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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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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기본소득 진짜 실체는?

복지체계 간소화 논란 있는 기본소득 도입에 대한 핀란드 학자의 기고… 당장 도입은 아니지만, 정당 초월한 지지 높아 본격 연구작업 들어가
등록 2015-12-24 10:03 수정 2020-05-02 19:28
지난 12월7일 전세계 언론이 일제히 “핀란드에서 곧 기본소득이 실시된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핀란드 정부가 국민에게 월 800유로(약 103만원)씩 기본소득을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얘기였다.
“기존 복지수당의 축소와 사회보장체계의 단순화냐” 아니면 “급진적 사회복지제도의 도입이냐”는 해석이 분분했다. 국내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레 높아졌다. 찬반 논쟁도 불붙었다. 기본소득이란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도록, 국가가 ‘무조건’ 국민 모두에게 일정액 이상 지급하는 소득을 뜻한다. 은 일찌감치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해법 가운데 하나로 기본소득을 주목해 심층 보도한 바 있다(제1000호 표지이야기 ‘소득을 나눠갖는 세상을 상상하라’).
당장이라도 기본소득이 도입될 것처럼 전세계가 들썩이자, 핀란드 사회보험공단(Kela)은 바로 다음날인 12월8일 보도자료를 내어 ‘기본소득 실험을 위한 예비 연구’가 진행되는 단계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내년 11월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인 스위스와 함께, 핀란드가 기본소득 시행의 문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은 핀란드 기본소득 운동의 중심 활동가이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창립 멤버인 얀 오토 안데르손 교수에게 핀란드의 현재 상황을 상세하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안데르손 교수는 2016년 7월 서울에서 열릴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 기조발제자로 방한할 예정이다. 글의 청탁과 번역은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가 맡아줬다. _편집자
핀란드의 유하 시필레 총리(가운데)가 지난 5월 헬싱키의 대통령궁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속한 중도우파 성향의 ‘중앙당’은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한다. 핀란드 정부는 기본소득을 실험할 예비 연구작업을 지난 10월부터 시작했다. REUTERS

핀란드의 유하 시필레 총리(가운데)가 지난 5월 헬싱키의 대통령궁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속한 중도우파 성향의 ‘중앙당’은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한다. 핀란드 정부는 기본소득을 실험할 예비 연구작업을 지난 10월부터 시작했다. REUTERS

서로 매우 다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두 나라,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핀란드는 다소 일찍부터 진보적 조처를 취해왔다. 핀란드 여성은 세계 최초로 의회 선거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얻었다(1906년). 유럽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총리도 핀란드 사람이었다(1917년).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유럽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이 혼란의 시기에도 민주주의를 유지하려고 한 나라였다. 핀란드에서는 세계 최초로 녹색당 총리가 임명됐다(1995년).

그리고 한 가지 더. 2015년 봄에 나온 핀란드 정부의 프로그램에는 짧지만 중요한 문장이 들어 있다. 핀란드어로 ‘Toteutetaan perustulokokeilu’인데, ‘기본소득 실험이 실시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 내용을 포함하자고 주장한 사람은 지난 4월 새 총리가 된 유하 시필레다. 그가 속한 중도우파 성향인 ‘중앙당’의 청년 조직은 오랫동안 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제안해왔다. 중앙당은 농민당으로 출발했으며, 아동수당과 보편적 보장연금 등 보편 수당이 있는 핀란드 사회보장 모델 수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정부 내의 다른 두 당, 즉 ‘국민연합’과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정당인 ‘진정한 핀란드인’(True Finns)은 기본소득에 관심이 없지만 실험에는 동의했다. 왜냐하면 어떤 형태로든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결정은 실험 이후에, 그리고 다음 총선 이후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핀란드 시민소득의 역사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원래 명칭은 ‘시민임금’이며, ‘기본소득’은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가져온 것이다)은 녹색당이 1987년에 창당할 때 처음으로 받아들여졌다. 1990년 핀란드 공산당의 잔존 세력과 인민민주연맹에 기초해 좌파동맹이 만들어질 때 좌파동맹도 기본소득(명칭은 ‘시민소득’)을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현재 녹색당과 좌파동맹은 상세한 기본소득안을 갖고 있는데, 재원 마련 방안과 이런 개혁이 조세 및 기타 다른 사회수당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기본소득안의 재분배 효과는 마이크로 시뮬레이션 모델을 사용해서 계산돼 있다. 하지만 두 당이 지난 정부에 참여했어도, 당시 정부에 참여했던 다른 정당들의 심한 반대 때문에 기본소득안을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단명한 자유주의 정당인 ‘청년핀란드인’은 1994년에 창당했는데, 기존 사회수당을 대체할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체제를 지지했다. (※‘음의 소득세’는 ‘마이너스 소득세’ ‘부(負)의 소득세’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시행 중인 근로장려세제(EITC)를 확대한 개념인데, 일정 소득 이하의 가구에 기존 조세체계를 활용해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최저생계비 이하를 받는 가구의 소득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대신, 다른 사회보장금이나 수당 등은 폐지된다.)

핀란드형 모델을 찾아서

최근까지 기본소득 아이디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중도좌파 성향인 사회민주당에서 나왔다. 만성적이면서도 점증하는 실업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은 모든 사람이 전일제 일자리를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무조건적 형태의 현금 이전보다 소득과 연관된 사회수당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회민주당의 청년 조직은 지난가을에 기본소득을 받아들이는 개혁 프로그램을 제출했다.

여기에는 3가지 수준의 소득 지원 방안이 포함돼 있다. 바로 ‘음의 소득세’ 형태의 월간 ‘보장소득’, 일을 하지 못하거나 구직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소 높은 수준의 ‘보편소득’, 고용 능력을 향상시키거나 중요한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주는 다소 높은 ‘활동소득’ 등이다. 제안된 개혁 프로그램은 매달 모든 소득과 소득 이전을 파악하는 데이터베이스(suomi.fi)의 개발과 연동돼 있기 때문에, 모든 핀란드 사람이 매달 자동적으로 돈을 지급받을 수 있다.

앞으로 기본소득과 관련된 실험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제는 핀란드 사회보험공단(Kela) 주도하에 다양한 조직이 참가해서 만든 연구자 워킹그룹이 맡았다. 핀란드 사회보험공단은 아동수당, 학생수당, 육아수당, 실업과 질병수당, 연금, 주택수당과 같은 사회적 현금 이전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이다. 핀란드 사회보험공단은 정부로부터 독립돼 있지만 의회의 감독을 받는다.

예비 실험의 목적은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응해서 사회보장체계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실험은 노동 유인을 제공한다는 관점에서 사회보장체계를 좀더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탐구할 것이다. 또 다른 목표로는 관료제 축소 및 복잡한 수당 체계의 간소화가 있다.

핀란드 사회보험공단이 진행할 예비 연구는 ‘어떤 모델로 보편적 기본소득 실험을 실시할 것인가’를 찾는 것이다. 그 결과가 나와서 실험이 실시되면, 서로 다른 집단 내에서 기본소득이 미치는 효과를 평가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얼마큼의 비용이 드는지도 추정할 것이다. 현재 워킹그룹이 실험적 연구를 수행할 방법을 찾고 있다. 목적은 보편적 기본소득 실험에 쓰일 수 있는 서로 다른 모델을 확인하고 비교하는 것이다. 앞으로 진행될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예비 연구는 2015년 10월 말에 시작됐다.

2. 2016년 봄, 기존 정보 및 다른 나라에서 진행된 보편적 기본소득 모델의 경험을 검토해 정부와 기관에 전달할 것이다.

3. 구체적인 실험 모델과 연구 계획에 대한 분석이 2016년 하반기에 나올 것이다.

4. 보편적 기본소득 실험은 2017년에 개시되는 것으로 계획돼 있다.

핀란드인 다수의 지지

두 가지 지역 실험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매달 약 800유로(약 103만원)의 기본소득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 550유로(약 70만5천원)에서 시작하는 ‘음의 소득세’를 매달 주는 것이다. 또한 학생, 실업자,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개별 실험도 있을 수 있다.

핀란드 사회보험공단에서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부서의 책임자인 오일리 캉가스 박사는 핀란드 국민이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2002년 캉가스 박사와 필자는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유사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핀란드 사람 다수가 어떤 형태든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다. 은 2002년과 2015년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핀란드 사람 10명 가운데 7명이 ‘음의 소득세’나 무조건적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한다. 2002년 제시됐던 1인당 평균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기본소득 액수 3700핀란드마르카는 2002년 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622유로(약 79만8천원)에 상응한다. 여기서 제안된 액수는 녹색당이나 좌파연합이 제안한 액수보다 많으며, 현재 핀란드 사람들이 받고 있는 최소 수당보다 훨씬 많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12월16일 펴낸 ‘핀란드의 기본소득 도입 검토’ 보고서를 보면, 2007년 핀란드 녹색당은 440유로(약 56만원) 기본소득 지급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2011년 좌파동맹은 620유로(약 79만5천원) 기본소득 지급 방안을 검토했다. 현재 핀란드에서 지급되는 기초연금은 월 750유로(약 96만원), 정부기초실업급여는 550유로(약 70만5천원)다.)

지지자를 사회·경제적 그룹으로 나누면 조금 놀랍게도 모든 그룹 내에서 다수가 기본소득이 ‘매우 좋은 생각’ 혹은 ‘어느 정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2 참조).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손해를 볼 수 있는 사람들(고위 공무원 등)조차 이 아이디어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데 대개 동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9년 총선 이후 정해질 미래

아주 흥미롭게도 모든 정당 내에서 지지자들 다수가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2002년에는 녹색당 71%, 기독교민주당 63%, 좌파연합 82%, 중앙당 62%, 국민연합 48%, 사회민주당 59%였다. 2015년에는 기독교민주당이 56%로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모든 정당 내에서 기본소득 지지도가 올라갔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69%의 지지를 보여 10%포인트 올라갔다.

최근까지 기본소득에 비판적이었던 사회민주당 지지자들 가운데서도 지지율이 높은 것은 아마 가장 놀라운 결과일 것이다. 최근 들어 처음으로 사회민주당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이유도 설명된다. 이 결과는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어디까지나 예비 실험 결과가 나오고, 2019년으로 예정된 다음 총선이 끝난 다음에야 떼어질 수 있다.

얀 오토 안데르손 전 핀란드 오보아카데미대학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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