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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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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타나모, 적반하장의 미국지배 110년

거짓 명분 전쟁에서 스페인 몰아내고 점령 시작, 맨해튼 크기 땅의 임대료로 월 340달러 주며 카리브해 휘젓는 근거지로 활용… 쿠바 땅을 찌른 비수이자 법률의 불랙홀
등록 2013-03-02 05:27 수정 2020-05-02 19:27

‘바다가 육지 속으로 파고들어 와 있는 곳’을 ‘만’이라 한다. 약 25만km2에 이르는 페르시아만처럼 드넓은 곳도 있다. 북위 19도54분, 서경 75도9분에 위치한 카리브 연안의 한 지점처럼 그보다 훨씬 좁은 곳도 있다. 연평균 기온이 최저 22.7℃에서 최고 31.2℃에 이르는 그곳에 1494년 처음 당도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푸에르토그란데’라 불렀다. ‘커다란 항구’란 뜻이니, 제법 구미가 당겼던 모양이다.
관타나모만, 쿠바섬의 동쪽 끝자락이다.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의 명맥이 다한 자리에, 남쪽에서부터 바닷물이 한참을 밀고 들어온 곳이다. 예로부터 카리브해의 변덕스런 물살을 피해 대양을 넘나들던 배들이 그곳에 닻을 내렸단다. 천혜의 항구란 얘기다. 관타나모 바닷가 일대 117.6km2, 미 뉴욕의 맨해튼섬과 엇비슷한 면적에 미국 해군기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외국 땅에 자리한 미군기지로는 가장 오래된 곳이란다. 사연이, 제법 길다.
2013년 1월11일을 기억해보자.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마련된 ‘포로수용소’로 첫 번째 ‘적 전투원’들이 줄줄이 엮여온 지 11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2002년 그날, 미국이 ‘9·11 동시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침공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붙들린 ‘탈레반’이 주황색 죄수복을 입고 그곳으로 이송돼왔다. 라틴아메리카연대연맹(LASC)은 그날을 기억해 이런 성명을 내놨다.
1월11일, 9·11 전투원이 엮여온 지 11년 된 날
“관타나모는 쿠바 민중의 뜻에 반해 군사적으로 점령된 상태로,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 연안 국가들을 겨냥한 군사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뿐 아니라 미국이 불법 점령하고 있는 군사기지를 철거하고, 하루빨리 쿠바 쪽에 부지를 돌려줘야 한다.”
관타나모에 미군기지가 들어선 것은 언제인가? 신생 독립국이던 미합중국이 바야흐로 열강의 힘에 맞서 기지개를 켜던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칼럼니스트 존 오설리번이 1845년 격월간 7·8월호에서 미국의 팽창주의를 상징하는 표현, 곧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조어를 만들어낸 그 무렵 말이다. 지금의 텍사스주를 미국에 합병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편 당시 칼럼에서 오설리번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뻗어나가는 것은 신께서 미국에 부여한 운명”이라고 강조했다.
오설리번은 한술 더 떴다. 영국 사학자 휴 토머스가 2001년 펴낸 을 보면, 그는 1847년 초 신혼여행길에 쿠바의 아바나를 둘러보고 온 직후부터 “쿠바 땅을 미국이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단다. 뜬금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1803년 나폴레옹의 프랑스로부터 지금의 루이지애나주 일대를 헐값에 사들인 미국은, 이후에도 서구 열강이 장악하고 있던 대륙의 땅덩어리를 잇따라 사들이며 영토를 넓혀갔다. 1813년엔 스페인에서 플로리다주 일대를, 1867년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쿠바는 달랐다. 신대륙으로 향하는 노예무역의 중심지이자, 세계 무역시장에서 각광받던 설탕(사탕수수)의 주산지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미국의 잇따른 ‘매각’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단다. 19세기 후반 들어 미 정치권에서 공공연히 ‘무력 점령’ 주장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기회는 쉽게도 찾아왔다. 쿠바에서 독립의 기운이 뜨겁게 분출됐기 때문이다. 1868년 시작된 제1차 독립전쟁은 1878년까지 이어지며 ‘10년 전쟁’으로 불렸다. 1879~80년 벌어진 제2차 독립전쟁이 이른바 ‘작은 전쟁’으로 불렸다. 이어 1895년 마침내 최후의 일전이 시작됐다. 노쇠한 제국은 잇따른 저항으로 지친 상태였고, 독립전쟁도 대단원을 향해 치닫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쿠바의 제3차 독립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898년 1월24일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이 해군 군함 ‘USS 메인’호를 쿠바의 아바나로 전격 파견했다. “쿠바에 거주하는 미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게 명분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20일 만인 그해 2월15일 아바나 항구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 사고로 장교 2명을 포함해 미 해군 26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 일으킨 명분의 진상은 ‘내부 폭발 침몰’
미국 쪽은 즉각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한 달여 만인 그해 3월 조사단은 ‘군함 외부에 설치된 기뢰 폭발로 인한 침몰’이란 결론을 내놨다. 미국은, 당연히 들썩였다. 스페인이 저지른 짓이란 소문은 이내 ‘사실’로 굳어졌다. 그해 4월 미 의회는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쿠바의 제3차 독립전쟁이, 미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둔갑한 사연이다.
잇따른 전쟁으로 피로가 누적된 스페인군은 미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개전 불과 석 달 남짓 만에 전쟁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그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강화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자국령이던 아시아의 필리핀과 괌, 카리브의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쿠바 땅을 미국에 넘겨줬다. 괌과 푸에르토리코는 지금껏 ‘미국령’으로 남아 있다.
메인호 침몰 사건의 실체는 뭘까? 미 의회도서관이 2009년 8월 내놓은 관련 자료를 보면, 1974년 하이먼 리코버 제독 주도로 미 해군이 자체 실시한 재조사 내용이 언급돼 있다. 결과는 어땠을까? 조사단은 “외부에 설치된 기뢰가 아닌, 내부 폭발에 따른 침몰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고 당시 메인호는 엔진룸과 화약실이 거의 붙어 있었고, 엔진을 돌리려고 사용한 석탄에서 생겨난 불씨가 화약실로 튀며 연쇄 폭발로 이어져 침몰했다”는 게다.
미국이 거짓 명분에 기대 전쟁에 뛰어든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북베트남(베트콩)의 기습 공격으로 미군 함정이 침몰했다고 주장하며, 1964년 베트남전 참전의 명분으로 삼았던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운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파괴무기(WMD) 보유 주장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승리는, 쿠바의 패배였다. 독립 직전까지 갔던 쿠바를 장악한 미국은 곧 군정청을 설치하고 사실상 군사점령에 들어갔다. 이 무렵 미국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쿠바를 아예 자국에 합병시키는 방안과 정치·경제적으로 통제하는 방안을 두고 저울질을 했다는 게다. 결국 ‘사실상의 보호령’으로 묶어두는 방안으로 낙찰됐고, 제2대 군정청장으로 임명된 레너드 우드 소장은 독립 쿠바공화국을 준비할 ‘제헌의회’를 소집했다.
‘조건’이 없을 리 없었다. 공화당 오빌 플랫 상원의원(코네티컷주)이 1901년 2월25일 발의한 이른바 ‘플랫 결의안’이 그것이다. 미 상하 양원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플랫 안은 쿠바의 외교·무역 정책을 제한하는 한편, 미 해군기지 마련을 위해 쿠바 정부가 영토를 할양하도록 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애초 쿠바 제헌의회는 이를 거부했지만, 미국은 “플랫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쿠바에 대한 군사점령을 끝내지 않을 것”이란 뜻을 분명히 했다. 거센 논란 끝에 쿠바 제헌의회는 표결을 거쳐 찬성 16표, 반대 11표, 기권 4표로 이를 받아들였다. 1902년 5월20일 독립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쿠바는 출발부터 ‘미국의 보호령’을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던 게다. 당시 우즈 장군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썼단다.
“플랫 수정안에 따르면, 쿠바는 사실상 독립국가가 아니다. …미국이 쿠바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세계 설탕무역 시장도 장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915년 아이티·18년 도미니카·89년 파나마…
미 의회도서관의 자료를 보면, 플랫 안 제3조는 “쿠바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데 쿠바 정부는 동의한다”고 돼 있다. 또 제7조는 “(미국이) 쿠바의 독립을 유지하고, 쿠바 국민을 보호하며, 미국 본토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경우, 쿠바 정부는 (당시 군함의 연료인 석탄을 채우기 위한) 급탄과 군사 주둔 목적의 기지 설치를 위해 영토를 할양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3조 규정에 따라, 미국은 실제 1906년·1912년·1917년·1920년에 각각 쿠바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단행했다. 제7조 규정의 후속 조처는 독립 이듬해인 1903년 2월 마련됐다. 그해 2월16일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 쿠바 대통령이 서명하고, 일주일 뒤인 2월23일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서명한 관타나모만 할양에 관한 ‘쿠바-미국 협정’ 말이다. 미국이 관타나모를 점령하고 해군기지를 건설한 게, 벌써 110년째를 맞았다는 얘기다.
협정의 내용을 살펴보자. 제1조는 “쿠바 정부는 미국에 급탄 및 해군기지 설치 목적으로 (관타나모만의) 영토와 영해를 할양해준다”고 돼 있다. “(할양받은 지역은) 급탄 및 해군기지 설치 이외의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제2조에 이어, 협정 제3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미국은, 한편으로 위에 언급한 영토와 영해에 대한 궁극적 주권이 쿠바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위에 언급한 목적을 위해 점유하는 동안에는 미국이 해당 지역에 대해 완벽한 사법·통제권을 행사한다는 점을 쿠바 정부는 양해한다.”
같은 해 7월과 10월 두 나라는 후속 협정문에 각각 서명하고, 미국이 한 해 2천달러를 쿠바에 ‘임대료’로 지불하기로 했다. 또 “두 나라가 협정 내용에 대한 변경 또는 폐기에 합의할 때까지 협정은 효력을 유지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사실상 영구적이란 얘기다. 이어 1934년 5월 두 나라는 임대료를 한 해 4085달러로 인상하는 데 합의했단다. 맨해튼 정도의 땅덩어리에 대한 임대료가 월평균 340달러 정도란 얘기다.
관타나모 기지를 근거지 삼아, 미국은 카리브해 일대를 휘저었다. 1915년 아이티에 이어 1918년엔 도미니카공화국을 차례로 침공했다. 쿠바 혁명이 한창이던 1956~58년 관타나모 기지는 바티스타 군사독재 정권의 든든한 배후 구실을 했다. 1959년 1월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한 뒤에는 독재정권 잔당의 피난처이자, 반카스트로 군사작전의 전진기지로 활용됐다. 1983년 그라나다, 1989년 파나마, 1994년 다시 아이티를 침공할 때도 그곳 기지가 발판이 됐다.
“관타나모 미군기지는 쿠바 땅을 찌른 비수와 같다. 미국은 관타나모를 힘으로 빼앗았지만, 우리는 그 땅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959년 친미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직후,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이렇게 말했단다. 쿠바 정부는 이후 ‘임대료’ 수령을 거부한 채, “관타나모 기지는 무력으로 불법 점령된 상태”라고 강조해왔다.
임차 기간이 명시 안 돼 ‘합법’?
물론 미국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1903년 협정문에는 ‘임차 기간’이 명시돼 있지 않다. 또 협정을 폐기하려면, 미국과 쿠바 양국 정부가 합의를 해야 한다.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 한, 관타나모를 영구적으로 점유하는 것도 당연히 ‘합법’이란 게다. 과연 그럴까? 오랫동안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한 알프레드 데자야스 스위스 제네바 외교·국제관계대학 교수(국제법)는 2003년 11월 발표한 ‘관타나모만과 수감자의 법적 지위’란 제목의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국제조약의 기준을 정해놓은 빈 협정(1969년) 제52조는 ‘어떤 협정이라도 군사적 위협 또는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에 따라 체결된 것이라면 국제법 위반’이라고 정해놨다. 1903년 조약은 처음부터 무효란 얘기다. 또 제64조는 ‘국제법의 일반 원칙이 새롭게 정립됐을 경우, 이에 반하는 기존 조약은 무효화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느 한 나라에 일방적으로 불리하도록 맺어진 조약은 언제든 폐기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견줄 만한 사례가 있다. 제1차 아편전쟁 직후 체결된 난징조약에 따라 홍콩을 ‘무기한 조차’했던 영국은 99년 만인 1997년 이를 중국에 반환했다. 포르투갈도 같은 방식으로 오랜 기간 자국령이던 마카오를 1999년 중국에 돌려줬다. 미국 역시 자국 기술진이 직접 설계하고 건설한 파나마 운하를, 오랜 협상 끝에 2000년 1월 파나마 정부에 넘겼다. 관타나모만 ‘예외’인 게다.
냉전 시절 미국은 관타나모를 포기할 수 없었다. 쿠바 혁명으로 코밑에 소련의 ‘전진기지’를 두게 됐으니 그럴 만했다. 1962년 10월 미-소 두 나라를 핵전쟁 직전 상황까지 치닫게 한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는, 극한 대결로 치닫던 당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냉전이 끝난 뒤엔 어떨까?
미 플로리다주 최남단 키웨스트에서 쿠바섬 연안까지, 플로리다 해협의 최단 거리는 150km다. 군사작전 반경을 카리브 연안으로 한정한다면, 굳이 관타나모에 대규모 군 병력을 주둔시킬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미 군축전문 싱크탱크 국방정보센터(CDI)가 1990년 4월 내놓은 자료에서 “(관타나모는)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쓸모가 없는 기지”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관타나모를 붙들고 있는 이유가 뭘까? 11년째로 접어든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관타나모 포로수용소 폐쇄를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지 4년이 다 돼간다. 수용소 폐쇄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건가? 그건 관타나모 자체가 지난 100년 이상 미국 대외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28일 은 칼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쓸모없는 기지를 붙잡고 있는 이유는
1903년 협정은 법률적 공백을 낳았다. 관타나모에 대한 주권은 쿠바에 있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사법 관할권과 (법적) 통제권은 미국에 있다. 신문은 “이런 모순적 상황 탓에 두 나라의 법률이 공히 관타나모에선 적용되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됐다”고 꼬집었다. 애초 조지 부시 행정부가 관타나모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한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게다. 미 인권단체 ‘휴먼라이츠퍼스트’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말 현재 그곳에 기한 없이 갇혀 있는 ‘테러 혐의자’는 모두 166명이다. 관타나모, 법률의 블랙홀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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