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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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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는 칼춤 추고, 공권력은 방관했다

무슬림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3월 불교도 폭동의 참상… 장검·도끼 피해 숨어든 숲 속까지 쫓아와 무차별 학살
등록 2013-10-10 16:52 수정 2020-05-03 04:27

버마 중북부 소도시 메이크틸라에서 만난 묘윈(15·가명)은 눈빛이 다부진 소년이었다.
“아니요, 울지 않았어요.”
학살의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그에게 기억을 들추며 “그래서 울었니?” 몇 차례 물었다. 이를 악문 표정으로 같은 대답이 넘어왔다.
“폭도들의 손에 죽어간 학생, 선생님 모두 제 친구예요. 절친이었던 압둘라작이 보고 싶어요.”
소년의 마지막 대답에 이번엔 기자가 이를 악물었다.
지난 3월20일 메이크틸라 타운은 괴성과 화염에 휩싸였다. 이날 오전 무슬림 금은방 주인과 불교도 손님 사이에 벌어진 언쟁이 폭력적 갈등으로 비화했고, 한 승려가 무슬림 패거리에게 살해당한 뒤 불교도에 의한 무슬림 학살이 최소 3일간 이어졌다.

제지 없이 군사구역까지 파고든 폭도

첫 이틀간 오토바이로 거리를 돌며 상황을 수시 점검했던 주민 아웅조(48·가명)는 메이크틸라로 이어진 5개 도로 중 남부도로를 제외하곤 모두 폭도들에게 차단된 걸 지켜봤다. 유일하게 열린 남부도로 위, 타운에서 자동차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지점에는 육군 99사단과 공군기지, 그리고 군인 가족들의 주거지가 있다. 폭도들은 이 ‘군사구역’까지 제지 없이 파고들었다. 부대 옆 터키 모스크를 포함해 13개 모스크 중 12개가 파괴되었다. 공식 사망자는 44명. 그러나 이 사건을 심층 기록한 ‘인권을 위한 의사회’(PHR)는 3일간 148명이 학살됐을 것으로 점쳤다. 묘윈이 다니던 히마야톨 마드라사(이슬람학교)는 학생 33명과 교사 4명이 목숨을 잃어 학살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지난 3월 불교도들의 무슬림 학살극이 벌어질 때 무차별 파괴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버마 중북부 소도시 메이크틸라의 무슬림 거주 지역. 도시에 있던 모스크 13개 가운데 12개가 파괴됐다. 폭동 뒤 만달레이 주정부는 이 구역이 정부 땅이며 아파트를 짓겠다고 했다.

지난 3월 불교도들의 무슬림 학살극이 벌어질 때 무차별 파괴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버마 중북부 소도시 메이크틸라의 무슬림 거주 지역. 도시에 있던 모스크 13개 가운데 12개가 파괴됐다. 폭동 뒤 만달레이 주정부는 이 구역이 정부 땅이며 아파트를 짓겠다고 했다.

“싸욱칼라*!”(무슬림, 이×할 놈들아!)

3월20일 저녁 7시께. 밖에서 들려오는 욕지거리에 묘윈은 공포에 휩싸였다. 무슬림 구역 ‘밍갈라자욘’에 위치한 기숙학교 안에는 교사와 학생 등 130명가량이 있었다.

밤 10시께. 부수고 불 지르는 소리가 학교 안까지 차올랐다. 교사가 문 하나를 땄고 모두 건물 뒤편 물이 흥건한 숲으로 숨어들었다. 이 중 30~40명가량은 인근 치피아르(29·가명) 집으로 숨어든 것으로 보인다.

치피아르는 그날 8시께 피난을 가려다 “괜찮을 것”이라는 마을 이장 말에 집 안에 꼼짝 않고 있었다. 전기가 나가고 폭력의 소음이 도를 넘자 2살배기 아기를 안고 아이 둘, 시어머니, 그리고 주민들과 함께 숲으로 숨었다. 남편은 집 안에 숨은 학생들을 돌보겠다며 남았다. 그게 남편과 영원한 이별이 됐다. 남편도 곧 학생들을 데리고 숲으로 빠져나온 듯하지만 다음날 백주대낮 칼부림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3월21일 새벽 4시께. 폭도들은 수백 명이 숨죽이고 있는 숲을 발견하고 진입하기 시작했다. 교사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이 근처 양계장으로 피신했지만 폭도들은 그곳까지 쳐들어왔다. 돌을 던지는 폭도들을 향해 학생들도 뭐든 집어던졌다. 묘윈은 그제야 폭도들의 모습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승려가 많이 보였어요.”

그러나 오전 8시를 넘기며 “일반인이 훨씬 많아졌다”는 게 묘윈의 설명이다.

잠시 목격자들이 증언하는 폭도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마을의 터줏대감 아웅조는 동원된 ‘선봉대’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금은방 논쟁 직후 흥분만 하던 불교도들이 괴성을 지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자 순식간에 난장판에 동참했단다. 그리고 자신이 목격한 두 대의 차량이 수상했다.

폭력 선봉대가 동원됐다?

“3월21일 오후 2시30분께였다. 하얀색 15인승 트럭 한 대가 티리밍갈라 모스크 근처에 주차돼 있었고, 또 한 대의 트럭은 챔피온(카페) 근처에 있었다. 차량번호판은 없었고, 낯선 이들이 그 안에 타고 있었다. 눈동자도 풀려 보였고….”

메이크틸라 학살 뒤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무슬림 난민들은 언제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만달레이주 안에 설치된 4개 난민촌에는 무슬림 4천여 명이 머무르고 있다(왼쪽). 메이크틸라의 한 민가에서 무슬림 여성이 옷을 수선하고 있다. 지난 3월 학살 사건 이후 수천 명의 무슬림들은 생활 기반을 잃고 막막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메이크틸라 학살 뒤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무슬림 난민들은 언제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만달레이주 안에 설치된 4개 난민촌에는 무슬림 4천여 명이 머무르고 있다(왼쪽). 메이크틸라의 한 민가에서 무슬림 여성이 옷을 수선하고 있다. 지난 3월 학살 사건 이후 수천 명의 무슬림들은 생활 기반을 잃고 막막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3월22일 오후 ‘평화승려들’과 함께 만달레이에서 메이크틸라로 달려간 민코코(가명)는 메이크틸라를 7마일(약 11km)쯤 남겨둔 지점에서 마찬가지로 15인승 하얀 트럭 세 대가 빠져나오는 걸 봤다. 차에 타고 있던 이들은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동원된’ 폭도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3월21일 오전 8시께.

뒤늦게 나타난 경찰은 폭도 진압보다는 주민과 학생들을 소개시키는 데만 집중했다. 경찰은 이들에게 깍지 낀 양손을 머리에 올리고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보호받아야 할 이들이 마치 포로처럼 행렬하는 풍경이 연출됐다. 폭도들은 그 풍경 속을 여전히 파고들었고 경찰은 제지하지 않았다.

은 지난 4월 ‘부처의 나라 광기에 휩쓸리다’라는 기사(957호 세계)를 통해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폭력에 개입하지 말고 불이나 끄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이 지역 최고위 관료가 ‘적극적으로 방관한’ 정황을 이번 취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인허가’ 문제로 평소 정부 관료들과 안면이 깊은 무슬림 사업가 ㄱ씨에 따르면, 3월20일 저녁 만달레이 주지사 우예민은 만달레이 지방법원 수석판사와 함께 메이크틸라 타운십 사무실에 나타났다. 군경의 발포나 진압 명령이 법원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사안임을 감안할 때, 두 인물이 화염에 휩싸인 메이크틸라까지 ‘출장’ 온 이유가 ‘유사시’ 진압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후 상황은 무슬림들의 ‘저항’ 없이 불교도들의 일방적 폭력으로 흘렀다. 진압 명령도, 최루가스도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장칼과 장대, 쇠사슬, 도끼까지 들고 나온 폭도들이 경찰 앞에서 ‘칼춤’을 췄다. 경찰의 소개령에 따라 이동하던 이들마저 폭력에 노출되면서 경찰 ‘보호라인’에서 도망치는 이들마저 생겨났다. 묘윈도 이때 도망쳤다. 더 안전하다고 여긴 숲으로 돌아갔다.

묘윈의 선택은 옳았다. 경찰의 말을 따르던 주민과 학생 다수가 결국 사상자로 변했다. 이뿐만 아니라 온갖 모욕적 언사와 행위를 감내해야 했다. PHR 보고서에 따르면 폭도들은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이기도 했고, ‘승려 폭도’들은 무슬림들에게 무릎 꿇고 ‘경배하라’고도 했다.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경찰까지 있었다.

비록 남편을 잃었지만 치피아르와 나머지 가족이 살아남은 건 기적이다. 3월21일 오전, 그녀 가족 역시 숲으로 들이닥친 폭도들과 맞닥뜨렸다.

“다 죽여버려.”

숲 속보다 안전하지 못했던 경찰 보호라인

고함치는 폭도들에게 치피아르는 자신이 ‘포코쿠’(중북부 버마의 소도시·불교도 강성지역)에서 왔다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버마족 무슬림인 그녀를 폭도들은 쉽게 믿었다. 그러고는 각각 장대와 장칼을 든 폭도 2명이 치피아르 가족을 군중이 모여 있는 언덕배기로 안내까지 해줬다. 마침 군중 사이에 있던 불교도 이웃의 도움으로 시누이가 있는 곳까지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

경찰 보호라인에서 탈출한 묘윈도 목숨을 건졌다. 3월21일 오후, 숲에 숨어 있다가 메이크틸라 호수를 거쳐 인근 병원으로 가 도움을 청했다. 그때야 왼쪽 엉덩이가 칼에 찔렸다는 걸 알았다. 묘윈은 병원과 경찰의 도움으로 3월24일 가족과 상봉했다. 그가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은 눈물을 쏟았지만 묘윈은 울지 않았다. 만 이틀 동안 소년은 어떤 소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학살 뒤 5개월. 메이크틸라 타운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러나 학살 뒤 불교극단주의운동 ‘969 스티커’는 왕성하게 활동을 늘려갔다. 8월19일, 이 도시를 방문한 유엔 인권대사 토마스 퀸타나는 불교도들의 무력 제지를 받고 반강제적으로 떠나야 했다. 이틀 뒤 버마를 떠나며 연 기자회견에서 퀸타나는 이렇게 말했다.

“경찰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했던 내가 그 순간 느꼈던 공포는 3월 폭력 사태 당시 폭도들에게 쫓기던 (무슬림) 주민들이 느꼈을 공포가 어땠을지 감히 짐작하게 해줬다.”

메이크틸라·만달레이(버마)=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칼라’(Kalar)는 ‘외국인’이란 의미지만, 주로 무슬림이나 피부색이 검은 이들을 비하하는 인종주의적 표현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취재지원 리영희재단
불교 극단주의 운동가 위라투
“무슬림이 촉발한 분노가 살상극 불렀다”
‘969 운동’의 대표적 선동가인 위라투를 그가 주지승으로 있는 만달레이 마소예인 사원에서 만났다. 불편한 질문에도 불쾌해하지 않는 그는 ‘외교술’의 대가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증거 없는 확언’과 궤변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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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크틸라 사건의 한 장면부터 짚어보자. 사건 다음날 폭도들을 진정시키는 민코나잉과 한차를 타고 다녔던데.
우리가 가지 않았다면 상황이 더 나빠졌을 것이다.
-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불교도들이 화가 많이 났다.
- 그 분노 때문에 인명 살상이 벌어졌다.
양쪽 다 비난한다. 무슬림 주인이 불교도 손님에게 처신만 잘했어도, 불교도들이 분노를 조절할 줄 알았더라도. 불교는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 유엔 인권대사 토마스 퀸타나가 탄 차량이 메이크틸라에서 불교도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저지당했는데도?
퀸타나는 무슬림 편이다. ‘라카잉(아라칸) 사건’ 이후 버마인들의 분노가 나날이 더해가고 있다. 국제사회가 편파적으로 가니까.
- 아라칸주 무슬림들은 이동의 자유도 없다. 내겐 그게 편파적으로 보였다.
벵갈리들이 거기서 살고 싶으면 조화롭게 살았어야지. 로힝야연대조직(RSO)*이 폭력을 거부하고 벵갈리들은 어떤 그룹(지하디)에도 연루되지 말아야 한다.
- RSO의 주장은 착각 아니면 지나친 과장 아닌가.
울라마(이슬람학자) 같은 이들이 RSO에 연루돼 있다. 그들의 의제는 억압이다. 왜 로힝야는 근대화된 교육을 받아들이지 않나. 학교를 가란 말이다.
- 시민권도 이동의 자유도 없는데 근대 교육이 가능하겠나.
RSO는 목표한 바를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다.
- 이슬람 극단주의를 굉장히 염려하는 것 같은데, 일각에서는 불교 극단주의도 염려한다. 당신이 이끄는 ‘969 운동’ 같은.
969는 극단주의 운동이 아니다. ‘969 정책’ 리플릿이다. 읽어봐라.
- 정책집에는 여성 인권을 존중한다고 했는데, 최근 승려단이 제안한 (불교도 여성의 타 종교 남성과) ‘결혼 금지’ 조치는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다고 비판받는다.
여성을 존중하고 피부색으로 차별하지 않는 미국도 ‘국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나. 민족주의를 위해선 여성의 권리도 희생시킬 수 있다.
- ‘미물도 존중한다’는 대목도 있는데 승려들이 몽둥이와 칼을 들고 다른 이의 목숨을 해치는 건 뭔가.
어떤 사원도 대표하지 않는 승려들의 개인 행동이다.
- 당신과 ‘969 운동’이 강경파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내 배후는 권력집단이 아니라 빈민들이다. 빈민 중에서도 빈민, 그들이 나를 따른다.

*로힝야연대조직(RSO): 1980년대 초반 결성된 것으로 알려진 로힝야 무장그룹. 방글라데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존재감은 미미하고 두드러진 활동을 벌인 적도 거의 없다. 특히 아라칸주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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