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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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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밀입국 중에 타이 해군과 브로커에 의해 살인·성폭행 당하면서도 버마에서의 핍박 피해 고향 버리는 버마 로힝야 난민들
등록 2013-06-27 11:35 수정 2020-05-03 04:27
6개월 전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 무함마드 라피크(17)가 밀수선과 정글에서 이동 중 취한 자세를 재연하고 있다. 그는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불평을 하면 선원들이 총을 휘둘렀다”고 말했다.

6개월 전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 무함마드 라피크(17)가 밀수선과 정글에서 이동 중 취한 자세를 재연하고 있다. 그는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불평을 하면 선원들이 총을 휘둘렀다”고 말했다.

자니 알람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25살, 팔팔해야 할 청년은 이제 막 걸음마 떼는 젖먹이처럼 얕게 부어오른 발을 떼었다가 딛기를 반복했다. 이따금 ‘전통 치료사’에게서 뱀기름 마사지를 받는 것을 빼면 이 ‘걸음마 운동’이 그가 할 수 있는 치료의 전부다.

자니도, 치료사 구라미아 세이드(60)도 모두 버마(현 미얀마) 서부 아라칸주에서 온 로힝야 무슬림 난민들이다. 구라미아는 11년 전에 말레이시아에 왔고, 자니는 지난 1월 말레이시아 서부 해안도시 페낭에 닿았다.

‘브로커’ 횡포에 두 달 동안 짐짝처럼

“많이 좋아진 거다. 넉 달 전 처음 도착했을 때는 전혀 걷지 못했다.” 자니의 이웃이자 역시 로힝야 난민인 자마르 우딘(41)의 말이다. “5월 들어 좀 줄긴 했는데, 4월까지는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버마 난민이) 몇십 명씩 도착했다.” 자마르는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난민들 상당수가 걷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운동 부족 때문이다.

자니가 아라칸주에서 방글라데시 국경을 넘은 뒤, 밀수선에 오른 게 지난해 11월 초다. 이후 페낭에 도착하기까지 두 달 반 넘게 다리를 펴본 기억이 거의 없단다. 상황적 예외가 있긴 하다. 배를 갈아타거나, 배에서 픽업트럭 등으로 갈아탈 때 서서 이동했다. 밀수선이 타이 해안에 도착한 이후 주로 이용된 픽업트럭에서는, 브로커들이 난민들의 몸을 겹겹이 쌓는 바람에 위아래로 납작 눌려 다녔단다.

살고 싶어 탈출했던 몸들은 타이·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 출신 브로커들과 갈등의 주 당사자인 라카잉·로힝야족 출신 버마인까지 결탁한 ‘인간시장’에서 완벽하게 속박됐다. 배에서 트럭으로, 다시 해안에서 정글로, 그리고 타이에서 말레이시아로 던져지면서, 마침내 떨궈진 곳이 페낭이었다.

“아주 많은 라카잉 불교도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화살, 정글용 칼, 장대를 휘두르며 있는 대로 파괴하고 방화할 때는 가만있던 나사카(아라칸주에만 있는 버마 국경경찰)는 우리가 불을 끄려 하자 발포를 시작했다. 내 부모님도 그 혼란 통에 총에 맞아 사흘 뒤 숨졌다.”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자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해 6월, 그가 살던 아라칸주 부티동 지역 소파 마을에서 발생한 반무슬림 폭동 상황을 하나씩 풀어갔다. 군·경찰·나사카 등이 방화를 진압하려는 무슬림들에게 총을 쐈다는 증언은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 ‘살고 싶으면 기도나 해라’에도 줄곧 등장한다.

아라칸주 캄만의 고향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살림 빈 굴발(48)은 지난해 11월 자신이 소유한 배에 75명의 동족을 태우고 말레이시아를 향해 탈출했다. 살림처럼 아라칸주에서 바로 출발해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경우는, 자니를 포함해 방글라데시를 거쳐오는 대부분의 로힝야 난민들과 달리 ‘브로커’의 횡포를 경험하지 않은 축이다.

“떠난 지 나흘 뒤 인도 해군을 만났다. (인도 영토인 안다만섬 인근으로 추정됨.) 그들이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길도 안내해주고 마실 물도 실어줬다.” 살림 일행은 떠난 지 열흘 만인 지난 1월 중순 말레이시아 해안에 닿았고, 그들을 발견한 말레이시아 해군은 근처 해안도시 랑카위로 데려갔다. 먹을거리와 건강검진을 제공받으며 말레이시아 현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인터뷰도 했다. 풀려난 이들은 현재 쿠알라룸푸르에 머물고 있단다.

“타이 가는 길, 아주 많이 죽었다”

로힝야족 출신 자니도 살림과 엇비슷한 무렵 고향을 떠나기로 맘먹었다. 해마다 10월부터 3월까지는 벵골만의 풍랑이 상대적으로 잠잠한 ‘항해 시즌’이다. 버마에서 방글라데시로, 그리고 벵골만 일대의 국제해역으로 어선을 갈아타며 이동했다. 국제해역부터는 화물선 크기의 배에 올랐고, 타이 해안에 이르기까지는 꼭 7일이 걸렸다. 그 길에, 하루 평균 2~3명이 죽어나갔단다.

살리마 누라 아흐마드(25)는 2011년 4월 마을 사람 8~9명과 함께 고향 마웅도를 출발해 45분 만에 방글라데시 국경도시 텍납에 닿았다. 폭동이 불붙기 전이지만, 로힝야족으로서 버마 땅에 사는 것보단 목숨을 걸고라도 탈출하는 게 나을 만큼 이미 희망은 없었다. 2005년 농사짓던 땅을 군인들에게 빼앗긴 뒤 삶의 기반도, 시민권도 없는 처지였다. 남편 노라 무함마드 탄다미아는 이미 버마를 떠난 뒤다. 그는 남편이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새 삶을 시작할 작정이었단다.

국경도시 텍납에서 사흘을 기다린 뒤, 네댓 시간 동안 어선을 타고 벵골만 국제수역 어딘가에 떠 있는 조금 큰 배로 옮겨갔다. 국경에서부터 이미 말레이시아에 있는 남편이 방글라데시 브로커와 통화하며 ‘원격 조종’을 해줬다. 50~60명 수용이 가능한 배에 250명이 채워진 뒤에야 출발을 했다. 선장은 방글라데시인, 선원은 버마인 몇 명과 타이 사람이 대부분, 모두 권총이나 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자나 깨나 다리 한번 펴보지 못한, 악몽의 항해 18일의 시작이었다. 항해 기간에 살리마의 배에서는 모두 18명이 숨을 거뒀단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배 안쪽에 있던 이들 14명 정도가 질식사했다. 나머지 4명은 ‘물을 달라’고 했다고, 좀 떠들었다고 선원들이 바다에 던져버렸다. 모두 젊은 청년들인데….”

각기 다른 배를 타고, 서로 다른 시기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들이 엇비슷하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목마른 남성들이 바다에 던져졌다면, 여성들은 ‘목마르지? 물 줄게 이리 오라’고 유인하는 선원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버마 부티동 지역에서 온 누를 헤센(41)은 “내가 타고 온 배에서 성폭행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초 고향을 떠난 그는 국제수역에서 이틀을 기다려 무려 750명이 오른 화물선을 탔다. 그가 타이 해안에 도착하기까지는 꼬박 8일이 걸렸다. 그는 “타이까지 가는 길에, 아주 많이 죽었다”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선원들은 여성을 맨 위 갑판에 배치했다. 성폭행하는 소리가 거의 매일 밤 들렸다. 무슬림 여성들은 자신이 성폭행당했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을 테지만….”

같은 무슬림의 ‘형제애’를 기대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줄 알았던 배는 타이 해안가에 가닿았다. 그곳에는 ‘정복 차림의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인간장사’가 시작된 건 이때부터란다.

자니는 “군인들이 처음부터 난민을 험하게 다뤘다”고 말했다. 그들의 ‘안내’에 따라 22명이 한 트럭에 구겨타고 대여섯 시간을 달려 ‘1차 지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이동길, 모두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틀이 걸려 정글로 이동했다. 두 번째 정글에서, 브로커들은 말레이시아나 버마에 있는 가족들의 연락처를 묻고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6천링깃(약 217만원)을 통장에 입금하라고 요구했다. 말레이시아에 있던 살리마의 남편은 전화를 받은 순간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눈물 범벅이 된 통화 이후 그가 필요한 돈을 빌리기까지, 꼬박 14일이 걸렸단다.

살리마 누라 아흐마드(25)는 2006년 먼저 말레이시아에 와 있던 남편과 2011년 재회했다. 부부는 살리마의 ‘몸값’을 치르기 위해 빌린 돈을 아직 다 갚지 못했다.

살리마 누라 아흐마드(25)는 2006년 먼저 말레이시아에 와 있던 남편과 2011년 재회했다. 부부는 살리마의 ‘몸값’을 치르기 위해 빌린 돈을 아직 다 갚지 못했다.

몸값 못 내면 ‘현대판 노예’로 팔려가

은 이번 취재 과정에서 ‘정복 차림의 군인들’이 로힝야 난민 보트를 맞이하고, 다른 브로커에 인계했다는 증언을 거듭 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단은 단연 ‘타이 해군’이다. 그동안 타이 해군은 여러 차례 ‘로힝야 스캔들’에 휘말린 바 있다. 2009년엔 타이 해안에 도착한 난민 보트의 엔진을 제거한 뒤 그대로 바다로 흘려보내 떠돌던 난민들이 대거 사망했다는 보도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올 초에는 타이 해안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들을 타이 해군이 점검한 뒤 이송하기 위해 군용보트에 나눠 태우는 과정에서, 겁에 질려 승선을 거부한 난민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해 2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와 관련해 타이 해군은 의 질의에 다음과 같이 전자우편 답변을 보내왔다.

“타이 군 당국은 해군 함정과 항공모함 등을 배치해 인근 해역, 원해까지 정기 순찰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로힝야 난민 보트가 포착되면 식량과 물을 제공하는 등 인도적 지원을 해주고 항해를 계속하도록 안내한다. 만일 난민 보트가 타이 해역에 들어오면, 관계 당국으로 넘겨 법에 따라 처리한다. 이 모든 과정은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른 것일 뿐, 그 과정에 어떠한 이익이나 이해관계도 얽혀 있지 않다.”

‘정복 차림의 군인’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지난 6년간 로힝야 난민 문제를 집중 추적해온 인권단체 ‘아라칸 프로젝트’의 크리스 리바는 “아주 복잡한 이슈다. 언론은 ‘타이 해군’이라 단정하곤 했는데, 그렇게 단정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 내가 가장 가능성을 두는 건 민병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타이 민병대 조직 대부분이 국가안보작전사령부(ISOC)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타이 당국이 난민 인권유린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레이시아에 친구가 있던 누를은 나흘 만에 풀려났다. 돈을 보내줄 이를 찾지 못한 자니는 두 달 가까이 정글에서 갇혀 지내다, 고향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났다. 그동안 1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자니는 “도망치려다 붙잡혀 뭇매를 맞고 죽은 친구도 있고, 소곤소곤 떠든다고 치도곤을 당해 숨진 이도 있다”고 말했다. 끝내 ‘몸값’을 내지 못한 이들은, 사라졌다. 그들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유력한’ 시나리오가 떠돈다. 인신매매가 횡행하는 타이 어촌에 차고 넘치는, ‘현대판 노예’로 끌려갔다는 설이다.

‘석방’된 난민들은 타이 정글에서 다시 말레이시아 정글을 거쳐, 페낭에 떨어졌다. 누를처럼 배로 이동한 루트가 있고 살리마와 자니처럼 차량과 도보를 통해 국경을 넘은 경우도 있다. 살리마의 남편 노라는 “천신만고 끝에 국경지역에서 아내를 만났을 때, 세상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행복했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왜 떠나느냐는 것

고문과 살인, 성폭행의 끔찍한 기억을 안고 도착한 무슬림 형제국가.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도 버마 난민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 6월11일 진 요 버마 외교부 차관과 윈 모 툰 노동부 차관은 “위험에 처한 버마 시민을 구제하고,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겠다”며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그들이 입에 올린 ‘버마 시민’에, 조국에서도 시민권을 박탈당했던 로힝야 난민은 포함되지 않는다. ‘아라칸 프로젝트’의 크리스 리바는 이렇게 말했다.

“국제사회, 특히 언론은 로힝야 난민의 밀입국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법적인 행태를 고발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지다. 로힝야 난민은 철저히 고립됐다. 아무도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버마 아라칸주의 로힝야족 임시보호소에 가봐라. 그야말로 ‘오 마이 갓’, 당신도 당장 난민 보트에 오르고 싶어질 게다.”

쿠알라룸푸르·페낭(말레이시아)·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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