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털’이란 명사가 있다. 흔히 ‘박히다’란 동사를 가져다, ‘미운털이 박히다’로 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안 좋은 선입관 때문에 어떤 짓을 하여도 밉게 보이는 것’이라고 풀어놨다.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라덴, 무아마르 카다피 등이 사라진 지구촌에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함께 ‘미운털’의 대표 격인 인물이 있다. 우고 라파엘 차베스 리아스, 집권 14년을 바라보고 있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말이다. 따지고 들면, 그럴 만한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차베스 45.7% vs 카프릴레스 48.9%
“여러분 모두 내 77번째 생일잔치에 초대하겠다. 지난번에 2021년까지만 집권하겠다고 했는데, 안 되겠다. (혁명의 완성을 위해선) 2031년까지는 집권을 해야겠다.”
무슨 소린가? 이른바 ‘21세기형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고 있는 차베스 대통령이 지난해 7월28일 자신의 57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당시 영국 일간 는 “불과 8일 전 쿠바에서 암 수술을 하고 돌아온 차베스 대통령이 지지자들과 한바탕 춤판을 벌이며 흥을 낸 뒤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그가 취임한 것이 1999년 2월이니, 2031년까지면 물경 32년 동안 권좌를 지키겠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게, 아주 가능성 없는 소리가 아니다. 기존 베네수엘라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중임까지만 허용했다. 하지만 2009년 2월2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선출직 공무원의 임기 제한’을 폐지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헌법 개정안이 55%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집권 초기부터 미국과 사사건건 정면으로 맞서며 남미 전역에서 ‘좌파 바람’을 불러일으킨 차베스 대통령이다. 흘려듣고 넘기기엔, ‘떠오르는 풍경’이 자못 끔찍했을 터다.
“차베스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최대의 시험무대에 올랐다.” 베네수엘라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10월6일 는 ‘변화를 앞둔 베네수엘라’란 제목의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도 같은 날 “여론조사 결과는 엇갈리고 있지만, 차베스 대통령이 14년여 집권 기간에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린 때는 없었다는 점에 이의를 다는 이는 많지 않다”고 전했다. ‘정권 교체’라도 예감했던 걸까?
실제 선거운동 막판 베네수엘라 여론조사 전문기관 ‘콘솔토레스 21’이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48.9%가 야당인 ‘정의우선당’의 엔리케 카프릴레스 후보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율은 45.7%에 그쳤다. 앞서 베네수엘라 야권은 지난 2월 경선을 거쳐 카프릴레스 후보로 ‘야권 단일화’를 이룬 바 있다. 반차베스 진영으로선 ‘해볼 만한 싸움’으로 보였을 게다.
선거 당일인 10월7일엔 가 나섰다. 신문은 “선거 판세가 팽팽한 백중세로 흘러, 공식 선거 결과가 발표돼도 이에 불복한 쪽이 반발해 폭력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불복’과 ‘폭력’의 배후로 지목된 것은, 당연히 ‘미운털’ 쪽이었다.
차베스 55.25% vs 카프릴레스 44.13%
기실 서구 주요 매체는 선거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카프릴레스 후보가 선거관리위원회에 공식 후보 등록을 한 지난 6월10일 은 “만 39살인 카프릴레스 후보는 이날 지지자들과 10km를 함께 달려 선관위에 도착해 후보 등록 절차를 마쳤다”며 “카프릴레스 후보가 승리한다면 베네수엘라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같은 날 <ap>과 등은 카프릴레스 후보에 대해 “젊은 에너지를 한껏 발산했다”거나 “활력이 넘치는 헌신적인 지도자”라고 표현했다. 반면 차베스 대통령에 대해선 “(설령 대선에서 승리한다 해도) 건강이 갑자기 악화한다면,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에 지나치게 기대온 베네수엘라 정부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인데, 결과는 어땠을까?
베네수엘라에선 만 18살 이상이면 누구나에게나 투표권이 부여된다. 다만 유권자가 직접 선관위에 등록해야 투표권 행사가 가능하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베네수엘라 선관위는 전국 1300여 곳에 유권자 등록센터를 개설하고, 지난 4월 중순까지 9개월에 걸친 등록 작업을 벌였다. 이를 통해 2900만 명 인구 가운데 1800만 명가량이 유권자 등록을 했는데, 신규 등록 유권자만도 135만여 명에 이르렀다. 선관위 자료를 보면, 이들 가운데 89%는 18~25살 젊은이였단다. 앞선 선거에 견줘, 투표권 행사를 포기한 인구도 3.5%가량 줄었다.
이제 선거 결과를 살펴보자. 지난 10월8일 베네수엘라 선관위가 내놓은 공식 결과를 보면, 이번 선거의 등록된 유권자는 모두 1860만6379명이다. 이 가운데 1501만256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투표율 80.67%, 베네수엘라 사상 최고치였다. 유효 투표수는 전체의 98.1%인 1472만5357표였다. 이 가운데 차베스 대통령은 813만6637표(55.25%)를 얻은 반면, 카프릴레스 후보는 649만9575표(44.13%)를 얻는 데 그쳤다. 지지율 격차는 약 11%포인트, 이 정도면 ‘압승’이라 부를 만하다. 미국의 진보적 연구단체 ‘북미 라틴아메리카 회의’(NACLA)가 10월8일 펴낸 자료에서 “이번 선거에 대한 서구 주류 언론의 보도 태도는 가히 ‘불명예의 전당’에 헌정될 만한 수준”이라고 꼬집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유가 바탕한 서민 정치의 힘
1998년 대선 당시 차베스 대통령의 득표율은 56.20%였다. 14년을 집권하고도, 여전히 엇비슷한 지지율로 임기를 6년 더 늘렸다. 비결이 뭘까? 그의 집권 직전까지 10달러 선 아래에 머물렀던 베네수엘라산 원윳값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평균 100달러 선을 유지하고 있다. 정유산업은 베네수엘라 수출의 80~90%를 떠맡고 있다. 집권 첫해 110억달러에 머물렀던 차베스 정부의 예산을 올해 2천억달러 수준까지 늘릴 수 있었던 힘이다. 이는 곧 의료·주거·교육 등 빈곤층에 대한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 확대로 이어져,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 기반을 더욱 강화시켰다.
차베스 대통령의 다음 임기는 2013년 2월 시작돼 2019년까지 이어진다. 임기를 무사히 마치면, 무려 20년을 집권하게 된다. 민주적인 절차를 거쳤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긴 세월이다. 이런 형태의 ‘장기 집권’은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래선가? 베네수엘라에서 ‘정권 교체’를 예감했던 이들이, 선거 결과 발표 직후부터 새로운 ‘희망사항’의 시나리오를 들먹이기 시작한다. 국제유가 폭락에 따른 경제위기와 차베스 대통령의 급격한 건강 악화, 이로 인한 혼란과 내부 분열, 그리고 야권의 급부상이 그 뼈대다. ‘선출된 독재자’란 낯익은 수식과 함께.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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