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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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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와 항문 전기고문도 당했다”

정치범의 존재도, 비판적 목소리도 인정하지 않는 군정 통치 7개월…

왕실모독법 위반을 비공개 군사재판으로 다루겠다는 타이 정부, 1심제 군사재
판에서 ‘콘깬모델’ 피의자 26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등록 2014-12-27 05:25 수정 2020-05-02 19:27
지난 1월 말 선거폭력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수감 중이던 수라킷 차이몽쿨은 타이 정치 분쟁이 낳은 정치범이다. 그가 동료 수감자들의 구타로 죽었는지, 당국의 고문으로 죽었는지, 혹은 지병으로 죽었는지는 사망 뒤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궁 속이다(왼쪽). 수라킷이 사망한 뒤 하루 만에 가족이 찍은 사진. 멍과 파인 듯 보이는 자국은 전기고문의 흔적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오른쪽). 이유경

지난 1월 말 선거폭력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수감 중이던 수라킷 차이몽쿨은 타이 정치 분쟁이 낳은 정치범이다. 그가 동료 수감자들의 구타로 죽었는지, 당국의 고문으로 죽었는지, 혹은 지병으로 죽었는지는 사망 뒤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궁 속이다(왼쪽). 수라킷이 사망한 뒤 하루 만에 가족이 찍은 사진. 멍과 파인 듯 보이는 자국은 전기고문의 흔적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오른쪽). 이유경

변방의 냄새가 풍기는 사뭇쁘라깐 지방, 방후아수안 사원에서 만난 여성인 아리 차이몽쿨(55)이 아들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젊은이의 몸은 군데군데 멍 자국 같은 게 조금 파인 듯 보였다. 동행한 변호사는 “전기고문의 흔적이라더라”며 한 의사의 말을 인용했고, 고문이 직접적 사인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덧붙였다.

아리의 아들 수라킷 차이몽쿨(36)은 지난 8월28일 방콕 리맨드 감옥에서 사망했다. 교화부 장관 위띠야 수리야웡은 이날 “오전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천식 악화 때문”이라 했고, 교도소 의사는 당뇨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부검에 참여했던 의사 살랏탐 토지랑칸은 심한 장내 출혈과 혈소판 수축이 사망에 이르게 한 것 같다는 소견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교도 당국은 고문사를 일축했지만 아리는 비교적 건강했던 아들이 맞아 죽은 거라 거의 확신했다. 사인이 밝혀지기 전에는 화장하지 않겠다고 고집해온 어머니는 결국 사망 석 달 만인 11월30일 아들을 보내줬다.

“레드셔츠는 전부 죽여버리겠다”

택시기사 수라킷은 따지고 보면 ‘정치범’이다. 지난 1월26일, 조기 총선을 한 주 앞두고 부재자투표가 있던 날 수라킷이 연루 혐의를 받아온 폭력사건이 발생했다. ‘선거보다 개혁 먼저’를 외치던 반정부 시위대의 일부가 방콕 방나 지역에서 투표를 방해하던 중, 시위대 지도자 수띤 따라틴이 괴한의 총격으로 쓰러졌다. 옥중 사망한 수라킷은 바로 수띤을 살해한 혐의로 7월8일 체포됐다. 그는 근처 사원에 투표하러 갔을 뿐 살해 현장에는 얼씬도 안 했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아리가 아들을 마지막으로 면회한 건 옥사 7일 전인 8월21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라킷은 ‘유닛1’에 수감 중이었다. 유닛1에는 기소 전 단계의 초기 수감자가 많고, 무죄 추정의 원칙으로 보면 다수가 ‘무죄수’다. 반면 ‘유닛4’에는 장기 수감에 잔뼈가 굵은 ‘재소자 마피아’가 많다는 게 변호사들의 설명이다. 아리는 “교도관이 나를 유닛4로 보내려 한다”며 겁에 질려 있던 아들의 모습을 기억했다. 감옥 내의 누군가가 “레드셔츠는 전부 죽여버리겠다”고도 했단다. 수라킷이 어머니에게 보석 신청을 바란 것도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보석은 거부됐고 8월28일 아리는 아들이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수라킷이 다른 재소자들로부터 구타를 당했는지, 고문으로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좁은 감방에 50∼60명이 몸을 구겨 생활하는 현실부터 시사하는 바가 없진 않다. 극도로 무르익은 정치 갈등 탓에 왕실모독법 위반 수감자를 포함한 정치범들을 일반 재소자와 섞어놓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타이인권변호사협회(TLHR·이하 인권변협)가 ‘정치범을 다른 범죄자들과 분리 수감할 것’ ‘기소 전 수감자와 기소된 이들을 함께 두지 말 것’ 등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군정은 7월 중순부터 ‘정치범 감옥’이라 불렸던 (방콕 북부) 락시 교도소 수감자들을 다른 교도소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2010년 선거 실시를 요구하다 유혈 진압을 당한 레드셔츠들이다. 이듬해 총선에서 레드셔츠의 압도적 지지로 승리한 잉락 친나왓 정부는 국가화해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2012년 1월부터 정치범을 별도 수감해왔다. 또한 잉락 정부는 정치범으로 인정치 않던 왕실모독법 위반 수감자도 다른 죄수들과 분리 수감해왔다. 그러나 11월4일, 군정의 법무장관 파이분 쿰차야는 락시 감옥 폐쇄를 공식화하는 명령 402호를 발동했다. “락시 감옥을 따로 관리하느라 매년 100만밧이 든다”는 게 이유였다.

100일간 571명 연행, 80명은 구금 위치 묘연

계간지 (‘같은 하늘’이라는 뜻) 편집장 타나폰 요사쿨(41)은 군정에 두 번이나 구금당한 뒤 풀려났다.

“합법적 시사지의 발행인이어서 그런지 고문은 없었다. 그러나 ‘무기 소지’나 ‘(정치)폭력’ 혐의로 구금된 이들은 고문에 노출되는 것으로 안다.”

타나폰은 쿠데타 다음날인 5월23일 시위 참여로 처음 구금됐고, 7일 만에 양해각서(MOU)에 서명한 뒤 풀려났다. “나가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구를 보지도 않고 서명했단다. 그러나 석방은 섬한 경고를 동반했다.

“이번에는 점잖게 풀어주지만 한 번 더 반쿠데타 시위를 하거나 왕실 모독성 글을 올리면 폭력적 대응을 각오하라.”

이런 경고에 아랑곳없이 군정 비판을 멈추지 않던 타나폰에게 7월5일 한 군인이 커피 한잔을 하자며 카페로 ‘초대’했다. 그러고는 방콕 사남빠오 구역 제2근위대로 타나폰을 넘겼다. 군은 페이스북 대문글을 문제 삼았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달린 아주 작은 방에서 24시간 감시당했다. 첫 구금 때와 달리 휴대전화는 사용할 수 없었고 심리적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타나폰은 5일 만에 각서에 서명하고 재석방됐다. 그러나 그의 군정 비판은 멈출 줄 모른다. 10월 하순 방콕 출판박람회장에 부스를 차린 그는 민감한 이슈를 다룬 매거진은 물론 왕실 모독의 소지가 있다며 경고받은 티셔츠까지 판매했다. “무섭지 않다”는 그의 대답엔 주저함이 없었다.

정치범의 존재도, 비판적 목소리도 인정하지 않는 군정 통치 7개월이 흘렀다. 영장 없이 7일간 구금할 수 있는 계엄령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고 표현의 자유는 살얼음판 위에서 재갈 물려 있다. ‘옥중 의문사’로 남은 수라킷의 사례, 온·오프라인으로 감시당하는 타나폰의 사례 모두 이런 시국을 가늠케 하는 바로미터다.

“구금이 행복했다”던 활동가, 망명한 뒤

쿠데타 직후 심상찮게 돌아가는 인권 상황에 긴급 결성된 인권변협 자료를 보자. 쿠데타 이래 소환이 집중된 100일 동안 총 571명이 잡혀왔다. 이 중 80명은 구금 위치가 묘연했고 면회도 불허당했다. ‘미란다 원칙’을 고지한 경우는 없었다. “‘태도 교화’를 위한 것이라 변호사는 필요 없다”는 게 군정의 설명이다. 심리적·물리적 고문을 당했다고 보고된 사례는, 9월 중순 현재 14명이다. 이후 수정된 수치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첫 번째로 고문을 폭로한 이는 레드셔츠 활동가 크릿수다 쿠나센이다. 5월28일 연행된 뒤 29일간 ‘실종’ 상태나 다름없던 크릿수다는, 6월 말 군인들에 둘러싸인 채 기자들 앞에 나타나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구금이 행복했다.” 그러나 8월 초 외국 망명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크릿수다는 고문을 폭로했다. ‘옷이 벗겨졌고, 눈이 가려진 채 목욕도 (여성으로 추정되는) 다른 이가 시켜줬으며, 질식할 뻔했다”는 것.

독립언론 가 10월 ‘단독’ 보도한 옥중 인터뷰는 좀더 심각한 내용을 담았다. 지난 2월 반정부 시위대 현장에 수류탄을 투척한 혐의로 구속된 냉장고 수리공 찻차완 프라방룽(45)은 7월 아내와 함께 50명의 무장군에 의해 치앙마이에서 연행됐다. 아내와 떨어지고, 눈이 가려진 채 모처로 끌려간 그는 손이 뒤로 묶인 채 2명의 마스크맨으로부터 4시간가량 구타당했다고 말했다. 그 뒤 지하실로 이동해, 항문과 성기에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덧붙였다.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자 비닐봉투를 머리에 씌워서 숨이 막혔다. 고문관이 내 입안에 권총을 넣기도 했다.”

결국 찻차완은 혐의를 ‘인정’했다.

“쿠데타 뒤 구속된 사람 중 다수는 (지난해 말 이래 7개월간 지속된) 반정부 시위대의 현장 폭력에 연루된 이들이다. 증거 불충분으로 체포하지 못하다가 계엄령하에서 일단 체포해 구금하는 것이다. 고문으로 자백을 유도할 가능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권변호사 파위니 춤스리의 말이다. 계엄령 10년을 넘긴 타이 남부 분쟁에서 인권변호를 맡아왔던 파위니는 “마치 10여 년 전 남부 분쟁 초기 상황과 같다”며 혀를 찼다. 오랜 노력 끝에 남부는 비밀구금이 줄었는데, 같은 요구를 지금 방콕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남부에서는 민간인이 군법에 회부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방콕에선 계속 일어나고 있다. 민간인 군법 회부는 계엄령이 아니라 5월25일 군정이 발동한 명령 37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5인 이상 집회 금지 조항을 어긴 자, 군정 소환에 불응한 자, 선동 교란을 금한 형법 제116조를 위반한 자나 왕실모독법(형법 제112조) 위반자 모두 군법 재판감이다. 10월 중순 기준으로, 쿠데타 이후 정치 사안으로 기소된 102건의 사례 중 군사재판에 회부된 것은 69건, 민사는 33건이다.

102건 중 군사재판 69건, 민사 33건

12월17일 오전 군사재판정에 선 ‘눗’이라는 예명의 활동가는 군정 소환에 불응한 경우다. 그러나 그는 이미 6월7일 군정에 연행돼 구금당하다 풀려난 적이 있다. 군정은 6월28일 그를 다시 연행해 5월 말 소환에 불응한 ‘죄’를 물어 군사재판으로 넘겼다.

영화 〈헝거게임〉 상영관 앞에서 세 손가락 시위로 연행된 뒤 풀려난 대학생 나차 공구돔. 풀려난 뒤에도 반쿠데타 시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차는 트랜스젠더 학생운동가다. 최근 자신을 미행하던 사복경찰이 “너를 강간하러 따라다닌다”고 한 말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유경

영화 〈헝거게임〉 상영관 앞에서 세 손가락 시위로 연행된 뒤 풀려난 대학생 나차 공구돔. 풀려난 뒤에도 반쿠데타 시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차는 트랜스젠더 학생운동가다. 최근 자신을 미행하던 사복경찰이 “너를 강간하러 따라다닌다”고 한 말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유경

5년 전에 올린 게시물로 왕실모독법에 걸린 (Thai E-News) 편집장 눗 렁웡도 쿠데타 뒤 기소자라 처음부터 군법에 넘겨졌고 최근 4년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잘못을 인정했기에 감형을 받았다. 군정은 쿠데타 이전 왕실모독법 사례까지 모두 군사재판으로 옮기겠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11월13일에는 ‘공공의 도덕성 유지를 위해’ 왕실모독법 군사재판을 비공개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왕실모독법 사례를 밀착 모니터해온 법률 비정부기구 ‘아이로’(iLaw)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왕실모독법 고발건은 역사상 가장 많이 급증하고 있으며, 재판으로 넘어간 5개 사례 중 4건이 비공개로 진행 중이다. 아이로는 왕실모독법의 형량이 군정하에서는 평균 9.5년으로, 민간 정부하의 평균치인 4.4년보다 2배 길다고 분석했다.

군사재판에 대한 우려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군사재판법(Military Court Act) 제36조와 제61조는 1심제를 못박아놓았다. 한 번의 판결로 목숨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현재 ‘테러리즘 음모’로 군법에 회부된 동북부(이산) 레드셔츠 조직사건, 일명 ‘콘깬모델’ 사건 피의자 26명이 최고 위험군이다. 이 사건의 변호인 중 한 명인 위나왓 찻몬트리는 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말도 안 되는 (조직)사건”이라고 못박았다.

“테러리즘 혐의를 전면 부인한다. 무고한 농민과 실업자(대부분 40~70대)를 가둬놓고 무장봉기를 모의했다, 전쟁무기·불법무기를 소지했다고 하는데 증거가 없다. 첫 연행이 발생한 5월23일 군은 22명이 모여 있던 아파트와 그들 차량에서 2시간 동안이나 ‘증거물’을 뒤졌다. 나온 건 싸구려 라디오뿐이다.”

위나왓 변호사가 무엇보다 우려하는 건 이 사건이 군법에 회부됐다는 점이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항소가 가능한 민사법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게 급선무라고 그는 강조한다. 실상 인권변협이 설명하는 군사법원 수준은 공정한 재판이 원천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조사와 기소 과정 모두 군장교들과 군판사들이 전권을 쥐고 있다. 재판관 3명 중 1명만이 법조계 배경을 갖고 있고 나머지 2명은 그냥 군장교다. 독립적이고 공정한 재판은 기대하기 어렵다.”

안정을 찾은 듯 보이는 방콕의 일상이 불편한 건 그래서다. 대학 캠퍼스 안에서 군용 트럭과 군인들이 어슬렁거리는가 하면, 강요된 침묵과 무력 앞에 엎드린 반쿠데타 진영은 침묵 아니면 뒷담화만 풀고 있다. 반쿠데타 정서가 강한 동북부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 보인다. 방콕에서 소환 대상자가 ‘공식 발표’되던 무렵 두세 달간 지방에서는 소환 통보 없이 조용히 체포됐고, 현장은 급습당했다. 물론 방콕에서도 ‘비공식’이 없진 않았다. 현재 한 서방국가에 망명 중인 시롯(가명)의 경우가 그렇다.

주로 온라인상에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해왔던 시롯에게 한 군인이 전화를 걸어온 건 6월 초다. 어느 부대로 출두하라는 구두 명령이었는데 위압적이었다. 며칠 뒤 전자우편이 날아왔다. “왕실 모독성 글을 멈추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세 손가락 들면 잡혀가는 ‘타이 디스트릭트’

“신변에 위협을 느껴 부모님 집으로 옮긴 뒤 숨어 지내다 조용히 떠났다.”

엄청난 시차 너머 기자와 장시간 통화한 시롯은 민주주의가 쿠데타로 유린돼온 모국의 역사에 분개했다. 레드셔츠 시위에는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지만 올해 초 ‘내 투표를 존중하라’(Respect My Vote) 시위에는 참여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망명지에서 레드셔츠 망명자들과 정기적 모임을 열고 있다.

11월23일 저녁 8시께 민주탑 부근에서 만난 아케 오타곤(34)은 바로 시롯이 참여한 ‘내 투표를 존중하라’ 캠페인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지난 1월, 민주당의 ‘반부패’ 기자회견장에서 아케는 “내 투표를 존중하라”를 외치며 깜짝시위를 벌였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반년의 기점을 막 돌아선 저녁 나절, 아케는 영화 상영관 앞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다 연행된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 민주탑 부근으로 나왔다. 세 손가락 경례는 ‘반쿠데타’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은 금지된 동작이다. 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터뷰에 응한 용감한 아케, 그런데 오금이 저린 모양이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고, 권력자들은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며….” 또렷하게 내뱉었지만 이렇게 시인하고 만다. “근데 솔직히, (지금이라도) 저들이 날 잡아가지 않을까 두렵다.”

사뭇쁘라깐·방콕(타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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