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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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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매해 정부 예산 12% 지원하는 ‘마을법’ 통과
“글로벌 경제 위협에서 마을과 풀뿌리 경제 지키겠다”
등록 2014-02-20 08:37 수정 2020-05-02 19:27
인도네시아 중부 자와주 바뉴마스에 있는 칼리추팍 마을회관에서 지역 예술단체 파쿠마스 단원들이 ‘마을법’ 통과를 자축하는 전통예술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인도네시아 중부 자와주 바뉴마스에 있는 칼리추팍 마을회관에서 지역 예술단체 파쿠마스 단원들이 ‘마을법’ 통과를 자축하는 전통예술 공연을 펼치고 있다.

땡볕이 쏟아지는 한낮, 중부 자와주 바뉴마스 칼리추팍 마을회관에 검은 반팔 티셔츠를 맞춰 입은 40~50대 남자들이 모여 앉았다.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달뜬 표정이다. 지역 토속 자와어로 ‘고유의 문화를 기억하라’(Eling-eling Wong Eling Baliya Maning)라는 구호가 흰색과 빨간색으로 쓰인 검은 티셔츠 한쪽에는 지역구 의원의 사진이 나란히 박혀 있다. 4월9일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선거캠프인가 싶지만 이들은 바뉴마스의 전통 공연예술 에벡(Ebeg)을 계승하는 지역 예술단체 파쿠마스 소속 공연예술가들이다.

“도농 격차 획기적으로 줄일 법안”

“많은 주민들이 마을법 시행만을 기다리고 있다.” 검은 티셔츠 대표로 마이크를 잡고 선 농민 에스카 마렐라의 말이다. 지난 1월26일 30℃를 웃도는 습한 무더위에 이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티셔츠 속 얼굴인 투쟁민주당(PDI-P) 부디만 수잣미코 의원과 얼마 전 의회에서 새로 통과된 ‘마을법’이었다.

마을법은 인도네시아 전국 7만2944개 모든 마을이 개발기금으로 매년 정부 예산의 12%를 배정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으로 지난해 12월18일 스나얀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부디만은 마을법과 농업개혁을 공약하고 2009년 의회에 입성한 뒤 마을법안이 2011년 국회에 공식 발의돼 지난해 12월18일 통과될 때까지 마을법안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입법의 중심 역할을 한 이 지역 출신 정치인이다.

공연예술단체 파쿠마스는 마을법 통과 직후 올 초 지방정부에서 단체설립 허가증을 발급할 때까지 지난 10여 년을 무허가로 버텨왔다. 부디만 의원팀의 수마트라섬 바탁 출신 자원활동가 배리는 “수하르토 신질서 시대의 잔재가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 시골에서 단체를 조직해 지방정부의 인가를 받는 것이 어렵다. 많은 관료가 규모나 성격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조직을 잠재적 반정부 기구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날 에벡 무용수들은 대나무로 넓적하게 얽어 만든 말 모형을 들고 전쟁에 나가는 전사가 말을 탄 채 으쓱이는 몸짓으로 시작해, 고대 자와의 정령 숭배 흔적을 보여주는 접신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공연을 선보였다. 10년간 에벡 보전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온 바뉴마스 자문회 수헤르만은 공연 말미 무아지경에 빠진 무용수들이 짐승처럼 생닭과 꽃, 어린잎을 태운 연기를 마시며 접신하는 대목에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을법을 통해 우리 지역의 개성과 전통을 살린 문화예술 사업이 마을의 든든한 관광 수입원이 될 것 같다”고 기대했다.

주민 수만 명 원정 시위 끝에 법안 쟁취

부디만 의원은 칼리추팍에 모인 주민들에게 “농민들이 도시의 사무·생산직 노동자에 뒤지지 않게, 자라온 땅과 문화를 잃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방법을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도시에서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전자우편을 보내며 한두 시간 일하면 100만루피아(약 10만원)를 버는 건 일도 아니며 농민들이 도시 노동자에 비해 정보기술(IT) 혜택에서 소외돼 있다는 내용의 부디만 의원의 연설을 듣던 검은 셔츠 농민과 마을 주민 20여 명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박수를 치며 그의 말에 빠져드는 눈빛이었다.

욕야카르타 가자마다대학 시절 수하르토 집권기 민중민주당(PRD)을 조직했다가 투옥당했던 1990년대 대표적 학생·주민운동가인 부디만 의원은 의회에서 지역과 농가 빈곤 문제에 끈질기게 매달려온 의원으로 유명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전체 빈곤 인구의 60% 이상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으며 수도와 지방, 자와섬과 비자와섬 간 빈부 격차 극복이 오랜 과제다. 마을법은 ‘세계화와 글로벌 경제의 위협으로부터 마을과 마을의 풀뿌리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개요로 시작된다.

법안은 의회 논의 과정에서 매년 마을에 배정할 예산 규모와 법 시행의 핵심 전제인 마을의 IT 보급·활용이 가능한지를 두고 긴 논쟁이 있었다. 2012년 통과를 목표로 발의됐던 마을법안은 입법을 요구하는 마을 주민 수만 명의 자카르타 원정 시위가 몇 차례 이어진 뒤 3년 만에 통과됐다.

“이제는 지역 개발을 위해 중앙정부만 바라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자카르타 남부에 거주하는 북부 술라웨시 마나도 출신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 데브라의 말이다. 그는 “우리 동네만 해도 7천만루피아면 고칠 수 있는 도로가 19년째 방치돼 있는데 이제 마을법이 통과됐으니 1년 내에 동네 숙원사업이 해결될 듯하다”며 웃었다. 인도네시아 일간 의 프라모노 정치사회팀장은 부디만의 마을법에 대해 “조금 과장해 2009~2014년을 통틀어 의회가 가장 잘한 일은 마을법을 통과시킨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최대 일간지 등 주요 매체들도 법안 통과에 대해 ‘마을 개발과 관련해 획기적으로 진일보한 법’이라고 평가했다.

반둥에서 만난 수르야대 공과대학의 오키 교수는 “인도네시아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국책사업과 정책이 많지만 위에서 기획해 아래에 적용하는 ‘헬리콥터뷰’(Helicopter-view)다. 마을법은 마을에서 필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정해 기획·추진할 수 있는 보텀업(bottom-up) 시스템이라는 점이 혁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2025 경제개발 마스터플랜’(MP3EI)을 ‘헬리콥터뷰’ 사업의 대표 사례로 비교했다. 오랜 부침 끝에 통과된 마을법은 입법과 함께 추진된 ‘1천 개 마을 홈페이지 만들기 운동’을 통해 특히 시골 농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소수민족 전통마을은 예산 배정에서 제외

인도네시아 여론조사기관 LSI의 도디 암바르디 소장은 과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선거를 앞두고 마을법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국민각성당(PKB),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 PDI-P 등이 법 실행을 위해 표를 달라고 나설 만큼 마을법을 정치적 영향력 확장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마을법 통과 본회의에서 마을법특위 위원장이 위원회 소속 의원의 이름과 지역구를 언급했는데 법안 통과 총회에서 지역구를 언급하는 것은 전에 없던 경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골카르당 누디르만 무니르 의원은 마을법을 “소외돼 있던 지역 주민을 중심에 둔 좋은 법이지만, 여전히 자와 중심적”이라고 평가했다. 행정단위로 분류되지 않는 각지의 소수민족 전통마을은 예산 배정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글·사진 이슬기 통신원 skidolm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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