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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정치의 필리핀화?

44명 연예인 내년 총선 출마 예상되는 인도네시아 ‘연예인 정치’… 정치 참여 경험 부족하고 미디어의 산업화 등 영향
등록 2013-08-14 16:02 수정 2020-05-03 04:27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잘나가는 토크쇼 진행자인 개그맨 출신 투쿨이 다리를 모으고 허리를 굽힌다. 무대 중앙으로 게스트를 청하기 위해서다. 평소 배에 힘주고 크게 내지르던 목소리도 이날은 사근사근했다. “하지(메카 순례를 마친 무슬림에 대한 존칭) 로마 이라마님과 소네타 그룹이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대부분 정당에 연예인 후보 난립
지난 6월24일, 투쿨은 민영방송 스튜디오에서 2005년부터 진행해온 인기 토크쇼 에 출연한 인도네시아 당둣(인도·아랍·말레이계 혼성의 전통 대중음악)왕 로마 이라마를 깍듯이 대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하지 로마 이라마님? 201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신다지요!” 그의 말에 암본·수라바야·자카르타 등지에서 온 방청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국민각성당(PKB) 후보로 출마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자녀분들도 PKB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면서요?” 투쿨이 물었다. “아이들이 나를 돕기 위해 총선에 나간다더군요. 국민을 위해 일할 준비가 돼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지요.” 웃음을 머금은 로마 이라마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서 또 한 번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라마단 금식월을 2주 남짓 앞둔 이날 그는 이슬람 성직자처럼 ‘금식월과 코란’에 대한 짧은 설교를 한 뒤, 자신의 당둣 히트곡 (코란과 하루), (밤새워 놀자) 등 10여 곡을 녹화방송 1회분과 생방송 1회분에 걸쳐 4시간 동안 공연했다. 로마 이라마가 출연한 2회분 토크쇼의 주제는 ‘세계로 가는 당둣’이었다.
로마 이라마는 자바와 수마트라 말레이족이 주로 즐기던 당둣을 인도네시아 전역이 주목하게 만든 인물이다. ‘당둣의 왕’을 뜻하는 ‘라자 당둣’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펀둘랑 수아라(이른바 ‘표잡이’)로 몸담고 있던 집권연정 골카르당 후보로 2014년 대선에 출마한다고 발표했다.
이내 관련 기사가 쏟아졌고, 여론의 무차별 비판이 봇물을 이뤘다. ‘이슬람 성자처럼 구는 원로 당둣 가수가 대통령을 하면 나도 한다’는 식의 비아냥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로마 이라마의 출마 선언은 인도네시아 정치 특유의 ‘연예인 정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새삼 불러일으켰다. 지난 3월 초에는 야당인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PDI-P)이 총선 공천자 명단 준비 소식을 발표하며, 1970~80년대 큰 인기를 누렸던 여배우 예시 구스만과 독특한 퓨전 재즈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가수 에도 콘돌로짓 등 연예인도 포함됐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2014년 총선 출마 심사를 통과한 정당의 후보 명단 접수를 마감한 인도네시아 선거관리위원회(KPU)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모두 44명의 연예인이 내년 총선에 출마한다. 13개 정당 가운데 연예인 후보가 없는 것은 번영정의당(PKS)뿐이다. 연예인 후보를 가장 많이 낸 국민위임당(PAN)과 PKB는 재선에 도전하는 후보들이 대부분이고, 대인도네시아운동당(거린드라)과 통합개발당(PPP)은 초선에 도전하는 ‘뉴페이스’ 영입에 공을 들였다.
‘촉망받는 정치 신인’으로 꼽히기도
총선에 나서는 연예인들은 대부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다. PAN의 간판 스타로는 ‘파트리오 트리오’라는 코미디 그룹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큰 인기를 누린 에코 헨드로 푸르노모와 영화배우 프리무스 유스티시오가 있다. 이 둘 모두 2009년에 이어 2014년 재선에 도전한다. PAN에서 새로 내세운 연예인 후보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인기 여배우인 데시 라트나사리와 1980년대 인기 영화배우 마리사 하쿠에 등이 있다.
PKB가 내세운 총선 스타로는 역시 ‘파트리오 트리오’ 출신 아크리와 ‘당둣왕’의 세 자녀 리도 이라마(당둣 가수 겸 배우), 비키 이라마(가수)와 데비 이라마(전직 가수)가 눈에 띈다. “연예인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놀랍거나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연예인은 사실 지방에서는 정치인과 같다. 지역 주민들과 음악 예술을 통해 정치인보다 더 가깝게 소통하고 있으니까.” 현재 로마 이라마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첫째딸 데비의 말이다. 그는 과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PKB 대선 후보로 출마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 남동생들과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아버지는 판카실라(인도네시아 건국이념. 민족주의·인도주의·민주주의·사회정의·최고 신에 대한 신앙심의 다섯 가지 기본 원칙) 정신을 확립하겠다는 뜻을 갖고 계신데, PKB에서 대선 후보를 내려면 일단 안정적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되면 종교적 공휴일을 철저히 지키는 법안을 제안하고 싶다. 무슬림의 라마단, 개신교의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불교의 와이삭(부처님 오신 날) 모두 존중받는 것이 종교적 화합의 기본이다.”
연예인 출신 총선 후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미온적인 편이다. 하지만 이미 자카르타 남부 스나얀 출신으로 국회에 입성한 대표적 연예인 출신 정치인 누룰 아리핀, 탄토위 야흐야, 리커 디아 피탈로카 등에 대한 국회 출입기자들의 평은 비교적 좋다. 유명 여배우였던 누룰 아리핀은 현재 국회 제2위원회(내무·지방자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당 사무총장직에 올랐다. 컨트리음악 가수이자 민영 <rcti>의 ‘누가 백만장자 되고 싶은가’의 진행자였던 탄토위 야흐야 역시 골카르당 대변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누룰 아리핀과 탄토위 야흐야 모두 100% 다시 공천을 받게 될 것이다.” 정당마다 후보 선별과 심사로 바빴던 지난 3월 과 만난 랄루 마라 골카르당 부대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만큼 두 사람에 대한 ‘기성 정치권’의 신망은 두터웠다. 2000년대 인기몰이를 했던 여배우에서 PDI-P 의원으로 변신한 리커 디아 피탈로카 역시, 요즘 인도네시아 정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조코 위도도 자카르타 주지사의 지지를 받는 등 ‘촉망받는 정치 신인’으로 꼽힌다.
연예인 출신 정치인의 비극적 최후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연예인 후보 출마 행렬은 그리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실제 1999년 2명에 그쳤던 연예인 출신 총선 출마자는 2004년 24명, 2009년엔 61명까지 늘었다. 2014년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44명이 그리 많은 수는 아닌 게다. 자카르타 남부에 거주하는 영어교사 서카르 쿠스와조(29)는 “민주당이 연예인 후보들로 2009년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의석을 챙기고, 이를 발판으로 대선에서도 이긴 것은 정말 좋은 전략이었다. 내년 선거 때도 먹힐지는 알 수 없다”고 평했다.
“정당으로서는 연예인을 후보로 내는 것이 선거운동의 비용과 시간 면에서 이득이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기관 인도네시아서베이서클(LSI)의 쿠스크리도 암바르디 사무국장은 이렇게 풀었다. 그는 과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연예인 공천은 2000년대 중반부터 붐을 일으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역대 연예인 총선 출마자가 가장 많았던 2009년 선거에선, 61명 가운데 3분의 2가량이 기성 정치인과의 경쟁에서 밀려 낙선했다.
인도네시아 학계 일각에서는 연예인들의 정치권 유입 현상을 두고, ‘인도네시아 정치의 필리핀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필리핀에서는 1957년 미남 아이돌 로겔리오 데 라 로사가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첫 연예인 정치인이 탄생했다. 1998년엔 유명 영화배우 출신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필리핀 역사상 최다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에스트라다가 부패와 비리 혐의로 2001년 ‘피플파워 2’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면서 연예인 출신 정치인의 비극적 최후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럼에도 지난 5월13일 치러진 필리핀 총선에서도 여전히 ‘별’들은 빛났다.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여배우 빌마 산토스는 바탕가스 주지사로 3선에 성공했고,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과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딸이자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오가는 배우 크리스 아키노도 선거판에 등장했다.
“(수하르토 대통령 하야 이후) 개혁기에 시민사회나 자유, 민주주의 같은 말들은 많았지만 민주적 시민의식이나 참여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로베르투스 로버트 자카르타국립대학(UNJ) 교수(사회학)는 성실한 정치 참여 경험 부족, 미디어의 산업화 등을 연예인 출마 러시 현상의 배경으로 꼽았다. 그는 “특히 방송매체에서 정치·사회적 사안을 연예인 토크쇼처럼 만들면서 진지한 접근 없이 겉핥기식으로 다루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구스둘(압두라만 와힛 전 대통령의 별칭)이 탄핵된 뒤 치러진 대선에서 아민 라이스에게 던진 표가 마지막이었다. 만약 2014년 조코위(조코 위도도 자카르타 주지사의 별칭)가 대선에 나온다면 투표하러 갈까 한다.” 중부 자바 스마랑 출신이라는 택시기사 헨드로 물리요노(30)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이나 희망적인 새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한 투표하러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PAN을 창설한 아민 라이스의 지지자라는 그는 “이제는 아민 라이스가 출마한다 해도 투표하러 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투표장으로 이끌어줄 신나는 후보가 필요하다”며 웃었다.
2009년 재집권 돌풍, 또 통할까?
인도네시아의 차기 총선은 2014년 4월9일 치러진다. 12개의 전국 정당과 3개 지역 정당이 77개 선거구에서 560석을 놓고 출사표를 던졌다. 인도네시아에서 총선은 대선으로 가는 길목이다. 총선에서 차지하는 의석에 따라 석 달 뒤인 7월9일 치러질 대선 수 티켓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2008년 개정된 인도네시아 대통령선거법은 특정 정당이 단독 혹은 연립 형태로 최소한 20%의 총선 득표율이나 25%의 국회 의석을 확보해야 대선 후보를 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2009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당 재집권 돌풍의 불을 지폈던 연예인 공천은 2014년에도 통할 수 있을까?
자카르타(인도네시아)=이슬기 통신원
skidolm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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