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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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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오스 차베스, 영원한 사령관

등록 2013-03-16 04:37 수정 2020-05-02 19:27
#1 2013년 3월5일, 눈물

지난 3월5일 오전(현지시각)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 사망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야권의 거리집회에 이어, 전날엔 에르네스토 비예가스 공보장관이 직접 차베스 대통령이 위중한 상태라고 공식 발표까지 한 터다. 이른 아침부터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은 정부 각료와 군 지도부, 집권 베네수엘라사회주의연합(PSUV·이하 사회당) 인사들로 북적였다. 하나같이 굳은 표정이었다.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의 대국민 연설이 시작됐다.

“(차베스 대통령은 암 발병 이후 지금까지) 가장 어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낮은 목소리로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에선 뭔가 ‘결기’가 느껴졌다. 등 외신들도 앞다퉈 1시간 남짓한 그의 연설을 생중계했다. 이날 오후 마두로 부통령이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그의 눈가는 이미 젖어 있었다.
#2 2006년 9월20일, 분노
2006년 9월19∼27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선 제61차 총회가 열렸다. 개막 둘쨋날인 9월20일 오전 회의는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문을 열었다. 파나마·칠레·스리랑카 대통령에 이어 다섯 번째로 연단에 오른 인물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었다.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존경하는 의장님,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각국 대표단 여러분…. 먼저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 있어 소개하려 합니다. 미국과 지구촌에서 유명한 지식인 중 한 분인 노엄 촘스키 교수가 쓴 란 책입니다. 20세기뿐 아니라 지금도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미 제국주의의 패권 추구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몸짓과 손짓을 섞은 특유의 달변이 이어졌다. 그는 “책의 일부를 낭독하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추천해드리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라며 “미국의 형제자매들이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이 바로 미국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악마가 바로 미국 땅에 있다”는 게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그 악마가 어제 여기에 왔습니다. 어제, 그 악마가, 제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 말입니다. 연단에서 아직도 유황 냄새가 진동을 하네요.” 총회장 안에선 웃음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는 이내 오른손을 들어 성호를 긋고 손에 입을 맞춘 뒤, 청중을 향해 윙크를 해 보였다.
“신사·숙녀 여러분, 어제 바로 이 연단에서 제가 악마로 칭한 미국의 대통령이, 마치 세상의 주인인 양 연설을 했습니다. 어제 그의 연설 전문을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 심리분석이라도 맡겨보고 싶네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조목조목 인용해 비판한 그는 “남반구 인민들의 말을 대신 전하고자 한다”며 ‘양키 고 홈’을 외쳤다. 지난 14년여간 익히 보아온 전형적인 ‘차베스표’ 연설이었다.
#3 1954년 7월28일, 가난
우고 라파엘 차베스 프리아스는 1954년 7월28일 베네수엘라 북서부 바리나스주의 소도시 사바네타 외곽 농촌마을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스페인계와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계 이주민의 핏줄이 고루 섞인 집안이었다.
부부가 교사로 일했음에도 가난을 떨쳐내지 못했던 부모는 맏아들 아단(현 바리나스 주지사)과 둘째 우고를 할머니 집에 맡겨 길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 로사 이네즈 차베스의 가르침에 따라, 어린 차베스는 성당에서 복사를 서며 신실하게 자랐다. 어린 차베스는 역사 과목을 좋아했는데, 특히 1859~63년 베네수엘라 내전에 관심이 많았단다. 토지개혁 문제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맞붙은 당시 전쟁에서, 차베스의 증조부가 진보 편에 섰던 에제퀴엘 자모라 장군 휘하에서 싸웠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1971년 수도 카라카스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생도 시절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19세기 남미 대륙을 독립 열기에 휩싸이게 했던 시몬 볼리바르의 사상에 심취했다. 1974년엔 생도 대표로 선발돼 페루 독립전쟁 150돌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좌파 군인 출신으로 쿠데타로 집권한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페루 대통령의 연설을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당시 알바라도 대통령은 “지배계급이 부패하면 군대는 노동계급의 이해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단다.
1975년 소위로 임관한 차베스는 1년여 만에 이른바 ‘적기당’으로 불린 좌파 반군 게릴라 소탕작전에 동원됐다. 이 무렵 베네수엘라 정부군은 생포한 게릴라 대원에게 온갖 고문을 가했다. 군 내부의 부패도 만연한 상태였다. 군대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차베스는 점차 ‘적기당’의 주장에 동조하게 된다. 그는 1977년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베네수엘라인민해방군(ELPV)이란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차베스 대통령’을 탄생시킨 ‘혁명볼리바르운동’(MBR-200)의 모태다.
1980년대 남미 각국은 외채 위기로 골머리를 앓았다. 미국 국무부·재무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긴축재정과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뼈대로 하는 ‘워싱턴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1989년 베네수엘라 대선의 최대 쟁점도 ‘워싱턴 합의’였는데, 중도 성향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는 ‘워싱턴 합의를 거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페레스 정부의 태도는 집권 직후 돌변했다. 사회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등 IMF의 ‘처방’을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연일 이어진 대규모 시위를 페레스 정부는 군홧발로 짓밟았다. 이 과정에서 27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른바 ‘엘 카라카소’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부의 실정과 만연한 부패, 극소수 지배계층이 정치·경제 권력을 송두리째 장악하는 현실에 대한 젊은 장교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차베스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거사일은 1992년 2월4일 새벽으로 잡혔다. 작전명 ‘자모라’, 이날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페레스 대통령의 신병을 확보하는 한편 통신망 등 주요 기간시설을 접수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하지만 작전 개시 초반부터 예기치 못한 상황이 잇따라 벌어졌다. 결국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자, 차베스는 투항을 결정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정복 차림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해 연설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쉽게 받아들여졌다.
“동지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선 우리가 이루려 했던 목표를 이룰 수 없게 됐습니다. 여기 카라카스에 있는 우리들은,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새로운 기회가 올 것입니다. 조국은 더 나은 미래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작전상 후퇴였다. ‘지금으로선’이란 말을 입에 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연설로 차베스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이 됐다. 그가 수감된 산카를로스 육군교도소 앞에선 연일 지지 시위가 벌어졌다. 그해 11월 또 한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좌절된 뒤, 이듬해 페레스 대통령은 의회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1994년 대선에서 당선된 라파엘 칼데라 대통령은 차베스와 그의 동지들을 석방했다. 차베스는 100일에 걸쳐 베네수엘라 전국을 순회하며 “볼리바르 혁명을 수행해나가겠다”고 역설했다. 본격적인 정치 인생이 시작된 게다.
#4 1999년 4월25일, 혁명
1998년 대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1997년 7월 차베스와 그의 동료들은 기존 좌파 정당에 가담하는 대신 제5공화국 운동(MVR)이란 독자 정당을 창당했고 대선에 나선 차베스는 56.2%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그는 당선 직후 “베네수엘라의 부활이 시작됐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이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외쳤다.
당선 직후부터 차베스 대통령은 개헌을 추진했다. 대선 직후인 1999년 4월25일 제헌의회 소집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선 88%의 압도적 다수가 찬성표를 던졌다. 7월25일 열린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 1171명 가운데 900명이 반차베스를 기치로 내걸었음에도, 차베스 진영은 전체 제헌의회 의석의 95%인 125석을 얻었다. 원주민과 여성의 인권 신장, 교육·주거·보건·식량권 명문화, 환경보호와 정부 투명성 확대를 뼈대로 한 개헌안은 그해 12월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야권의 조직적인 ‘불참운동’으로 투표율은 44.4%에 그쳤지만, 개헌안은 71.8%란 압도적인 찬성률로 무난히 통과됐다.
당시 개헌으로 대통령 임기도 5년에서 6년으로 늘었다. 대통령 소환투표와 연임 제한(재선) 규정도 추가됐다. 또 상하 양원으로 나뉜 의회도 단원제로 바뀌었다. 새 헌법에 따라 치른 2000년 7월 선거는 베네수엘라 사상 최대 규모였다. 대통령과 각 주의 주지사,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 자치의회 의원까지 모두 같은 날 뽑게 됐다. 차베스 대통령은 59.76%의 득표율로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의회에서도 165석 가운데 101석을 차지했다. 차베스 정권과 기득권층의 ‘타협 불가능한’ 대립 구도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2002년 4월11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야권이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열자, 차베스 대통령 지지자들도 맞불 시위를 벌였다. 두 시위대는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20명이 숨지고 110여 명이 다쳤다. 야권을 등에 업은 군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빠르게 움직였다. 쿠데타가 일어난 게다.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한 기업가 출신 페드로 카르모나는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라, 1999년 헌법 폐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빈민들을 중심으로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거리를 장악하자 정국은 사실상 마비되고 말았다. 쿠데타 발생 사흘 만인 4월14일 차베스 대통령은 권좌에 복귀했다.
‘물리력 행사’가 좌절되자, 야권은 ‘법적 대응’으로 방향을 돌렸다. 1999년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 소환투표’가 그것이다. 이내 캠페인이 시작됐고, 2004년 8월15일 마침내 소환투표가 진행됐다. 잇따른 정정 불안 속에 중산층마저 등을 돌렸음에도, 결과는 유권자 59%의 반대로 부결이었다. 이 무렵부터 야권 일각에선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21세기형 사회주의’란 말을 부쩍 자주 입에 올렸다. 2006년 12월 대선에서 차베스 대통령은 74%의 열띤 투표율 속에 63%의 압도적 지지율로 3선, 바뀐 헌법 아래 재선에 성공했다.
재선을 전후로 차베스 대통령은 볼리바르운동을 필두로 한 범좌파 진영의 단일 대오 구축에 몰입했다. 그 결과는 사회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이미 2007년으로 접어들며, 사회당의 당원은 약 2700만 인구 가운데 570만 명을 넘어섰다. 그해 차베스 대통령은 다시 개헌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주당 노동시간 단축과 아프리카계 주민을 포함한 인종과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하는 등의 내용을 헌법에 명문화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혁명 완수’를 위한 대통령 권한 강화 조항도 포함됐다. 임기를 7년으로 늘리는 한편, 연임 제한 규정을 폐기하는 내용까지 담으려 했다. 그해 12월2일 국민투표에서 55.9%의 저조한 투표율 속에 반대표가 50%를 넘어서 개헌안은 결국 부결됐다. 집권 이후 첫 선거 패배였다. 이 무렵부터 나라 안팎에서 그를 지지하던 이들도 하나둘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2009년 2월 다시 한번 국민의 의견을 물었다. 이번엔 아예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선출직 공무원의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70.3%의 투표율 속에 54.9%의 찬성으로 개헌안은 통과됐다. 2012년 10월7일 대선에서 그는 무난히 4선 고지에 올랐다. 득표율은 55.07%, 14년 전 첫 집권 때와 엇비슷했다.
#5 2013년 3월8일, 기억
네 번째 대선에서 승리한 차베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27일 쿠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건강검진’을 위해 나선 길이었다. 열흘 만인 12월7일 일단 귀국한 그는 “암이 재발해 수술을 다시 받아야 한다”며 다시 아바나로 향했다. 앞서 2011년 6월 암 발병으로 첫 번째 수술대에 오른 차베스 대통령은 그간 여러 차례 쿠바를 방문해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회복은 더뎠다. 수술 9일 만인 지난해 12월20일엔 ‘호흡기 계통에 새로운 합병증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1월10일로 예정됐던 취임식도 무기한 연기됐다. 차베스 대통령은 지난 2월18일 귀국했다. 첫 번째 수술 뒤 귀국했을 땐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덩실덩실 춤까지 췄지만, 이번엔 조용히 카라카스 시내 육군병원으로 향했다.
세계 제5위의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전체 수출액의 약 85%가 원유에서 나온다. 차베스 대통령 집권 직전까지 10달러 선 아래를 맴돌던 유가는 100달러 선을 뛰어넘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집권 첫해 110억달러에 머무른 차베스 정부의 예산을 올해 2천억달러 수준까지 늘릴 수 있었던 힘이다. 이는 곧 의료·주거·교육 등 빈곤층에 대한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 확대로 이어져,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 기반을 더욱 강화했다. 세계은행(WB)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1995~2005년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30%나 떨어졌다. 같은 기간 극빈층 인구도 전체의 32%에서 19%로 줄었다.
휴먼라이츠워치 등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차베스 정부가 야권과 언론을 탄압했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반론도 있다. 미국 진보지 은 3월7일 인터넷판에서 “야권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인정한다 해도, 베네수엘라에 현재 수감돼 있는 이른바 ‘정치범’은 많아야 11명이다. 이 가운데는 2002년 쿠데타를 주도한 이들도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퇴임 뒤 전세계 각국에서 92차례나 선거감시 활동을 벌였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선거제도를 ‘세계 최고’로 꼽는다. 베네수엘라에선, 터치패드를 통해 표를 던진 뒤 신용카드 영수증처럼 출력된 기표 용지를 투표함에 넣는다. 개표는 컴퓨터를 통해 이뤄지는데, 재검표는 기표 용지로 한다. 집권 14년여 동안 차베스 대통령은 국민투표와 대선을 포함해 무려 14차례나 선거를 치렀다. 이 가운데 13차례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콤파네로 코만단테 차베스, 프레젠테 아호라 이 시엠프레’(차베스 사령관 동지, 영원하라). 차베스 대통령은 3월5일 오후 4시25분께 카라카스의 육군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58살.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 든든한 동지였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텔레비전에 출연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차베스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친다. 해방을 위해 싸우는 모든 이에게 영감으로 남을 것이다. 우고 차베스는 영원히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따로 성명을 내어 “차베스 대통령은 무시당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나라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비전을 가졌던 인물”이라며 “그가 이끌어간 방식에 모두 동의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수백만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헌신했다는 점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추모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젊은 동지’를 잃은 팔순의 형제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는 어떤 기분일까? 바야흐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장례식은 3월8일 모교인 카라카스의 육군사관학교에서 엄수됐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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