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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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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그를 따라잡았다”

2016년 미 대선 앞두고 돌풍 일으킨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부자 증세·월가 개혁 등 40년간 한결같이 해온 ‘위험한 주장’ 대중 마음 흔들어
등록 2015-07-29 03:58 수정 2020-05-02 19:28

2010년 12월10일 오전 10시25분 미국 상원 의사당. 백발의 한 상원의원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먹지도, 앉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은 채 8시간30분 동안 마라톤 연설을 이어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 지도부 사이에 이뤄진 감세 연장 타협은 우리가 성취할 최선이 아닙니다.”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 2011년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야합한 부자 감세안 법안 통과에 홀로 맞서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이었다.
그는 당시 69살, 미 의회의 유일한 사회주의자, 버몬트주의 무소속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였다. 연설이 길어지면서 동료 의원들 대부분은 자리를 떴으나, 의사당 밖 상황은 달랐다. 트위터에서는 종일 그의 연설이 뜨거운 화제가 되었고, 그의 연설을 온라인으로 시청하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상원의 비디오 서버가 다운됐다. 시민들은 그에게 ‘필리버니’(필리버스터+버니 샌더스)라는 애칭을 붙이며 열광했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대중 유세 시작하며 클린턴 바짝 뒤쫓아

5년 전의 ‘필리버니’ 샌더스는 지금, 1년 반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의 가장 예외적 인물로 꼽힌다. 샌더스가 지난 4월 민주당 경선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의 유명 시사 프로그램들은 그의 출마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고, 기타 언론과 많은 전문가들도 그를 진지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 유세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지난 6월1일 위스콘신에서 열린 샌더스의 첫 대중 유세 집회에는 1만여 명이 운집했다. 여느 록스타의 공연을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이는 민주당의 선두주자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공화당의 유력 후보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가 첫 선거운동 발대식에서 동원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때부터 그는 다크호스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버몬트·뉴햄프셔·애리조나 등 그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지난 7월12일에는 미국의 대표적 정치쇼인 의 (Face the Nation)에 출연해 선거 전략을 공개했다. 뉴스쇼에 출연해서는 ‘내각 진용’ 구상을 묻는 질문에 폴 크루그먼, 조지프 스티글리츠, 로버트 라이시 등 대표적 좌파 경제학자들을 거론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론조사의 상승세도 뚜렷하다. 초반 판세를 좌우할 뉴햄프셔주에서 최근 실시된 조사에서 샌더스는 클린턴 전 장관을 10%포인트 미만의 차이로 바짝 뒤쫓았다. 아이오와주에서도 두 달 사이 지지율이 15%에서 33%로 두 배 이상 높아졌다.
후원금 규모도 1500만달러(약 168억원)를 돌파했다. 클린턴의 4500만달러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지만, 기업이나 부자들의 모금을 동원한 클린턴 쪽과 달리 전체 후원금의 87%가 250달러(약 28만원) 이하의 소액 후원이라는 점이 남다르다. 대부분이 온라인 소액 기부를 비롯해 티셔츠, 스티커, 머그컵 등 기념품 판매를 통해 이뤄진 풀뿌리 기부다.
독주를 예상했던 클린턴 쪽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클린턴 캠프의 제니퍼 팔미어리 공보국장은 에 출연해 “그(샌더스)가 만만찮은 세를 보여줄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고, 지난 4월12일 대선 출마 선언 이래 언론 노출을 꺼리던 클린턴은 지난 7월7일 과의 첫 TV 인터뷰에 나서 “국민은 나를 믿어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1500만달러 후원금의 87%가 소액후원
버니 샌더스(73)는 누구인가? 그는 미국 동북부의 조그마한 주인 버몬트의 하나뿐인 연방 상원의원이다. 미 의회의 유일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다. 상원 100명 중 2명의 무소속 의원 중 하나요, 공고한 양당제의 미국 정치 역사에서 25년간 줄곧 무소속의 외길을 걸어온 자다.
그는 자주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언급한다. 부자 기업으로부터 높은 세금을 걷어 대학 등록금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금융권 개혁에 가장 목소리를 높여온 상원의원이기도 하다. 기존 정치권에서 이렇다 할 지지 후보를 찾지 못했던 진보주의자들은 이제야 의심 없이 지지할 수 있는 후보를 만났다고 말한다.
이번 경선에서 그는 민주당보다 확실한 진보적 의제들을 공약으로 들고나왔다. 부자 증세, 월스트리트 규제와 초대형 금융기관 해체, 정부가 운영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 도입, 최저임금 인상과 사회보장 확대, 공공기금에 의한 선거, 기후변화 대응 정책 등은 미국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큰 이슈’를 시원하게 짚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샌더스가 집중하는 주제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미국은 현재 최악의 소득 불평등 상황에 처해 있다.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월스트리트의 탐욕으로 대표되는 부의 집중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으나, 2년 전 이 문제를 지적하며 일어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끝나버렸다. 이후 많은 미국 시민들은 여전히 왜곡된 경제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샌더스의 문제의식이 이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 선거운동은 버니 샌더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Enough is enough)며 일어나, 이 위대한 나라와 정부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한 줌 부자들의 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행동입니다. 우리에겐 정치적 혁명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이끌고 싶습니다.” 지난 5월26일 자신의 지역 기반인 버몬트주 벌링턴의 샴플레인 호숫가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버니 샌더스는 말했다. 그는 기다려왔다는 듯이 전국을 돌며 자신의 오랜 꿈을 대중을 향해 쏟아놓고 있다.

7월6일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열린 버니 샌더스 대선 캠페인에 모인 사람들. AP 연합뉴스

7월6일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열린 버니 샌더스 대선 캠페인에 모인 사람들. AP 연합뉴스


보수적 버몬트주가 지지하는 이례적 ‘좌파’
샌더스가 주장하는 바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그는 미국을 “부자의, 부자에 의한, 부자를 위한 과두제(oligarchy)” 국가로 규정한다. 그는 “기괴한 수준의 불평등”(a grotesque level of inequality)을 낳고 있는 “조작된 경제”(rigged economy)를 고발하며, “대형 금융기관 해체와 조세제도 개혁 등을 통한, 1%의 극소수에 편중된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다. 이같은 주제들은, 그의 의정 활동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5년 전 8시간30분 동안의 필리버스터 연설에서도, 1991년 처음 하원의원이 되었을 때도, 버몬트주 벌링턴의 시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대에도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 많은 미국 언론들이 “버니 샌더스가 현시대를 따라잡은 것이 아니라, 현시대가 (드디어) 버니 샌더스를 따라잡았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1941년 미국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버니 샌더스는 1960년대 시카고대학 시절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워싱턴 행진에 참여하는 등 민권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 베트남 반전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68년 버몬트주로 이주해 그곳에서 작가, 다큐멘터리 감독, 목수로 일했다. 1970년대 초 처음으로 버몬트주 지방선거에 출마했지만 고작 2%의 표를 얻었다.
1981년 버몬트주 벌링턴의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그의 본격적인 정치 인생이 시작됐다. 이후 그는 1990년부터 2006년까지 하원의원으로 8선을 한 뒤, 2006년 상원의원이 되었다. 첫 시장 선거 때 단 10표 차로 신승했던 그는, 2012년 상원 재선 때는 71% 득표로 압승했다. 전국적 인지도는 없었지만, 버몬트주 지역민들에게는 압도적 지지를 얻는 정치인이었던 셈이다. 이번 대선 후보 기부금과 마찬가지로 2012년 상원 선거의 자금 역시 60% 이상이 개인들의 소액 기부로 모아졌다.
버몬트주에서 그의 정치 활동은 인상적이다. 버몬트주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사회주의자가 지난 25년간 지역민들의 꾸준한 신뢰와 지지를 얻어온 것은 진기한 일이다.
샌더스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사회주의적 ‘이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신념을 현실적인 결과물로 만들어왔다. 보수적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그가 오랫동안 의정 활동을 해올 수 있었던 데는, 연방 예산을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현장형 일꾼’의 면모가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벌링턴 시장 시절 보여준 ‘도시 사회주의’
벌링턴 시장 시절 샌더스는 저소득층을 위한 영구임대주택을 지어 보급했고, 호반의 개발 계획을 취소해 호숫가가 콘도 이용자나 외지 사업가들의 사적 공간이 아닌 지역 주민들 모두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지역 공동체와 일자리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지역 영세 기업들을 키웠고, 실제 그중 많은 기업들이 크게 성장해 도시 경제에 활기를 더했다(당시 시가 지원했던 환경 세제 기업이 현재 벌링턴에서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당시 시의 지원을 받아 가드닝 제품 기업을 운영하던 윌 랩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버니는 그때, 경제가 반드시 ‘나쁜 놈’들의 손아귀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은 듯하다.” 벌링턴은 지금도 미국 내에서 가장 실업률이 낮고 경제가 호황인 도시 중 하나로, 환경친화적이며 살기 좋은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샌더스는 “정부가 주민들을 위해 ‘일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민주적 사회주의’의 기본”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토드 기틀린은 에 기고한 글에서 이같은 샌더스의 정치 스타일을, 19세기 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도시의 토지와 산업을 공유화하고 이윤을 사회 전체를 위해 사용하고자 했던 ‘도시사회주의’에 빗대기도 했다.
버니 샌더스는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민주당 대선 주자로 나설 수 있을까? 샌더스는 어느 모로 보나 클린턴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지명도는 물론 무소속인 그는 자금도, 조직력도 약하다. 더구나 2000년 녹색당 랠프 네이더의 출마로 민주당 앨 고어가 조지 부시에게 패한 이후, 제3당의 정치는 사실상 미국 좌파 정치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본래 미국은 역사적으로 좌파 정치의 불모지다. 서구의 부유한 국가들 중 진보 정당이 뿌리내리지 못한 몇 안 되는 국가다. 샌더스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을 두고 ‘당당하다’는 평가가 따라붙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대선에 나선다는 것은 아직 농담 같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리 여부와 별개로, 이같은 정치판에서 샌더스의 예상외의 선전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그의 등장은 자칫 클린턴의 ‘대관식’이 될 뻔한 선거를 다층적이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클린턴은 샌더스가 선점한 진보적 의제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좌파 정치 불모지에서 ‘제3당 정치’는 가능할까
샌더스는 언제나 질문한다(인터뷰어에게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그의 ‘질문 어법’은 인터넷상에서 화제이기도 하다). “당신은 새로 창출되는 소득의 99%가 상위 1%에게 가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나?” “노동계급, 중산층을 대표하는 후보가 선거에서 이길 수 있나?” “우리는 왜 이것을 견디고 있나?” 그의 이런 질문들은 인터뷰어나 상대 후보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생각에 잠기게 한다. 정치는 왜 존재하는가?
1979년 샌더스는 ‘미국 사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데브스와 관련한 28분짜리 오디오 다큐멘터리 을 만들었다. 데브스는 1912년 대선에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6%의 표를 얻었던 인물이다. 에 따르면 샌더스는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유진 빅터 데브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만약 일주일에 40시간씩 TV를 보는 평균적인 미국인이라면, 아마 코작이나 원더우먼과 같은 인물에 대해, (…)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최신 경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아무도 당신에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유진 데브스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왜? 답은 간단하다. 그가 사망하고 50여 년이 흘렀음에도, 이 나라를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한 줌의 사람들은, 여전히 데브스와 그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샌더스가 클린턴을 꺾고 대선 주자로 나서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그가 오랜 세월 지속해온 ‘위험한 생각’이 이번 경선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은 자명하다. 그가 40년간 반복해온 말이, 집회에 모여든 누군가에게는, 집에서 TV로, 유튜브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지켜보는 누군가에게는 처음 듣는 말일 것이다.
버니 샌더스는 지금, 우파 중심의 양당 구도에서 제3당 정치의 필요성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로사 객원기자 goorr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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