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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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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생태, 원전사고가 가르쳐준 것들

일본 이토시마에 모인 방사능 ‘피난민들’, 나눠먹으며 에너지 아끼는 셰어하우스, 자연 옆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안 어린이집 등 원전 문제에서 도망치지 않는 공동체 만들어
등록 2015-06-26 07:42 수정 2020-05-02 19:28
가와구치 마사토 원장과 와쿠와쿠 보육원 아이들이 일본 이토시마시의 해변가에서 놀고 있다.

가와구치 마사토 원장과 와쿠와쿠 보육원 아이들이 일본 이토시마시의 해변가에서 놀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원자력발전소 고리 1호기 정지 결정이 내려졌다. 원자력발전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1978년 상업운전에 들어간 원전의 수명이 다해 가동을 중지한다는 발표였다. 한국의 전력 공급 정책은 원자력이 중심이다. 정부는 원전 2기를 추가로 건설하는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안’을 올해 발표하고 6월18일 공청회를 강행했다. 원전 건설 지역 주민에게는 ‘메르스’보다 민감한 이야기지만 대다수 국민에겐 체감 안 되는 ‘먼 나라’ 이야기다.

일본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2011년 3월11일 일본을 흔든 동일본 대지진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보다 더 크고 오래갈 상처도 남겼다. 대지진으로 인해 전기 공급이 끊긴 후쿠시마 원전은 냉각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방사성 물질이 유출됐다. 원전 주변 반경 20km 지역은 모두 집을 떠나야 하는 ‘죽음의 땅’이 됐다. 사고 당시 흘러나온 방사성물질은 가까운 수도권 지역에도 뿌려졌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수도권 사람들도 방사능을 피해 짐을 쌌다. 원전 폐해를 체감한 피난민들, 지난 5월 이토시마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10만 명 중 6만 명이 외지인

“3월15일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도망치라고 연락해 짐을 챙겨 집에서 나왔다. 도쿄 공항에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미즈노 아쓰코는 잠시 숨을 골랐다. 4년이 지났지만 울음이 목에 걸렸다. “떠나는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 엄마와 아이였다. 가족을 비행기에 태워 보낸 아빠가 공항에 남는 광경이 잊히지 않는다.” 떠날 수 없는 이들은 남았다. 직장과 집을 당장 떠날 수는 없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으로 도쿄의 방사능 수치가 급격히 올라갈 때였다. 미즈노와 아이는 시모노세키로 몸을 피했다.

이들은 이후 도쿄를 아예 떠나기로 결정했다. 접골사인 남편은 다음해 1월 일을 정리했다.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두려움과 공포가 많았다. 일단 멀리 도망치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하게 살아야 하지’ 차분하게 생각해보고 내 삶을 아예 재구성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도시를 떠나자는 결심은 섰지만 어디로 갈지 난감했다. 여러 곳을 돌던 중 미즈노의 아이가 울음을 멈춘 곳이 이토시마였다. 미즈노의 아이는 처음으로 도쿄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토시마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다. 일본 남쪽 섬 규슈의 후쿠오카현 서부 지역으로 바다와 접해 해가 바다로 떨어지는 근사한 광경을 볼 수 있다. 후쿠오카 공항까지 차로 1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 등 교통이 편해 예전부터 예술인 등이 많이 이주했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엔 예술인 대신 원전 피난민들이 찾고 있다. 이 지역의 땅과 바다가 그나마 오염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토시마 주민 10만여 명 가운데 6만 명이 외부 출신이다.

도쿄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고이치 시다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이토시마로 이사했다. “원전 사고가 터졌을 때 생필품을 챙기려는 사람들 때문에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도쿄의 슈퍼마켓에선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그때 돈이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안 되는 게 있구나 생각했다.”

에너지와 경제 문제에 눈뜬 고이치는 농촌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대도시인 도쿄는 바깥에서 식품뿐만 아니라 전기 등 에너지를 계속 끌어와야 하는 구조였다. 이를 위해 도시 바깥에 대규모 원전을 세워야 하고 송전탑도 만들어야 했다. 원전 사고를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이토시마로 와서 그는 셰어하우스(공동주택)를 만들었다. 외부에 에너지를 기대더라도 나눠쓰고 나눠먹어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꿈꾼 공동체는 외부 세계와 차단된 곳이 아니다. 셰어하우스에 함께 사는 이들 중에는 이토시마 출신도 있다. “사회와 고립된 공동체를 만들려는 게 아니다. 셰어하우스가 커지면 공동체가 되고, 이 공동체가 사회와 소통하면 우리 의사를 표현할 수도 있고 정치력도 가질 수 있다. 원전 사고로 일본은 분기점을 맞았다. 일본 젊은이들은 이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정치에 관심이 있다”
고이치 시다(왼쪽)와 미즈노 아쓰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도쿄에서 규슈섬의 작은 도시 이토시마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토시마 공동체 활동을 하며 탈핵·생태 운동을 하고 있다.

고이치 시다(왼쪽)와 미즈노 아쓰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도쿄에서 규슈섬의 작은 도시 이토시마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토시마 공동체 활동을 하며 탈핵·생태 운동을 하고 있다.

일본 원전 피난민들의 변화는 여기에서 감지된다. 미즈노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토시마에는 커뮤니티가 많아서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 잦다. 사람들에게 원전을 반대한다는 생각을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원전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거나 나쁜 정책에 대응하자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과 생각을 따뜻하게 공유할 수 있게 말이다.”

마침 미즈노를 만난 날 그의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이들은 음식을 가져와 널찍한 거실에서 함께 먹고, 자수 전문가에게 자수 놓는 법 등을 배우고 있었다. 한쪽에서 자수를 배우고 있던 가메야마 노노코 역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나고 5개월 뒤 도쿄를 떠난 이주민이다.

노노코의 생각도 비슷했다. “지금까지 일본의 원전 시민운동은 소수만 하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거나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개인들이 해야 할 몫이 있다고 여긴다.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에 집중된 삶을 바꾸거나 마을 공동체성을 높이는 등 할 수 있는 게 있다. 이렇게 (여성들이) 모이는 것도 공감대를 넓혀가는 방식이다.” 도쿄에서 활동하는 사진가였던 노노코는 원전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사진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대안적 삶을 위해 공동체를 고민하는 젊은 엄마들의 모임은 대안 어린이집으로도 이어진다. 이들은 아이를 대부분 ‘와쿠와쿠’ 보육원에 맡긴다. 와쿠와쿠 보육원은 교육청에서 인가받은 정식 보육원은 아니다. 와쿠와쿠 보육원을 찾으니 가와구치 마사토 보육원장은 보육원 뒤편 해변으로 기자를 이끌었다.

아이들은 오후 햇살을 받으며 선생님들과 모래밭에서 뛰놀고 있었다. 해안가 바위에 숨은 톳을 캐기도 했다. “여기가 얘기하기 편할 것 같다”고 말한 가와구치 원장은 이렇게 물었다. “왜 바다가 파란지 아느냐.” 답을 못 내며 우물쭈물하는 사이 가와구치 원장은 설명을 시작했다. “다른 보육원은 산수가 중요하면 숫자를 가르친다. 우리는 계단을 오르면서 하나둘을 세고,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간판에서 글자를 하나씩 읽어준다. 바다가 왜 파란지 아이들은 실제 바다를 보면 궁금해한다. 그러면 선생님이 설명해준다. 책으로 읽으면 궁금할까? 어떤 말이든 의미가 있을 때 몸으로 느끼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와쿠와쿠 보육원의 철학은 특별하다. 아침에 보육원에 오면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이야기책 한 권을 읽은 뒤, 오늘은 어디로 수업을 나갈지 토론한다. 산·논·강·바다 가운데 고르면 그날은 그곳에 나가 노는 식이다. 바다를 보고 왜 파란지 물을 수 있는 궁금증도 이런 교육 방식에서 나온다. 아침마다 놀러갈 곳을 정하니 가슴이 두근댄다고 해서 ‘두근두근’(와쿠와쿠) 보육원이라 이름 지었다.

바다를 보며 바다가 왜 파란지를 가르치다

먹거리도 신경 쓴다. 부모들이 방사능 문제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탓에 아이들은 이곳 이토시마에서 난 농산물로만 조리한 급식을 먹는다. 에너지 문제는 먹거리와도 연결된다.

“아이들이 안심하고 자랄 수 있는 환경도 이들이 도시를 떠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힘이 된다. 아이들이 많아지면 지역 공동체가 건강해지고, 이웃과 자연을 소중히 여기던 공동체 정신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은 그동안 이런 것을 잊고 지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묻혀 있던 이런 목소리들이 나오는 것을 소중히 다뤄야 한다.”(가와구치 마사토 원장)

실제 지역사회와 교류하고 소통하려는 힘은 시민단체 활동가 후지 요시히로를 이토시마 시의원으로 당선시키기도 했다. 와쿠와쿠 보육원과 셰어하우스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자원해서 선거운동을 했다. 후지는 5년 전 이토시마로 와서 생태운동을 하며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다. 시의원 후보자 25명 가운데 후지는 20위로 당선했다. 출마자 가운데 22위까지 당선인이 됐는데, 그는 1400여 표를 얻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후지는 이제 녹색당에 가입해 시의회에서 이들을 대변한다.

“원전 사고 등 재난을 겪으면서 정부가 필요할 때는 막상 도와주지 않는구나라고 깨달은 사람이 많다. 알아서 살아야겠다는 이들도 있지만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전에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공산당 등 이데올로기적으로 주류 정치에 반대하는 이들뿐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에는 대안적인 것을 주장하는 젊은 사람들의 참여가 많아졌다.”

후지는 ‘또다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것이 발생하면 일본은 망한다고 시민단체들은 생각한다’고 전했다. “후쿠시마 이전에는 지역별로 알아서 활동했다. 하지만 방사능의 영향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지역에서만 활동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알아서 살자 vs 정치를 바꾸자

물론 변화의 목소리는 아직 미약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도쿄에서는 수만 명이 모여 원전 가동을 중단하라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규모 집회 자체가 드물었던 일본 사회에서 특별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쿄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이런 바람이 지나간 뒤 바뀐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에 가입하거나 후원하는 이들의 수가 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방사능을 피해 이주해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적응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토시마에선 변화의 모습이 분명했다. 오래된 원전 문제에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공동체가 있었다. “우리가 옳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방사능의 영향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하다”고 후지는 말했다.

이토시마(일본)=글·사진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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