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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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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증인, 눈을 감다

한국 독재정권을 견딜 수 없어했던 독일 언론인의 마지막 가는 길
등록 2016-02-17 20:21 수정 2020-05-03 04:28
‘푸른 눈의 목격자’가 눈을 감았다.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을 세계에 처음 알렸던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가 지난 1월2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
독일 제1공영방송 <ard tv> 소속 카메라 기자였던 그는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광주민중항쟁 현장에 들어가 시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모습을 카메라에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 언론이 거짓을 말하는 순간, 그의 눈과 카메라에 담긴 영상이 ‘광주의 진실’을 오롯이 증언했다. 1980년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 힌츠페터가 제작한 45분짜리 다큐멘터리 은 1980년대 대학가 등에서 비밀리에 상영되면서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댕겼다. 힌츠페터는 2004년 심장마비로 쓰러졌을 때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겨왔다.
은 지난 2월5일 독일 북부 라체부르크시에서 치러진 고인의 장례식 모습을 국내 언론 가운데 유일하게 전한다. 베를린 통신원으로 좋은 글을 보내왔던 한주연 자유기고가는 이 장례식을 취재한 뒤, 다음날 고인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78)와 2시간 넘게 인터뷰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참언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제대로 배웅하기 위함이다. _편집자 </ard>
한국에서 온 조문단이 유족에게 전한 광주명예시민증과 감사패 옆에 놓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영정 사진. 생전 한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찍은 이 사진은 고인이 가장 좋아했던 사진이다.

한국에서 온 조문단이 유족에게 전한 광주명예시민증과 감사패 옆에 놓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영정 사진. 생전 한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찍은 이 사진은 고인이 가장 좋아했던 사진이다.

“먼 곳에서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오셔서 큰 힘이 됩니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78)가 장례식을 찾은 조문객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옹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2월5일 오전 11시, 옛 동독과 서독의 경계선에서 멀지 않은 고즈넉한 호반 도시 라체부르크시의 아담한 예배당.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120여 명의 조문객이 모였다. 침묵 속에 구슬픈 바이올린 연주로 이 울려퍼지면서 장례식이 시작됐다.

2월5일 오전 11시 라체부르크시의 작은 예배당에서 힌츠페터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2월5일 오전 11시 라체부르크시의 작은 예배당에서 힌츠페터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특종이 아니라 인권 차원에서”

“1945년 우리 가족은 러시아군을 피해 루트비히루스트에서 라체부르크로 피란을 왔다. 어린 시절 항상 모범생이었던 형은 재즈를 즐겨 들었다. 형은 쿨하면서도 배려심이 많고 겸손했다. 킬대학교에서 2학기 동안 의학을 전공했던 형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북부독일방송 <ndr>에 들어가 카메라맨 교육을 받았다.” 스페인에 살고 있는 힌츠페터의 6살 아래 동생 게르트가 형의 일생을 추억했다.
유르겐 베르트람(75)은 위르겐 힌츠페터가 제1공영방송 <ard tv> 도쿄 특파원 시절에 함께 일했던 동료다. “광주는 정치적 비극이자 민주화의 상징이지만 고인의 인격과도 긴밀히 연결된 이름”이라고 베르트람은 강조했다. “위르겐은 세계에서 유일한 목격자로서 광주민중항쟁의 폭력적인 진압 장면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그가 나에게 충격적인 장면들이 담긴 필름을 보여주면서 ‘이건 프로그램에 꼭 넣어야 한다. 특종이어서가 아니라 인권 차원에서 그렇다’라고 말하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한국에서도 여러 명의 조문단이 참석했다. 광주광역시와 5·18기념재단, 유럽오월민중제준비위원회 등을 대표해 참석했다.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극영화로 제작 중인 영화계 관계자들도 함께했다. 김수아 광주시 인권평화협력관은 “광주는 결코 고인을 잊지 않을 것이다. 고인이 추구했던 민주와 정의, 인권의 가치를 ‘광주 정신’에 담아내겠다”고 밝혔다.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힌츠페터는 신군부와 한국 언론이 거짓말하는 와중에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면서도 진실을 알린 용기 있는 기자”라고 칭송했다. 한국에서 온 조문단은 유족에게 고인의 광주명예시민증과 감사패를 전달했다.
장례식은 평소 고인의 취향대로 명상음악이 잔잔히 깔리며, 조문객들이 고인을 기리는 조사를 낭독하는 순서로 채워졌다. 고인의 조카 악셀 힌츠페터(43)는 “한국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고인이 이렇게 한국에서 크게 인정받는 일을 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매우 감동했다”고 말했다.
장례식 다음날인 2월6일, 라체부르크 호숫가에 자리한 고인의 자택을 찾아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를 만났다. 자택에는 한국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집, 앨범, 상패, 책이 쌓여 있었다. 브람슈테트는 아직 슬픔을 가누기 힘들어했다. 인터뷰하는 중간중간 여러 차례 눈물을 비쳤다. 여동생 로지 브람슈테트(71)도 인터뷰에 함께 자리했다. 자매는 독일 분단 시절 동독과 서독에 떨어져 살면서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었다.


한국 취재 때 얻은 부상으로 오래 치료받아



장례식을 치르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갑자기 많은 일이 닥쳤다. 그래도 여러 사람이 도와줘서 장례식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조문객이 올 줄 몰랐다. 남편도 좋아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여러분이 오신 것 자체가 남편에게 영광이다. 남편에 대한 경의와 예우에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했다.

고인이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이 고통스럽진 않았는지.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그날(1월25일)도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그가 옛날에 촬영한 비디오 영상을 한 편씩 보고 나서 정리했다. 저녁 7시, 뉴스를 보려고 텔레비전을 켠 다음 이어서 볼 비디오 영상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첫 번째 뉴스로 난민 소식이 나오는데 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소파에 누웠다. 계속 심하게 아파해서 구급차를 불렀다. 그 뒤로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졌다. 동맥이 터진 것 같았다. 진통제를 맞고 나선 목소리가 안정됐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구급차로 대학병원에 이송됐다. 난 평생 구급차를 탄 응급 의사 출신이다. 그런데 가족이어서 구급차를 같이 탈 수 없었다.
그날 밤 9시30분께, 남편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1년 10시간 동안 수술했던 인공혈관 주변에 주기적으로 출혈이 있어왔는데, 아마 흉곽 부분 인공혈관에 문제가 생겨 터진 것 같다. 통증이 생기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가 계속 더 큰 고통을 겪지 않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고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그는 몸이 여기저기 아팠다. 1986년 한국에서 당한 부상(서울 광화문에서 야당의 거리시위를 취재하다 사복경찰들에게 심하게 맞아 생긴 부상) 때문에 7시간 동안 목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그 뒤로 목 부분에 물리치료를 받아왔다. 코막힘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 침대에서 못 자고, 밤에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자주 밖에 나갔다.
힌츠페터 부부는 13살 때 같은 반 친구 사이였다. 브람슈테트 부인은 “잘 생기고 예의 바르고 겸손한 그에게 반했다”. 그런데 1년 뒤 남편이 기숙학교로 떠나는 바람에 헤어졌다. 나중에 킬대학교 의대에 함께 재학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다. 남편이 의사에서 언론인으로 진로를 바꾼 탓이다.
학생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힌츠페터는 북부독일방송 <ndr>에서 카메라 기자 조수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다 전업 언론인이 됐다. 그는 아시아 특파원으로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는 등 계속 외국에 머물렀다. 1986년 한국에서 심한 부상을 얻은 탓에 그는 58살이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1995년 은퇴를 한다.
미혼이었던 두 사람은 2002년 우연히 다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브람슈테트 부인이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병원에 힌츠페터가 장 수술 때문에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의사와 환자 사이로 가까워진 것이다.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는데 함께 산책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알게 됐다.” 둘의 사랑은 65살이 되어서야 뒤늦게 꽃피웠다.


한국의 금강산, 뮌헨의 가르미슈산

고인에게 광주, 또는 한국은 어떤 의미였나.
광주는 그에게 가장 큰 테마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그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진정한 사명감을 가진 언론인이었다. 그는 (1980년) 당시 한국 독재정권을 견딜 수 없어했다. 그 일(5·18 광주민중항쟁)을 보도해야만 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남편은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잊어버리고, 당시 급박한 현장을 촬영해 세계에 알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다.
광주는 폐쇄됐고, 그는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야 했다. 그는 방송국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결정해 행동했다(※힌츠페터는 해외공보원의 프레스카드 발급도 받지 않은 채 1980년 5월18~19일 광주로 들어가 학살 현장을 취재했고, 일본 도쿄로 돌아가 영상을 독일 본사로 보낸 다음 다시 광주를 찾아 시민군이 이룬 자치공동체 모습도 함께 찍어 세상에 알렸다).
5·18은 끔찍한 사건이다. (직접 앨범을 가져와 사진을 보여주면서) 여기 광주민중항쟁 피해자 사진을 보면 예외 없이 모두 머리에 총상이 있다. 18~19살 청년들이 훈련된 군인의 사격으로 총살당했다. (그 현장을 직접 보고 카메라에 기록한 일은) 남편에게 충격적이고 끔찍한 일이었다. 남편은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슬퍼했고, 독재정권에 분노했다. 그는 자유와 민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2003년 남편과 함께 광주 망월동 묘지를 방문했는데, 남편은 감정에 복받쳐서 매우 힘들어했다. 건강이 염려될 정도였다. 마치 자기 아버지가 거기에 묻혀 있는 것처럼 마음속 깊이 슬퍼했다.


고인이 광주민중항쟁 당시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한 장면은 무엇인가.
광주 시민들이다. 시위 학생들에게 음료수와 음식을 가져다준 시민들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남편에겐 한국이 독일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던 것 같다. 식당이나 작은 것 하나하나 한국과 독일을 비교하며 ‘한국에선 어떻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큰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광주에 묻히기를 원했다.
부인께서 직접 겪은 한국의 인상은 어땠나.
직접 한국에 가보거나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하면 모른다. (울먹이며) 죄송하다. 이 얘길 하다보면 눈물이 나온다. 남편에게 많은 걸 들었고 함께 한국에도 몇 차례 다녀왔다. KBS에도 친구들이 있고 옛날에 남편을 위해 통역해주던 분도 계시다. 개인적으로 그들과 매우 친하다. 나도 그들을 만나면서 남편이 열정을 갖고 5·18 광주민중항쟁을 취재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


고인과 함께 금강산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때 기억도 각별한가.
2002년 남편을 만났을 때, 그는 8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시아에서 겪은 일을 편지로 어머니와 나누었다고 한다. 남편은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 한국에서 겪은 일을 나에게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북한을 방문한 첫 번째 서양인이었다고 한다. 평소 통일 문제나 탈북자들의 비참한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 2005년 금강산에 갔을 땐, 북한을 좀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북한 주민과의 접촉이 철저히 통제돼서 안타까웠다. 금강산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국인에게 금강산은, (분단 시절 독일에서) 우리가 뮌헨에 있는 가르미슈산에 못 가는 것과 비슷한 장소다. 우리도 분단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은 터라, 한국의 통일 문제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장례식 다음날,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가 자택에서 고인의 생전 활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장례식 다음날,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가 자택에서 고인의 생전 활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떠나기 직전까지 한국 상황 걱정해



브람슈테트 부인은 동·서독이 나뉘기 전 라체부르크에 살던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동독 지역에 살았다. 그 뒤 동·서독 사이에 장벽이 세워졌고, 브람슈테트 부인은 동독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브람슈테트 부인은 공장 노동자, 야간 간병인 아르바이트를 하며 의학 공부를 마쳤고, 동독에 있는 어머니가 헌책방에서 산 전공책을 소포로 보내주는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다고 한다. 1년에 서너 번 정치 심문을 거쳐 가족을 방문할 수 있을 뿐, 전화도 없어 편지로 의례적인 인사만 주고받는 이산가족의 삶을 직접 경험했기에, 브람슈테트 부인은 한국에 대한 남편의 관심에 더 크게 공명(共鳴)했을지도 모른다.



고인이 언론인에서 은퇴한 이후의 일상생활은 어땠나.
남편은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집안 이것저것을 고치는 기술이 좋았다. 그런 면에선 완벽주의자였다. 집안을 가꾸며 살았다. 친구도 많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부부는 그가 아시아에서 특파원으로 일했던 당시 촬영한 비디오를 함께 즐겨 보곤 했다. 여전히 세계 뉴스에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봐왔다.


한국에서는 최근 고인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인 ‘민주주의’의 퇴행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남편은 최근 한국 상황에 대해 불안해하며 걱정스러워했다. 2003년 송두율 교수가 체포됐을 때도 슬금슬금 다가오는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끔찍한 법이 남아 있었으니, 그때도 한국이 100% 민주화가 된 것은 아니지 않았는가.


고인의 영상을 보며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알게 된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은 고인을 향한 독자들의 마음도 애틋하다. 남편을 대신해 한국에 한 말씀 해달라.
한국인들이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가 마치 한국인인 것처럼 인정해주시니 정말 고맙다.



5월 광주에서 추모식 열려

브람슈테트 부인은 조만간 남편과의 추억이 서려 있는 집을 떠나야 한다. 조카 소유의 집을 비워줘야 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남편이 기억하고 기록해온 수많은 한국 관련 유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하다”.
유품은 아직 독일에 남아 있지만 남편의 손톱과 머리카락 등은 광주에 안장된다. 5·18기념재단은 오는 5월 고인의 신체 일부를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하는 추모식을 연다. “광주 망월동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바람에 따른 결정이다. 브람슈테트 부인 등 유족은 추모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라체부르크(독일)=글·사진 한주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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