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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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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감염인 목숨 위협하는 FTA

일부 의약품의 특허권 인정하지 않는 정책 덕에 10여 년 에이즈 약 무상 공급받아온 타이 HIV 감염인들… 타이-EU FTA 협상, EU가 의약품 특허권 인정 요구해 생명줄 같은 약 공급 중단 위기
등록 2013-03-29 12:33 수정 2020-05-02 19:27

숫자이 타파(46)는 타이 동북부 콘깬 지방에 사는 농사꾼이다. 1995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보균자 판정을 받은 그는 매일 저녁 8시 3가지 약을 동시에 복용하고 있다. 테노포비어(Tenofovir), 3TC, 그리고 에파비렌즈(Efavirenz). 숫자이가 이렇게 약을 먹어온 지 1년6개월. 시기에 따라 다른 약을 복용해온 그는 지난 17년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하 에이즈) 치료제에 돈을 쓴 적이 없다.
강제성 없는 ‘TRIPs 플러스’ 요구
1990년대에는 국경없는의사회(MSF)가 제공하는 약을 무료로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탁신 친나왓 정부가 도입한 이른바 ‘30밧 의료정책’의 덕을 봤다. 2001년 탁신 정부는 시민사회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의료복지의 문을 열며 HIV·에이즈 감염인들에게 항레트로바이러스(ARV·에이즈 치료제)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1990년대 타이의 에이즈 정책이 ‘콘돔 사용 100%’를 내건 예방 캠페인에 집중했다면, 2000년대 타이는 HIV·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치료의 길까지 열어줬다.
“초기에는 사람들이 날 피했다. 그런데 ARV 치료를 시작하면서 일반인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으니까 ‘HIV 보균자가 맞냐고’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가던 병원을 이젠 석 달에 한 번만 가도 되니 일상생활에 별 지장도 없고….”
숫자이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타이의 HIV·에이즈 감염인 네트워크 ‘TNP+’의 동북부 코디네이터를 맡아 에이즈 관련 캠페인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숫자이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삶을 지탱해준 무료 치료제와 의료복지가 이제 막 시작된 타이-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치명타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6일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한 잉락 친나왓 총리는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과 만나 타이-EU FTA 협상의 개막을 알렸다. 그런데 오는 5월 첫 공식 협상을 앞두고 벌써부터 타이 시민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EU 쪽이 지적재산권(IPR) 강화를 이유로 의약품 특허권 연장과 약품 정보 자료 독점권 등을 협상 의제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EU 쪽은 이를 통해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TRIPs)보다 권리가 한층 강화된 이른바 ‘TRIPs 플러스’를 관철할 태세다.
EU가 법적 강제성이나 타당성이 없는 ‘TRIPs 플러스’를 요구하는 이유는 뭘까? 타이 시민사회에선 “특허권을 대거 쥐고 있는 초국적 제약회사들의 독점만 장려할 뿐, 그 약품에 생사가 달린 수많은 이들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 지난 몇 년간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지로 향하던 저렴한 인도산 제네릭(특허 약품과 동일한 성분으로 만든 복제약) 에이즈 치료제들이 모조리 단속에 걸려 몰수당한 것은, EU가 주장하는 ‘지적재산권 강화’의 횡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이즈 감염인 단체를 중심으로 한 타이 시민사회가 FTA 반대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지라폰 림파나농 출랄롱꼰대학 교수(약학)는 과의 인터뷰에서 “거대 제약회사들은 특허권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쓰고 있다. 약품 성분에 아주 작은 변화만 주고도 신약인 양 등록하고 특허권을 주장하는 이른바 ‘에버그린 특허’가 있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인도가 ‘세계의 약공장’인 이유
최근 타이 영자지 이 인용 보도한 ‘건강 시스템 연구센터’의 자료를 보면, 2000년 이후 10년 동안 타이에서 새로 신청된 의약품 관련 특허는 모두 2188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타이 제약회사가 낸 신청 건수는 단 12건, 나머지는 모두 초국적 제약회사가 냈다. 이를 통해 이 업체들은 향후 15년 동안 84억밧(약 2억8천만달러)의 이득을 올릴 것이라고 이 단체는 분석했다.
특허권 강화와 함께 협상 의제에 오른 의약품에 관한 자료독점권(Data Exclusivity) 역시 시장 독점의 ‘첨병’ 구실을 할 것으로 보인다. 지라폰 교수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실제 시장 가격을 좌우하는 건 자료독점권이다. 특허는 신약 개발에 기인하지만, 자료독점권은 의약품 판매 승인을 받을 때 제출하는 안전성과 유효성에 대한 정보다. 이 자료들을 제네릭 제약사가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저렴한 제네릭 출시를 막을 수 있다. 결국 자료독점권은 판매독점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타이-EU FTA는 세계 곳곳에서 시위를 유발한 인도-EU FTA와 많이 닮아 있다. 인도는 특허약과 효과가 같은 저렴한 제네릭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국가다. 세계 에이즈 치료제의 50%를 공급하고, 개발도상국에 필요한 에이즈 치료제의 90%를 생산한다. 특히 시장이 작아 이윤이 크지 않은 소아용 에이즈 치료제를 생산하고 있다. 전세계 23개국에서 22만 명의 HIV·에이즈 감염인을 돌보고 있는 MSF는 인도 제네릭을 통해 인도주의 활동을 펼치고 있고, 유니세프 역시 개발도상국 지원에 필요한 의약품 50%가량을 인도산 제네릭에 의존하고 있다.
인도가 개발도상국 에이즈 치료제 조달에 절대적 기여를 하고 있다면, 타이는 치료제 개발과 에이즈 정책 모두에서 모범 사례다. 타이에선 1984년 첫 감염인이 나온 이래 감염된 숫자가 100만 명을 웃돌고 이 가운데 52만 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 15~49살 인구의 에이즈 감염률이 1.2%나 된다. 에이즈 감염률 ‘아시아 1위’란 절박한 현실이, 모범적인 정책 추진으로 이어진 셈이다. 17년 동안 HIV 보균자로 살아온 숫자이의 경우를 살펴보자.
100분의 1로 떨어진 약값 다시 올라
숫자이가 복용하는 약 가운데 ‘B형 간염’까지 잡아주는 테노포비어를 제외하고, 3TC·에파비렌즈 모두 타이 정부 산하 의약품 개발조직인 정부의약품기구(GPO)에서 생산한 치료제다. GPO 생산 약품들은 정부 정책에 따라 저렴한 가격이나 무료로 병원과 각급 의료기관에 보급되고 있다. 테노포비어 역시 제네릭 생산을 마쳤고 현재 등록 절차만 남아 곧 판매·보급에 들어갈 예정이다. 타이는 내성이 생겨 새로운 약물이나 치료 단계로 들어가야 하는 환자용 의약품을 제외한 1단계 치료제 대부분을 자체 생산할 수 있다.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치료제인 에파비렌즈의 경우 타이 정부가 2006년 11월 강제실시권을 발동해 인도에서 제네릭 의약품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0년 이후엔 아예 GPO를 통해 제네릭을 자체 생산·보급하고 있다. 강제실시권은 TRIPs에 저촉되지 않는 WTO 회원국의 합법적 권리로, 정부는 공공의료가 위협받는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특허권을 보유한 제약회사의 동의 없이도 제네릭의 생산 혹은 수입을 추진할 수 있다. 강제실시권 발동을 주도한 몽콜나 송클라 전 보건부 장관은 “우리가 의료정책에 따라 지급하는 큰 비용 중 하나가 바로 약값이다. 이로 인해 타이 의료정책이 붕괴 직전 상황까지 내몰렸다”고 말했다.
현재 타이에서 EU와의 FTA 문제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건 ‘성노동자’ 단체들이다.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캠페인에 힘입어 타이 성노동자들은 1989년 14%에 그쳤던 콘돔 사용률이 5년 만에 90%까지 높아질 정도로 에이즈 문제에 ‘각성’된 집단이다. 성노동자 권익단체 ‘스윙’(SWING)의 참롱(42) 부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직업상 성병·에이즈 검사를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 만일 관련 의약품 가격이 오르고 의료복지 체계가 흔들리면 그 어마어마한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나. 타이-EU FTA는 우리를 포함해 타이에 사는 누구라도 영향받게 될 것이다. 이주민 성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스윙은 타이의 성노동자뿐 아니라 주변국에서 온 이주민 성노동자들 중 HIV·에이즈 감염인들을 돕고 있다. 타이의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스윙을 매개로 필요한 약품을 제공하고 있는 게다. 일반 치료제 이상의 약품이 필요해 비용이 발생할 경우 모두 스윙이 부담하고 있다. 대부분 불법 체류자인 그들이 스윙의 지원활동을 알고 좀더 공개적으로 나오길 바라는 참롱에게 ‘지적재산권’ 운운하는 EU의 행태는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10여 년 전만 해도 에이즈 치료제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1년간 한 사람이 부담해야 할 몫이 1만달러를 넘었으나, 이제는 100분의 1 수준인 100달러까지 떨어졌다. “10년 전 몇천 명의 친구들을 잃었다”는 아시아·태평양 에이즈 감염인 연대(APN+) 활동가 시바푸 라이랏팜은 “지난 10년간 에이즈 치료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특허 약품의 독점이 아닌 제네릭의 경쟁이 낳은 결과”라고 강조했다.
ARV의 전례 없는 확산은 약 600만 명의 목숨을 살렸다. 지난 5~6년간 에이즈 관련 사망률이 20%나 떨어졌다. 이제 에이즈는 ‘사형선고’라기보다 ‘만성질환’에 가까워지고 있다. EU가 추진하는 의약품에 대한 지적재산권 강화 문제를 두고 타이에선 벌써부터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만성질환자들에게 사형선고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계속 ‘노’(No)를 고집해라. 애초 협상을 서둘러 마무리하려던 인도 정부가 시민사회의 강한 반대와 압력을 잘 활용해 지금까지 버텨왔다. 인도가 ‘노’라고 할 수 있다면, 타이도 ‘노’를 외칠 수 있다.” 오랜 기간 ‘의약품 접근권’ 캠페인을 벌여온 MSF의 폴 코튼은 이렇게 주문했다. 그는 “EU가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해도 이는 단순한 ‘협박’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EU의 요구를 고스란히 수용한 한국과 달리 인도는 5년째 협상을 끌어오고 있다.
동생이 오빠 정책 뒤집을까
얄궂게도 현 정부는 타이 의료복지의 대부처럼 추앙받는 탁신 전 총리의 ‘전설’을 잇고 있다. 탁신 정부의 ‘30밧 의료정책’이 만들어낸, 농민·빈민층의 유례없는 지지가 현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탁신 전 총리의 친동생인 잉락 총리가 의료복지에 치명타를 가하게 될 ‘TRIPs 플러스’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란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잉락 총리는 “2년 이내에 협상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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