거대한 비폭력 봉기, 그리고 국제적 압력팔레스타인 평화협정을 추진하는 일은 언제나 지난했다. 이에 관해 아랍 쪽에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나.

지금 이 순간에도 막후에서 많은 외교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 같은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를 중재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점령은 종식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점령이 종식되려면 두 요소가 결합해야 한다.

하나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점령에 항거해 거대한 비폭력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 스스로 일을 주도해야 한다. 자신들의 미래 국가를 위해 간디식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미래 국가는 누가 거저 제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둘째, 이스라엘에 거대한 국제적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 그것 말고는 이스라엘인이 점령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방법이 없다. 이스라엘이 특별히 나빠서라기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얻는 것 없는 상태에서 서안의 땅과 자원이라는 ‘젖과 꿀’을 명분에 기대어 순순히 포기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내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서안을 포기하도록 하려면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의 ‘거대한’ 봉기와 역시 그에 못지않은 ‘거대한’ 국제적 압력이 결합돼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더불어 세계적으로 점령지에서 생산된 이스라엘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불매운동이 이뤄지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할지에 대해선 조금 회의적이다.

정리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 캠페인 기간 중 정기구독 신청하신 분들을 위해 한겨레21 기자들의 1:1 자소서 첨삭 외 다양한 혜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