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다시 드리운 쿠데타의 그림자

타이군 후원 업은 왕정주의 시위대 잉락 정부 압박
군부 전면 개입 땐 레드셔츠·진보그룹과 충돌 불가피
등록 2013-12-14 04:20 수정 2020-05-02 19:27
타이 방콕에서 스크럼을 짠 반정부 시위대가 총리 공관 쪽 으로 행진하고 있다.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국 수습을 위해 내놓은 ‘의회 해산-조기 총선’ 카드를 거부한 이들은 국왕 이 임명하는 총리와 임명직들로 구성된 ‘인민위원회’ 설립 을 요구하고 있다.

타이 방콕에서 스크럼을 짠 반정부 시위대가 총리 공관 쪽 으로 행진하고 있다.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국 수습을 위해 내놓은 ‘의회 해산-조기 총선’ 카드를 거부한 이들은 국왕 이 임명하는 총리와 임명직들로 구성된 ‘인민위원회’ 설립 을 요구하고 있다.

12월3일은 타이 반정부 시위대, 이름하여 ‘인민민주주의개혁위원회’(PDRC·People’s Democratic Reform Committee)가 잉락 친나왓 정부에 던진 최후통첩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 왕정주의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수텝 트악수반(64) 전 민주당 의원은 전날 밤 “내일은 수도경찰청으로 총집결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전 이틀간 급격히 고조되던 폭력 양상으로 보건대 사태가 최악에 이를지 모른다는 우려와 긴장이 지배한 아침은, 그러나 순식간에 반전됐다.

경찰청 앞에는 꽃을 들고 선 경찰들이 시위대를 맞이하는 진기한 풍경이 연출됐고, 묵직한 바리케이드와 철조망이 제거됐다. 총리 관저가 있는 정부청사 주변으로는 충돌 수위를 증명하듯 불에 타 널브러진 경찰 차량들과 잔해로 어수선했지만,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토닥거림과 악수가 오고 갔다. 국왕의 생일을 이틀 앞두고 양쪽은 극적으로 휴전에 합의한 것이다.

“정말 기쁘다. 그동안 잉락 정부가 믿을 구석은 경찰밖에 없었는데 경찰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줬으니 우리가 승리한 거 아닌가!”

“군은 우리 편이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사회봉사에 전념하고 있다는 시위대 차이왓(40)의 말이다. 승리라고 부를 만한 건 전혀 없었다. 시위대는 정부청사 앞마당의 잔디밭에 서너 시간 앉아 있다가 나왔을 뿐. 잉락 총리가 하야한 것도, 그들이 요구해온 ‘인민위원회’ 구성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육해공군은 진작에 우리 편이었다.”

또 다른 시위대 카셈삭(45) 역시 연신 싱글벙글했다. ‘군은 우리 편’이라는 그의 말은 착각만은 아니다. 군은 시위 과정에서 다친 시위대를 이송해 치료했고, 명령체계가 다른 경찰을 향해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도 말했다. ‘인도주의적 차원’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군에 유혈 진압을 당했던 레드셔츠 시위 현장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고 발언이다. 바로 전날(12월1일) 수텝 역시 “염려 마라. 군은 우리를 진압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피력한 바 있다. 휴전이 선포된 3일, 자신감이 더더욱 차오른 수텝은 ‘부분 승리’를 선포하고 국왕 생일인 5일 이후에 다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양쪽은 12월1일부터 군의 ‘중재’하에 물밑 협상을 해온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육해공군 총사령관과 고위 장성 18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잉락 총리는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카드를 들고나왔고, 수텝은 ‘최후통첩 이틀’로 되받았다.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 참석한 3군 총사령관 중 누구도 잉락 정부 편에 서지 않았단다. 더욱이 최근까지도 움직임과 발언을 자제하던 군이 ‘중재’ 역할을 계기로 사실상 분쟁에 개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군은 우리 편’이라고 굳게 믿는 왕정주의 시위대가 의도했던 것이 바로 ‘군의 개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시위대는 민주적 선거를 거부하고 이른바 ‘굿 맨’들로 구성된 ‘인민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민위원회’ 개념은 쿠데타나 다름없다. 타이 엘리트들은 이걸 탁신처럼 부패한 정치인이 망친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독립적 싱크탱크인 시암인텔리전스유닛(SUI)의 깐유영은 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지난 10여 년간 타이 정치는 왕정주의자·중산층 등 사회 기득권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해온 민주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할 가능성이 없음을 거듭 확인해왔다. 게다가 반탁신·왕정주의자들은 2006년과 2008년의 거리시위를 통해 각각 군사 쿠데타와 ‘헌법 쿠데타’를 유도하고 친탁신계 정권을 무너뜨린 경험이 있다. 이런 가운데 푸에아타이당이 밀어붙인 사면 법안과 헌법 개정안은 반대 세력에 ‘호기’를 제공했다. 부총리까지 지낸 수텝 트악수반과 민주당 의원 10여 명이 의원직을 사퇴하고 본격적인 정부 타도 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과거 ‘푸에아타이-레드셔츠’ 진영이 자체 TV 을 활용했던 점을 제대로 학습했다. 민주당 홍보 채널인 는 반정부 시위대의 프로파간다 채널이 되었고, 그동안 흩어져 있던 옐로셔츠 세력이 모두 모여들었다. 전 민주주의인민동맹(PAD)은 물론 우경화 노선을 택해온 학생 그룹과 ‘사면 법안=탁신 복귀’라는 논리로 중간지대에 선 반탁신 방콕 시민들까지 흡수됐다. 지난 11월24일 방콕 승리탑 광장에 모여든 10만 명 이상의 거대 군중은 그래서 가능했다.

2008년 시위 사태와 닮은꼴

여기서 잠시, 이번 시위를 촉발한 사면 법안과 헌법 개정안의 내용을 짚어보자.
사면 법안은 ‘2004년부터 2013년 8월까지’ 발생한 2만5천 건의 부패·정치사범 기소건들을 묻어두자는 안이다. 그러나 법안 초기 버전은 ‘2006년 9월19일 쿠데타 이후 2010년 5월10일까지’를 기한으로 설정해, 탁신 전 총리에 얽힌 여러 건의 기소 내용과 2010년 5월11일 이후 19일까지 가장 격렬하게 치른 레드셔츠 유혈 진압의 책임자인 아피싯 웨차치와 전 총리와 현 시위대의 수장인 수텝 트악수반(당시 부총리) 같은 이들은 사면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10월 중순 다시 제출된 수정안은 푸에아타이당의 속내를 훤히 드러냈다. ‘2004년부터 2013년 8월까지’로 사면 기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탁신 정권하에서 발생한 남부 탁바이 학살, 2010년 5월 중순 이래 레드셔츠의 마지막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 책임자들까지 사면 대상에 포함시켰다. 반면 법안은 왕실모독법 위반으로 기소된 정치범들은 처음부터 배제해왔다.
이 안은 반정부 시위대는 물론 레드셔츠 내 진보적 분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11월1일 하원을 통과했지만 11일 상원에서 거부당한 사면 법안은 결국 버려졌다. 잉락 총리는 최근 와의 인터뷰에서 이 법안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거듭 공언한 상태다.
헌법 개정안의 경우, 선출직과 임명직이 각각 반반인 상원의원 150명 전원을 선출직으로 전환하자는 안이다. 상원의원 절반은 군부가 임명하는 ‘상원의원 임명직 위원회’에 의해 임명되고, 이 위원회의 다수가 판사와 고위 공무원이다. 상원의원 임명제는 2006년 쿠데타 세력이 기안한 2007년 헌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11월20일 이 개정안이 헌법 68조, 즉 “왕실을 전복하고 반헌법적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에 위배된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진보적 법학자 모임인 니띠랏그룹의 보라쳇 파키룻 교수는 “헌재의 판결은 소수자의 독재”라고 혹평했고, 잉락 정부 역시 헌재의 판결을 거부했다. 이 점이 다시 반정부 시위대에 빌미가 됐다. ‘법원 판결을 거부하는 잉락 정부는 왕실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다.

국왕 생일을 앞두고 극적인 휴전이 이뤄진 가운데, 왕정을 지지하는 반정부 시위대가 군인과 악수하고 있다. 군이 자기들 편이라는 왕정주의자들의 믿음은 견고하다.

국왕 생일을 앞두고 극적인 휴전이 이뤄진 가운데, 왕정을 지지하는 반정부 시위대가 군인과 악수하고 있다. 군이 자기들 편이라는 왕정주의자들의 믿음은 견고하다.

현 시위 사태는 2008년의 시위 정국과 아주 많이 닮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해 여름부터 계속된 왕정주의 시위는 결국 11월 말 공항 점거로 이어졌고, 12월2일 헌법재판소가 친탁신계 집권당인 인민당(PPP) 해산을 선언한 뒤에야 잠잠해졌다. 민주당이 어부지리 격으로 여당이 되었던 일련의 과정은 ‘헌법 쿠데타’로 불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9년과 2010년 레드셔츠의 시위와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2010년 밝혀진 위키리크스 문건(케이블번호 003317)에 따르면, 2008년 왕정주의 시위대 PAD는 폭력 사태를 최대한 부추겨 쿠데타로 이어갈 계산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10월7일 PAD는 솜차이 웡사왓 신임 총리(탁신 전 총리의 매제) 정부가 정책 발표를 위해 소집한 의회를 막기 위해 의사당 주변을 봉쇄했다.
“A씨(방콕 주재 한 외교관으로 추정)는 10월6일 PAD 지도자 한 명과 저녁을 함께했는데 이 지도자가 ‘다음날(10월7일) 시위에서 폭력을 부추기면 군이 개입할 것(쿠데타 등)으로 믿고 있더라’고 말했다. 이 PAD 지도자는 20여 명 사망 수준의 폭력 사태가 발생한다면 군의 개입은 불가피하고 쿠데타는 정당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군 개입 빌미 제공하려 과격 시위?

시위대의 무리한 전술과 과도한 폭력은 이번 시위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다. 예컨대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본격화된 12월1일 정부청사 부근에서 진압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몇 차례 쏘긴 했지만, 시위대의 자극에 비하면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 시위대는 등 일부 언론사에도 몰려가 시위대 수장 수텝의 연설을 생중계하도록 압박하기도 했다. 반정부 시위대의 미디어 압박은 이미 11월25일 독일 사진기자 닉 노스티츠를 ‘친레드셔츠 기자’로 지목하고 구타했을 때부터 불길한 예고편을 내보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충돌은 고조됐고, 12월2일 경찰은 제한적으로 고무총탄을 쏘았다고 인정했다. 11월30일부터 12월2일까지 3일간 사망자 4명, 부상자는 277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망자 중 3명이 레드셔츠이고, 1명은 람캄행대학 학생이다. 그 까닭은 이들이 시위 현장에서 공권력의 진압으로 사망한 게 아니라 11월30일 람캄행대학 주변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대와 레드셔츠 간의 충돌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날 람캄행대학 옆 라자망갈라 체육관에서는 레드셔츠의 집회가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오후 6시께부터 람캄행대학 학생을 포함한 반정부 시위대는 레드셔츠를 입은 이들이나 레드셔츠로 추정되는 승객이 타고 있는 버스와 택시를 공격하고, 체육관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섰다. 독립언론 가 게재한 목격자 덱 유약 옌의 진술에 따르면, ‘10대 무리들’까지 레드셔츠를 공격하고 충돌을 벌였다.
“(저녁 7시 이후) 람캄행 거리 24번 골목을 지날 때 한 레드셔츠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가는 걸 봤다. 10대 무리들이 그녀의 (레드셔츠로 추정되는) 옷을 벗기려고 했다며. 몇 분 뒤 많은 레드셔츠들이 이 지역을 봉쇄하려는 10대들에게 맞고함을 쳤다. 그즈음부터 양쪽은 물건을 집어던지며 충돌했다.”
그날 밤 내내 간헐적 총성이 라자망갈라 주변을 휘감았다고 목격자들은 전한다. 수만 명의 레드셔츠들이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체육관 안에 갇혀 있었고, 레드셔츠 사수대와 람캄행대학 학생들은 계속 충돌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레드셔츠에게 총을 쏘던 한 40대 남성이 레드셔츠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고, 레드셔츠 비롯켐낙(43)은 초고속으로 날아온 총알에 맞아 사망했다.
“11월30일 밤 9시30분께, 레드셔츠 한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걸 봤다. 일부 옐로셔츠들이 그의 레드셔츠를 벗겨 보호하려 했지만, 다른 이들은 바닥에 쓰러진 그의 머리를 발로 찼다. 그가 구급차에 실려간 뒤 옐로셔츠들은 그의 레드셔츠를 불태우며 환호했다.”
그날 저녁 현장에 있었던 스페인 기자 카를로스 사르디나의 목격담이다. 다음날 레드셔츠는 시위를 전면 취소했고, 반정부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했다.

국왕 생일 뒤 3군 총사령관 회동

국왕 생일에 맞춰 잠시 휴전 중인 방콕에는 불안한 평화가 흐르고 있다. 일각에선 이미 과도기구의 총리 내정자 이름까지 거론하는 모양이다. 국왕 생일 이후 3군 총사령관들이 예정한 회동에 큰 관심이 쏠려 있는 이유다.
“2006년 쿠데타는 결과적으로 군부에 치명적이었다. 따라서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고 처신할 것이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타이 동북부 콘깬 지방에 본부를 두고 타이 왕실모독법과 정치 분쟁을 깊이 연구해온 학자 데이비드 스트렉버스는 과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망했다. “만일 또 한 번 쿠데타나 그와 유사한 상황이 펼쳐진다면 레드셔츠의 반응은 매우 거셀 것이다.”
“타이는 지금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전하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기득권 세력은 의회가 중단되고 과도기구가 들어서는 걸 개의치 않을 테지만 비민주적 정치를 얼마나 밀어붙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008년에는 레드셔츠도 없었고 목소리를 내는 진보적 지식인도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깐유영의 말이다.
실제로 12월2일 탐맛삭대학 총장 솜낏 렛파이툰이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지지 표시로 휴강을 선언하자, 이 대학의 젊은 교수들이 반발하고 나선 건 분명 2008년과 다른 모습이다.

방콕=글·사진 이유경 통신원 Lee@penseur21.com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