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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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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내버린 글자, 왜 그렇게까지 할까

‘유홍준과 그 친구들’을 따라가본 교토 답사
가쓰라 별궁 비평이 극과 극으로 부딪치는 답사객들과 신라 도래인의 설명을 파버린 고류지 비석을 보고 갸우뚱하다
등록 2014-01-11 06:05 수정 2020-05-02 19:27
고류지 태자전 앞 비석. 창건자 이름 앞에 수식어로 보이는 몇 글자가 지워져 있다(왼쪽).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 희생자들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 민가 옆에 거의 방치돼 있다.

고류지 태자전 앞 비석. 창건자 이름 앞에 수식어로 보이는 몇 글자가 지워져 있다(왼쪽).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 희생자들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 민가 옆에 거의 방치돼 있다.

2013년 12월21일, 일본 교토 남쪽 우지시에 있는 11세기 중반 헤이안시대(794~1185) 불교사원 뵤도인(平等院) 가는 길 전세 관광버스. 마이크를 쥔 건축가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일본 현대건축사를 훑어내리며 “1980년대 말 이후, 본질(내용)보다는 재료·모양새 등 코즈메틱(Cosmetic·외형적 분장)에나 신경 쓰는 일본 현대건축”에 대해 혹평했다. 그러더니 전날 본 17세기 에도시대의 건축 가쓰라 별궁(桂離宮·가쓰라리큐)을 극찬했다. 안도 다다오 등 일본 건축가들, “울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다는 일본 망명 독일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를 비롯해, “우리가 추구하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며 경탄했다는 르코르뷔지에, 프랭크 라이트,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데어로에 등 서양 유명 건축가들 얘기까지 인용한 승 대표는 “실제로 본 가쓰라 별궁은 그 이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긴장과 이완이 절묘하게 배합된 가쓰라 별궁이 있는 한 “일본 건축은 망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로 강의를 끝냈다.

“건축가는 책을 안 본다”며 승 대표를 은근슬쩍 자극했던 지은이 유홍준 교수가 호명한 다음 강사는 오찬욱 명지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일본 중세문학). 버스 앞쪽 간이 강단에 선 오 교수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마주 앉은 30여 명의 좌중을 향해 “너무 큰 기대를 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가쓰라 별궁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했다. 좌중은 아연 긴장했다. 바로 전에 격찬을 들었는데. 같은 대상을 두고 오 교수는 ‘표절’이라는 말까지 썼다. 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온갖 것을 짬뽕해놓은 느낌을 받았다면서 17세기 에도시대의 신기하고 예쁘고 멋진 것(기레이 모노)을 좋아하던 돈 많은 상인들의 취향이 반영된 그 건축물이 천박했다고 쏘아붙였다. 이거, 분위기가 심상찮은데?

파내고 매끈한 돌을 파넣다

우지 탐방의 또 다른 대상인 헤이안시대 중기의 장편소설 (源氏物語). 박물관 해설 담당자인 오 교수의 가쓰라 별궁 품평은 뒤이은 얘기와 목적지 도착 때문에 중단됐다.

그 전날인 12월20일, 2박3일(12월20~22일)의 ‘유홍준과 그 친구들’의 교토 답사 첫날. 일본 ‘국보 제1호’(지금은 국보에 번호를 달지 않는다고 들었으나 입장권에는 분명 그렇게 박혀 있었다)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 교토 우즈마사의 고류지(廣隆寺)에 갔다. 7세기에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 불교를 받아들여 지금 ‘일본’의 토대를 쌓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지은 7대 절의 하나인 고류지는 반가사유상이 안치된 신레이호텐(新靈寶殿)은 물론 그 앞의 태자전 입구부터 사진 촬영을 금했다. 건물 내에서는 사생(스케치)도 허락지 않았다. 일본에선 일본 규칙에 따르라(It’s a Japanese Rule!)는 그들의 태도가 때로 약간은 불편했다. 고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고류지는 한산했다. 주말 대낮인데도 사람의 그림자를 찾기 어려웠다. 태자전 앞 ‘廣隆寺’라는 제목의 비석 첫머리에 ‘스이코(推古) 천황 11년(603)에 하타노가와카쓰(秦河勝·진하승)가 쇼토쿠태자로부터 불상을 하사받아 지은 야마시로노구니(山城國·교토의 옛 이름)의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창건자 ‘秦河勝’ 이름 바로 앞에 그를 수식한 것으로 보이는 몇 글자를 없애버린 흔적이 있었다. 원래 있던 몇 글자를 파내버리고 거기에 꼭 맞도록 다듬은, 글자 없이 매끈한 돌을 박아넣은 자국이 선명했다. 진하승이 신라에서 온 ‘도래인’이며 그의 어릴 때 이름이 ‘광륭’(廣隆)이었다는 자료를 봤다. 거기에 따르면 진(일본어로는 하타)씨는 6세기에 신라에서 교토로 건너가 댐을 쌓고 광대한 농토를 만들었으며, 선진 기술인 양잠과 비단 직조, 양조(답사팀은 술의 신을 섬기는 인근의 마쓰오(松尾) 신사도 둘러봤다)업까지 손대 거부를 축적한, 당시 최고로 성공한 도래인이었다. 그는 쇼토쿠태자의 브레인 역할을 하면서 헤이안시대의 토대를 닦은 당대의 실력자였다. 에 그 근거가 명기돼 있다.

파내버린 글자는 ‘조선반도에서 온’ 또는 ‘반도에서 온 도래인’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를 추론해낸 사람은 조선통신사를 비롯한 한-일 관계사를 솜씨 좋게 설파하는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였다.

비석 건립 연도가 쇼와(昭和) 45년, 즉 1970년인데 글자를 도려낸 건 언제일까. 아마도 냉전 종결 뒤 일본 ‘우경화’가 현저해지면서 이른바 ‘자유주의사관’ 같은 국수주의 역사관이 득세하는 1990년대 중반 이후가 아닐까. (그날 단 4명만 입장 허가를 받은 가쓰라 별궁에 가느라 고류지에 가지 못했던 유 교수는 나중에 1985년까지 문제의 글자가 그대로 있었으며, 그 내용은 ‘신라에서 온’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1985년까지 그대로 있었는데

일본 위키피디아에서 ‘진하승’을 찾아봤더니 “진씨는 6세기께 한반도를 경유해서 일본열도의 왜로 건너온 도래인 집단”으로 돼 있었다. 고대 이래 물건이나 사람이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정하기 어려울 때, 일본인들은 흔히 ‘한반도 경유’라는 말을 쓴다. 한반도는 일본으로 가는 통로였을 뿐이라는 얘기다. 대륙 문화를 나름대로 변용하고 재창조한 한반도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의 발로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 문화를 무시한다”고 유 교수가 일본편(규슈와 아스카·나라 2권)에서 갈파했지만,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12월21일 뵤도인에 가기 전, 석 달 전부터 관람 신청을 해야 하는 가쓰라 별궁처럼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하는 교토 고쇼(御所)를 거쳐 도지(東寺)로 갔다. 8세기 말 나라시대(710~794)를 끝내고 천도한 뒤 1855년에 마지막으로 재건되기까지 여러 차례 불타고 다시 지은 교토 고쇼엔 한반도를 침략한 다이쇼(大正)와 쇼와가 즉위식을 치른 시신덴(紫宸殿)이 있다.

9세기 나라에서 헤이안쿄로 천도할 때 사이지(西寺)와 함께 건립돼 17세기 중반까지 여러 차례 소실과 복원, 수리를 거친 도지에는 일본식 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55m 높이(고탑 중 최고 높이)의 5층 목탑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원한 금당, 그리고 범천과 제석천, 부동명왕(不動明王), 약사여래 삼존불 등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급 대형 목조각품들이 보존돼 있다.

그날은 마침 매월 21일에 열리는 유명한 고보이치(弘法市) 당일이어서 널따란 도지 경내를 뒤덮은 1천여 개의 노점상 천막과 연20만 명이 넘는다는 상인, 구매자, 국내외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고보(홍법)는 이 절을 본격적으로 키운 헤이안 초기의 대당 유학승 구카이(空海·774~835)의 시호 고보다이시(홍법대사)를 가리킨다. 당에서 진언밀교(眞言密敎)를 들여온 그는 일본 진언종의 개조가 돼, 역시 비슷한 시기의 대당 유학승으로 천태종을 들여와 엔랴쿠지(延曆寺)에서 일본 천태종을 연 사이초(最澄)와 함께 나라불교 시대를 마감하고 헤이안불교 시대로 가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 목조불 다수가 많은 팔이 달린 천수관음이나 험상궂은 자태의 부동명왕, 얼굴이 여럿인 범천처럼 한국 불상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지닌 것은 밀교적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목조불들이 1천 년이나 건재했다니!

이번 답사에 동행한 조계종 반야사 주지 원욱 스님은 염불 등 입(말)으로 하는 수행을 중시하는 진언(참된 말씀, 즉 부처님 말씀)종의 특징을 참선과 화엄 중시의 한국 선불교도 갖고 있다면서, 실제로는 70% 이상이 진언을 수행하는 한국 불교가 공식적으로는 이를 부정하는 것은 밀교 부정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고 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맑고 강단 있는 여승 원욱 스님은 정면 기둥 사이가 33개여서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로 불리는 렌게오인(蓮華王院)에서 십일면 천수천안 관세음 등신대 목조불 1천 개와 그 중앙의 큰 관음상을 보느라 줄을 선 관람객 속에서 ‘반야심경’을 소리 내어 읊고 마지막 후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가자, 가자, 피안(극락)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를 합창으로 이끌었다. 스님은 전에도 그런 시도를 했으나 그곳 일본 스님들이 허락하지 않아 불발로 끝난 적이 있다고 했다. 이번의 성공은 유홍준 답사팀의 위력 덕인가?

산주산겐도에도 1001개 관음 입상 외에 번개신과 바람신, 관음 28부 중상 등 일본 국보급 목조불이 많았다. 일본 목조불은 보통 신체의 여러 부분을 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요세기즈쿠리(奇木造) 기법으로 만들어졌는데, 한국 목조불 조성 기법도 그것과 맥이 닿아 있겠지만 조선조의 숭유배불 정책에다 전란과 외부 약탈이 많았고 복원할 여력조차 없던 근대의 험난했던 역사 때문에 그 자취가 희박한 게 아닐까.

가는 날이 장날, 도지에 도착한 날은 고보이치 당일이어서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가는 날이 장날, 도지에 도착한 날은 고보이치 당일이어서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11세기에 개창된 뵤도인 호쇼칸(鳳翔館)에 전시된 운중공양보살(雲中供養菩薩) 52체에서 일본 목조불의 진수를 봤다. 에밀레종 비천상에서 볼 수 있는 구름 문양을 올라타고 있는 여러 자태의 목조 보살상들은 발끝에서 손끝까지 몸 전체의 비례와 조화를 이루면서 솜씨 좋게 마무리돼 있었다. 경주 석굴암의 석조 관음보살상 부조의 축소판과 흡사한 자태와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 목조 보살상은 도지나 산주산겐도의 목조불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뛰어난 목조불들이 1천 년이나 건재했다니! 100번도 넘게 일본을 드나들었다는 손 교수도 한-일 관계사만 보다 이번 답사지의 걸작들은 보지 못했다며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했다. 뵤도인 중심 건물인 호오도(鳳凰堂) 지붕 꼭대기를 장식했던 청동 봉황상 머리 형상이 뜻밖의 발굴로 세상을 놀라게 한 7세기 백제 금동대향로의 봉황과 몹시 닮았다는 점도 내게는 흥미로웠다.

원욱 스님은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귀무덤(耳塚·미미즈카), 야마시로(山城)의 고구려 도래인들 절터(고려사지)에서도 독경을 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기 위해 잘라간 10만을 헤아리는 조선과 명나라 희생자들의 귀와 코를 소금에 절여 묻은 미미즈카는, 히데요시 제사를 지내는 거창한 도요쿠니(豊國) 신사 바로 앞 조그맣고 썰렁한 도로변 공원 낡은 민가들 바로 옆에 거의 방치돼 있었다. 그 기묘하고 오싹한 대비라니. 현대 일본이 제사 지내야 할 대상은 참혹한 약탈자 히데요시가 아니라 그가 유린한 죄 없는 희생자들이 아닐까.

법회 참가 비용까지 포함한 입장료

빠듯한 일정 때문에 기요미즈데라(淸水寺)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9세기 후반 헤이안시대의 전통 사찰 닌나지(仁和寺)와 15세기 중반 무로마치시대(1333~1573)의 마른 산수(枯山水·가레산스이) 정원의 걸작인 료안지(龍安寺) 둘 중 하나를 선택해 관람한 뒤 다시 모이기로 했다. 나는 망설이다 료안지를 택했다. 이미 서너 번은 가본 료안지를 택한 데는 세월이 지난 뒤 보는 료안지, 특히 유홍준 답사팀에 끼어서 보는 료안지는 어떻게 다를까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2m 남짓한 높이의 직사각형 벽을 배경으로 섬을 형상한 몇 개의 이끼 낀 크고 작은 바윗덩이와 흰 자갈돌을 깐 게 전부인 료안지 정원.

이번 료안지 답사에서는 안병주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관련 문헌과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방장 옆 병풍에 데라니시 겐잔(寺西乾山·1860~1945)이라는 유학자가 갈겨 쓴 도연명의 ‘음주’(飮酒) 등을 해설해 예전과는 더욱 느낌이 달랐다.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 따며),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편안히 남산을 바라본다)의 경지를 어찌 알까마는, 그래도 이번엔 확실히 좀 달랐다. 료안지 정원의 초기 형태(원형)를 보여주는 사이호지(西芳寺·고케데라(苔寺), 즉 이끼절이라고도 한다) 정원과 주변 수백 평을 뒤덮고 있는 푸른 이끼의 세계를 보기 위해 우리 일행은 1인당 3천엔의 입장료를 내야 했다. 알고 보니 거금의 입장료는 그날 그 절의 법회 참가 비용까지 감안한 것이었다. 정원만 보겠다는 사람들에겐 300엔 정도 받으면 적당할 텐데,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헌납한 셈 치면 나쁠 것 없지 않은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흘 뒤 다시 간사이 공항행 버스에서 총괄적 소감을 강요(?)당한 안병욱 전 가톨릭대 사학과 교수는 뵤도인 목조불을 거론하며 같은 시기에 만든 한반도의 석불·청동불을 떠올렸다. 우수한 목조불은 뛰어난 장인 한두 명이 출현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장인의 조각 솜씨를 바탕으로 한 틀에 금속을 녹여 부어 만든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나 대장경 목판 제작이 기술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하나만 보지 말고 두루 생각하자고 그는 말했다.

모두가 돌아가며 소감을 피력하기 전 답사 총평을 하면서, 유 교수는 승 대표와 오 교수의 엇갈린 가쓰라 별궁 품평이 야기한 긴장(?)을 이렇게 매끄럽게 해소했다. 본질을 망각한 채 경박해지는 현대건축에 회의적인 승 대표는 도심에서 자연을 절묘하게 재현한 일본 전통 건축의 장점을 있는 그대로 보고 감동한 것이고, 오 교수는 자신의 전공인 일본 중세문학의 세계를 가쓰라 별궁에 적용해서 본 것이다, 말하자면 오 교수의 실망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 정통한 사람이 르네상스기 피렌체를 봤을 때의 느낌 같은 게 아니겠느냐, 승 대표의 극찬과 오 교수의 실망은 평면 비교가 불가능한 별개 차원의 것이다.

답사 때마다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동행자들에게 그림을 선사하는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과 임옥상 임옥상미술연구소 소장. 이번 답사에서 김 화백은 료안지 정원을, 임 화백은 고려사지 감나무들과 환갑이 지난 어른들의 감 따먹기 해프닝을 그렸다.

올 5월 ‘교토편’으로 출간 예정

팀 구성 자체가 탐사 대상이 될 만한 유홍준 답사팀 고정 멤버는 이들 두 화백과 안병욱 교수, 유영표 전 민주화운동공제회 이사장, 이번 답사에선 중국 학회 참석 때문에 빠진 이광호 연세대 교수(유학), 승 대표 등 서울대 문리대 67·68학번 동기들이다. 도자기 박사 윤용이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창비 편집주간인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 유 교수의 은사인 안병주 교수,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도 ‘유홍준과 그 친구들’ 고정 멤버에 가깝다. 오 교수와 손 교수는 일본 답사를 위한 특별 초청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답사 체험이 반영될 교토편은 오는 5월께 출간될 예정이다.

교토(일본)=한승동 문화부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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