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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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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광기, 신성모독법

무함마드 이름을 모독하면 사형에 처해지고, 법을 대신하는 폭도 넘쳐나는, 소수종교·사회약자를
겨냥한 ‘칠흑 같은 법’… 극단적 이슬람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아시아 비비’들
등록 2015-03-04 08:19 수정 2020-05-02 19:27

프랑스 만평지 가 공격받기 사흘 전인 지난 1월4일, 파키스탄 라호르 시내 리버티 촉에서는 전 펀자브 주지사 살만 타시르의 4주기 촛불집회가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집회장은 곧 아수라장이 됐다. 아와미노동자당(AWP) 사무총장 파룩은 극단주의를 비판해온 성직자인 타히르 아슈라피 지지자라며 집회에 나타난 수염 긴 사내들이 진작에 수상했다고 말했다. AK47 등으로 무장한 폭도들은 15분간 난장판을 만들고 떠났다. 집회를 조직한 시민단체연합 의장 압둘라 말릭은 폭도들이 알마디나 마드라사(이슬람 종교학교)에서 왔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 마드라사 교장인 카담 후사인 리즈비와 그의 아들 사드 리즈비가 계획한 공격으로 밝혀졌다. 워낙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보니 경찰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사건 신고서에 이름을 올린 압둘라 말릭은 그날 이후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언쟁 오가던 사건에 교수형 선고된 아시아 비비

이날 시민들이 추모하려 했던 살만 타시르는 2011년 이슬라마바드의 한 식당에서 자신의 보디가드가 쏜 총탄 29발에 쓰러졌다. 그즈음 죽음을 예측이라도 하듯 타시르는 섬뜩한 트위터를 남겼다. “신성모독(Blasphemy) 문제와 관련해 우익들에게 굴복하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거부한다. 비록 내가 이를 거부하는 마지막 사람이 될지언정.”

아시아 비비를 옹호하다 자신의 보디가드가 쏜 총탄에 쓰러진 살만 타시르를 추모하는 촛불집회는 폭도들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1월4일 시민들이 폭도들이 떠난 뒤 자리를 수습하고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Center for Human Rights Edication Pakistan

아시아 비비를 옹호하다 자신의 보디가드가 쏜 총탄에 쓰러진 살만 타시르를 추모하는 촛불집회는 폭도들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1월4일 시민들이 폭도들이 떠난 뒤 자리를 수습하고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Center for Human Rights Edication Pakistan

타시르는 신성모독법을 ‘칠흑 같은 법’이라 표현했다. 그 자신이 무슬림이던 타시르가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고자 했던 소신도 칠흑 같은 법에 갇힌 한 기독교도, 아시아 비비 사건이 계기가 됐다.

아시아 비비(본명 아시야 노린(Asiya Noreen))는 라호르 외곽 셰이크푸라에서 남편, 아이 다섯과 함께 지주의 땅에서 노동하며 먹고살았다. 2009년 6월 비비는 함께 일하던 무슬림 이웃에게 자신이 사용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건넸다. 이웃은 “깨끗지 못한 기독교인의 물은 마시지 않는다”며 거부했고 언쟁이 오고 갔다. 무슬림 이웃은 아시아 비비가 선지자 무함마드를 모욕하고 성스러운 코란까지 훼손했다며 동네 성직자 카리 무함마드 살림에게 일러바쳤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살림은 군중을 선동하며 아시아 비비의 구속을 요구했다. 아시아 비비에게 개종을 강요했지만 비비는 자신의 신앙을 고집했다. 그리고 2010년 11월, 아시아 비비는 펀자브 셰이크푸라 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아시아 비비를 겨냥한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이 극에 달했다. 일부 성직자는 현상금을 걸었고, 아시아 비비를 옹호하는 건 마치 비비와 바람이라도 피우는 것처럼 취급받았다. 동정 여론이 적었던 건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아시아 비비의 고등법원 항소심을 맡았던 변호사 나임 샤키르의 말이다.

한편 주지사 살만 타시르의 살해범 뭄타즈 카드리도 2011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2월11일 이슬라마바드 고등법원은 그의 항소심을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그러나 카드리는 이미 영웅이 되었다. 예컨대 1월27일 법원에 나타난 그를 맞이한 건 90명의 변호사와 300명가량의 환호하는 군중이었다. 카드리 항소심의 변론을 맡은 이는 라호르 고등법원 전 판사인 카와자 샤리프이고, 법원에 모인 이들 다수는 수니 타흐리크(Sunni Tehreek) 지지자다.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영향을 받은 온건 성향의 발레비 종파, 바로 그들이 1월4일 촛불집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아시아 비비를 옹호하다 암살당한 이는 살만 타시르 주지사만이 아니다. 소수종교부 장관이자 파키스탄 내각에서 유일한 기독교도였던 샤바즈 바티 역시 2011년 3월 목숨을 잃었다. 바티 장관은 파키스탄탈레반(TTP·Tehreek Taliban Pakistan)의 총알 세례에 사망했다. 파키스탄탈레반은 수니 타흐리크와 적대적인 데오반디 계열로 이슬람 극보수를 내건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과 유착돼 있다. 종파 분쟁이 있을 때면 격하게 부딪치는 두 조직, 그러나 신성모독 문제에 관한 한 그들은 한배를 타고 있다.

파키스탄 신성모독법의 출발은 1970~80년대 냉전시대를 풍미한 지아 울하크 군부독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절 파키스탄은 대소 항전의 이름으로 냉전의 대리장이 돼가는 아프가니스탄에 지하드 거점 역할을 하며 미국의 동맹국으로 자리잡았다. 파키스탄-아프간 국경지대 난민촌과 마드라사는 지하드 전사 보급소나 다름없었고, 이를 쥐락펴락하던 군벌과 종교정당들은 미중앙정보국(CIA)의 지원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줄을 타고 급부상했다. ‘돈줄’과 ‘이념줄’을 모두 확보한 지아 울하크는 비교적 세속적이던 파키스탄을 이슬람화의 늪으로 빠트렸다.

지아 울하크 시대 이슬람화 노선의 산물

우선 “특정 종교에 대한 적대적 선동 금지”(295)를 명시한 식민 시절 형법 조항에 1982년과 1986년 각각 “코란을 훼손하는 자”(295-B), “예언자 무함마드의 성스러운 이름을 모독하는 자”(295-C) 처벌 조항을 신설했다. 전자는 종신형, 후자는 ‘종신형 혹은 사형’에 처한다. 1986년 이전까지 14건에 불과하던 신성모독 사례는 법이 생기고 처벌이 강화되자 증가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법체계에 ‘각’을 잡으며 신성모독법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연방 샤리아법원’(Federal Shariat Court) 역시 지아 울하크 시대 이슬람화 노선의 산물이다.

지아 울하크 정권 이후 신성모독 처벌이 강화된 건 1991년, 파키스탄무슬림리그(PML-N)의 나와즈 샤리프 총리 시절이다. 그해 연방 샤리아법원은 295-C에서 ‘종신형 혹은’을 지우고 ‘사형’만을 남겼다. 파키스탄무슬림리그는 2013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한 뒤 또다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2011년 1건이던 신성모독 사례는 2013년에 이르러 100건으로 증가했다. 지난해에는 39건으로 연루된 인원만 359명이다. 변호사 68명이 집단고발을 당한 사례도 있다.

“파키스탄무슬림리그가 정권을 잡으면 신성모독 사례나 반기독교 폭력이 증가한다. 파키스탄 기독교도 가운데 75%가 펀자브 지방에 거주하고 있고, 파키스탄의 신성모독 사례 96%가 펀자브 지방에서 고발된다.” 편집장 나지르 바티의 지적이다.

돈 문제를 ‘신성모독’으로 이용해

1월4일 촛불집회를 망친 이맘(종교 지도자) 카담 후사인 리즈비로 말하자면, 수니 타흐리크는 물론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형이자 펀자브 주장관인 샤바즈 샤리프와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폭도가 법을 대신하는 경향도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슬라마바드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중앙리서치 및 치안연구’(CRSS)는 1990년 이래 신성모독으로 고발당한 이들 중 60명이 폭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절반 이상이 지난 5년간 발생한 일이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기독교도 부부 고문·방화 사건은 이런 광기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펀자브 동부 콧 라다키샨 주민 셰자드와 임신부였던 그의 부인 샤마는 벽돌공장 노동자였다. 11월5일, 부부는 코란을 훼손했다는 모함을 받으며 성난 군중에게 감금·구타를 당한 뒤 산 채로 불타 죽었다. 사건의 내막을 잘 아는 아와미노동자당 파룩은 “이 사건이 신성모독과 아무 상관 없는 돈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벽돌공장 주인이 이 부부가 소개한 일꾼에게 선불로 지급한 임금을 부부한테서 돌려받으려 압박했으나 돈을 받지 못하자 ‘신성모독’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편집장 나지르 바티는 “당시 폭도를 이끌던 인물 중 하나가 펀자브 지방 의회 파키스탄무슬림리그 소속 의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원의 이름은 ‘최초 신고서’(FIR) 가해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의 이름으로 작성하려던 신고서가 경찰 이름으로 작성된 뒤 주동자급 정치인의 이름이 사라진 것이다.

“바로 그 경찰들이 샤마와 셰자드가 불타 죽을 때 폭도들을 향해 경고사격 한 발 쏘지 않던 이들이다.” 나지르 바티의 한탄이다.

이 사건은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비판을 이끌어낼 만큼 반향이 컸다. 전 대통령이자 인민당(PPP) 공동대표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도 “비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입을 열었다. 자르다리는 “종교가 소수자들을 위축시키는 데 이용되지 않도록 실질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신성모독법


모르핀 없이 공개 참수당한 여성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퓨리서치센터의 2012년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약 22%의 국가 혹은 자치 영토가 신성모독법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신성모독과 언론자유’ 토론 중 총격 사건이 일어난 덴마크를 비롯해 핀란드, 아일랜드, 독일, 캐나다 등 유럽 국가 16%가 여전히 관련 조항을 두고 있고 영국은 2008년 폐지했다. 아시아권에서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엄격히 유지하고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권역으로 묶어보면 20개국 중 14개국이다.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신성모독을 중형으로 다스리는 대표적인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아라비아 블로거인 라이프 바다위(30)는 2012년 ‘사우디 자유주의 네트워크’(Saudi Free Liberal Forum)라는 토론 블로그를 열어 신성모독죄에 걸렸다. 그해 6월17일 체포된 바다위는 10년형과 공개 태형 1천 대를 선고받았다.
지난 1월9일은 바다위가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시 알잘팔리 모스크 앞에서 공개 태형 첫 50대를 맞은 날이다. 이후 매주 금요일에 50대씩 1천 대를 맞을 운명이던 그의 두 번째 태형은 2월 말 현재 아직 이행되지 않았다. 첫 태형의 후유증으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국제 인권단체의 캠페인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 바다위의 변호사였던 왈리드 압둘 카이르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교란 혐의’. 그는 안티 테러리즘 법으로 처벌받았고 석방 뒤에도 15년간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국제사회가 이슬람국가(IS)의 인질 참수 장면에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사실 공개 참수의 ‘고수’는 사우디아라비아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해 10월 기준 59명을 공개 참수했고 그 전년에는 3명의 미성년자를 포함해 79명을 참수했다. 1985년 이래 2013년까지는 총 2천 명이 공개 참수를 당했다. 참수당한 이들 중에는 신성모독 위반에 걸린 이들이 포함돼 있다.
바다위가 첫 태형 50대를 맞은 날, 사우디아라비아 거주 ‘버마 여성’은 의붓딸 살해 혐의로 공개 참수당했다. 처형 순간까지 자신이 무고함을 주장했던 여인은 보도에 따르면 고통을 경감시키는 ‘마약’ 투여 없이 그냥 참수됐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로힝야 노동자 마웅라(가명)는 그 ‘버마 여성’이 로힝야라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수십 년간 지구촌 곳곳 수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자금줄이었다. 그리 보자면 ‘테러리스트 대부’이자 신성모독 처벌을 가장 야만적으로 이행해온 국가다. 동시에 미국과 서방 세계의 강력한 동맹국이라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신성 왕국’이다. 이 위선적 장면 하나가 1월11일 ‘파리 마치’ 대열에 합류한 이스마일 알셰이크 파리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다. 위선은 계속됐다. 1월23일 압둘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사망 이후 세계 정상들은 리야드로 몰려들어 “개혁적” 사우디 국왕의 “업적”을 기렸다. 누구도 이 나라의 끔찍한 인권 현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독일 정도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무기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만평의 말씀을 빌려보자. 사우디아라비아에 관한 한, “모든 건 용서되느니라”.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가 극단주의자들 단결시켜”

그러나 자르다리의 인민당 정부도 ‘종교를 이용하는’ 신성모독법 문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인민당이 집권한 2010년 4월8일 파키스탄 의회는 지아 울하크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18번째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심지어 역대 대통령 명단에서 ‘지아 울하크’ 이름도 지웠다. 그러나 신성모독 처벌 조항은 건드리지 않았다. 세속정치를 표방하는 인민당이라지만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헌법을 통과시킨 것도 인민당 정부다. 1973년, 인민당 대표의 바통을 이어받고 있는 부토 가문의 대이름, 바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 시절이었다.

아시아 비비 변호인단은 지난해 11월 대법원에 마지막 항소장을 제출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최종 판결이 날 수 있다는 게 변호사와 인권단체들의 가슴 졸인 예측이다. 항소심이 기각되면 아시아 비비는 파키스탄에서 신성모독으로 사형당하는 첫 사례가 된다. 무죄로 풀려나도 비비와 가족들은 파키스탄에서 안전하게 살 수 없다.

9·11 테러 이후 인구의 약 3%에 이르는 파키스탄 기독교도들은 “미국의 개”라는 소리를 들으며 이유 없이 공격받았고, 강산이 변하고도 계속되는 ‘테러와의 전쟁’은 ‘관타나모 고문 전설’을 낳았다. 여전히 계속되는 ‘무인기 공격’까지, 30여 년간 시대 상황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 극단주의의 최대 피해자는 파리나 뉴욕, 서울 시민이 아니다. 극단주의의 광풍으로 촛불조차 켜기 힘든 다수 무슬림들과 무슬림 주류 사회의 소수종교자들이다. 그리고 아시아 비비다. 안타깝게도 공격 뒤 다시 등장한 무함마드 만평은 아시아 비비에게 불리한 기압을 조성하고 있다. 1월24일 파키스탄의 주요 도시를 가로지른 수만 명의 반 행진은 신성모독 반대 행진이기도 했다.

“파키스탄에 사는 우리는 극단주의와 최전선에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프랑스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몰라도 만평이 극단주의자들을 더더욱 단결시키는 통에 우리 명분도 훼손받고 있다. 서방 언론의 태도에 나 같은 무슬림도 상처받고 있다.” 시민단체연합 의장 압둘라 말릭의 솔직한 변이다.

의 신임 편집장 제라르 비아르는 미국 과의 인터뷰에서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지만 “종교가 정치화되는 것을 문제 삼는다”고 말했다. 옳다. 하지만 동시대 상황을 읽는 데 현명하지 못했던 이 ‘시사’ 매거진은 세속주의자의 삐딱한 시선으로 타자의 신앙을 집단 조롱한 흔적을 남기고 또 남겼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아시아 비비가 지키려 했던 신앙, 다른 신앙인의 소신과 억울함을 목숨 걸고 옹호하려 했던 ‘파키스탄의 볼테르’ 살만 타시르의 또 다른 소신마저 흔들어버릴 만큼.

아시아 비비를 위해 행진하시겠습니까

아시아 비비 석방 캠페인을 벌여온 국제앰네스티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사형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묻고 있다. 기자도 묻고 싶은 게 있다. 표현의 절대 자유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끔찍하게 침해하는 국가대표들까지 ‘포용’하던 ‘파리 마치’ 정상들에게.
아시아 비비를 위해 라호르 거리를 행진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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