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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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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핏빛 내전 거쳐, 다시 혼란의 처음

8월20일 유엔이 정한 소말리아 과도정부 수명 끝나… 22년 전 ‘바레 정권’ 인사가 새 의회 의장으로, 추문 휩싸인 정치인들 대거 대통령 출사표
등록 2012-09-04 17:33 수정 2020-05-03 04:26

지난 8월20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유엔이 정한 시한에 따라 이날로 수명을 다한 소말리아 과도정부를 대체할 새 정부 구성을 주도할, 새 연방의회가 처음으로 소집됐다. 정원 275명 가운데 이날까지 ‘임명’된 의원은 모두 211명이었다. 소말리아를 대표하는 4대 부족에 각각 61명씩, 나머지 소수 부족에는 31명이 할당돼 있다. 눈여겨볼 것은 따로 있다. 이날 행사가 열린 장소는 소말리아가 처한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준다. 간이 탁자에 이슬람 성서 코란을 올려놓고 치러진 이날 행사는 모가디슈 외곽에 자리한 아덴 압둘레 국제공항, 아프리카연합(AU)이 파견한 평화유지군 본부가 자리한 그곳의 주차장 한켠이었다.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총기로 무장한 사설 경호원들.  민음인 제공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총기로 무장한 사설 경호원들. 민음인 제공

첫 손에 꼽히는 ‘실패한 국가’

국가의 ‘성공’은 무엇으로 평가할까?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국경 안에서, 합법적 물리력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풀었다. 군벌이나 민병조직이 기승을 부리거나 테러가 만연하는 등 ‘물리력’ 사용을 국가가 독점하지 못하면 그 국가는 ‘실패한 국가’로 불린다. 미국의 민간 싱크탱크 ‘평화기금’과 외교안보 전문지 는 2005년부터 해마다 세계 각국의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을 종합해 ‘실패한 국가’ 목록을 선정·발표하고 있다. 지난 7월13일 발표한 ‘2012년 실패한 국가 목록’을 보면, 조사 대상 175개국 가운데 총점 114.9점을 기록한 소말리아가 ‘실패한 국가’ 중에도 첫손에 꼽혔다. 2011년에도, 2010년에도,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 ‘아프리카의 뿔’로 불리는 지역에 자리한 소말리아는 1960년 7월 영국과 이탈리아의 신탁통치를 딛고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여느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독립의 흥분과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군부독재가 들어섰다. 1969년 말 쿠데타로 집권한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정권은 22년여를 버티다, 1991년 1월 무장 군벌의 저항에 무너졌다.

쫓겨난 독재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눈먼 욕심이 내전으로 불타올랐다. 국제사회의 개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 무모한 일이었다. 1993년 발생한 이른바 ‘블랙호크 다운’ 사건이 이를 잘 말해준다. 당시 모가디슈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미군 헬리콥터 2대가 군벌의 공격으로 추락해 미군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결국 유엔 평화유지군은 1995년 3월 소말리아에서 철수했다. 아라비아해로 통하는 아덴만 일대에서 해적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고대로부터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던 소말리아에 이슬람이 전파된 것은 7세기 무렵으로 알려졌다. 이슬람의 역사와 소말리아 무슬림의 역사는 궤적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극소수 기독교인을 제외한 900만 소말리아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 중앙정부의 부재 속에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기반을 두고 지역별로 조직돼 있던 ‘이슬람 법정’이 민심을 아우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크고 작은 개인 간의 다툼을 중재하고 받아낸 ‘소송비용’을 재원으로 지역 차원에서 교육·의료·복지 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며 세력을 키운 이슬람 법정은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전국적인 연대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이는 1999년 4월 이른바 ‘이슬람법정연대’(ICU·이하 이슬람연대) 결성으로 이어진다. 이슬람연대의 급부상은 바레 정권 붕괴 이후 소말리아를 장악해온 군벌들의 위기감을 키웠다. 유혈 경쟁을 지속하던 이들은 서둘러 이른바 ‘평화회복과 테러방지를 위한 연맹’(ARPCT·이하 반테러연맹)을 꾸리고 이슬람연대에 맞서기 시작했다.

국제사회가 ‘실패한 국가’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그곳을 무대로 테러와 마약밀매 등 국경을 뛰어넘는 범죄가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유엔의 중재로 2004년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소말리아 과도 연방정부’(TFG·이하 과도정부)가 꾸려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9·11 동시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 골몰하던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 과정을 배후에서 주도했음은 물론이다.

‘이슬람연대’ 지도자 당선, 지독한 역설

2006년 초반부터 이슬람연대와 반테러연맹 사이에 충돌이 잦아졌다. 결국 그해 5월 모가디슈 한복판에서 격렬한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 달여를 버티던 군벌은 마침내 패퇴했고, 그해 6월5일 이슬람연대는 모가디슈를 장악했다고 선포했다. 16년여 내전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말리아가 알카에다의 도피처가 되는 것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 이슬람연대의 모가디슈 장악 소식이 전해진 직후 부시 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 무렵 는 “(부시 행정부가) 이미 2002년 12월 소말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부티에 1600명 규모의 대테러 전담부대를 배치했다”며 “유엔의 무기 금수 조처에도 이슬람연대와 맞선 군벌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왔다”고 전했다.

불길한 조짐이 현실화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슬람연대의 모가디슈 입성 이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던 소말리아를 미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에티오피아가 2006년 12월 전격 침공한 게다. 이슬람연대 무장세력이 조직적으로 훈련되고 잘 무장한 정규군에 맞서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에티오피아군 침공 이후 불과 20여 일 만에 이슬람연대는 모가디슈에서 철수했다. 다시, 혼란이었다.

이듬해인 2007년 3월 우간다군 1200명을 주축으로 한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이 소말리아에 도착했다. ‘점령군’ 노릇을 하는 에티오피아군을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혼란은 계속됐고 군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 이슬람연대에서 떨어져나온 근본주의 성향의 ‘알샤바브’(아랍어로 ‘젊은이’) 반군이 기세를 올려 상황이 갈수록 나빠졌다.

2009년 1월 에티오피아군이 마침내 소말리아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그로부터 보름여 만에 소말리아 과도정부의 새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과도정부가 자리한 소말리아 남부 바이도아 대신 안전한 지부티에서 이른바 ‘과도 연방의회’ 의원들이 투표를 했다. 10여 명의 후보와 맞서 결선까지 가는 접전 끝에 당선된 이는 에티오피아군이 몰아낸 이슬람연대의 지도자 셰이크 샤리프 아흐메드였다. 지독한 역설이다.

소말리아 과도정부의 지난 3년여는 어땠을까? 지난 7월17일 <ap> 등을 통해 일부 내용이 공개된 ‘유엔 소말리아·에리트레아 감시그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200쪽 분량의 비밀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보고서를 보면, 2009~2010년 과도정부가 지원받은 예산의 70%가 국고에 귀속되기 전에 증발했다. 2011년 한 해에만 전체 예산의 4분의 1가량인 1200만달러가 대통령실, 총리실, 연방의회 의장실에서 ‘흡수’했단다. <ap>은 “이는 같은 기간 소말리아 과도정부가 사용한 치안·안보 관련 예산 총액과 맞먹는 규모”라고 지적했다. 유엔식량계획(WFP) 등의 추산치를 보면, 소말리아에선 지난해 발생한 기근 사태로 줄잡아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국고의 70%는 정부 쌈짓돈으로

수도 모가디슈가 그나마 ‘안전’해진 것도 1년 남짓에 불과하다.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알샤바브 반군의 맹렬한 기세는 지난해 10월 남부 국경지대에서 케냐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자 한풀 꺾였다. 같은 해 11월엔 철수했던 에티오피아군도 ‘귀환’했다. 미국은 케냐와 에티오피아군이 국경을 넘어 소말리아에서 펼치는 군사작전에 대해 “두 나라는 얄샤바브 반군이 자국 영토를 공격하는 것을 방어할 합법적 권리가 있다”고 두둔했다.
그럼에도 과도정부의 ‘권력’은 모가디슈 외곽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사이 국제사회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앞서 한 차례 과도정부의 수명을 연장했던 유엔이 지난해 9월 이른바 ‘소말리아 과도체제 종식을 위한 로드맵’을 내놓고 과도정부의 시한을 ‘2012년 8월20일’로 못박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유엔 안보리는 지난 2월 소말리아 주둔 아프리카연합군 병력을 1만2천 명에서 1만7천 명까지 늘렸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선 치안 유지가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마련된 임시헌법이 8월1일 일사천리로 과도의회를 통과했다. 비슷한 부족 원로 135명으로 구성된 이른바 ‘원로회의’를 통해, 각 분야·정파·부족을 망라한 새 연방의회 구성이 시작됐다.
“소말리아에서 마침내 새 연방의회가 소집된 것을 환영한다. 과도기를 끝내려는 이행 과정에서 중요한 초석이 세워졌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열정을 쏟고 있는 소말리아 국민에게 찬사를 보낸다.” 지난 8월20일 제이 카니 미 백악관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카니 대변인은 “새 의회 소집은 소말리아의 불안정을 끝내고 질서를 회복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어떤 경우라도 소말리아의 정치적 이행을 가로막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애초 예정보다 이틀 늦은 지난 8월28일 소말리아 새 연방의회는 변호사 출신 무함마드 오스만 자와리(66)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아프리카 뉴스 전문매체 는 “자와리는 바레 정권에서 교통·노동·체육부 장관을 두루 거쳤으며, 소말리아 과도헌법 제정위원장을 맡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20년여 핏빛 내전을 거쳐, 다시 ‘바레 정권’ 인사가 전면에 섰다.
유엔의 계획안에 따르면, 새 연방의회는 의장 선출 이후 10일 안에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셰이크 샤리프 아흐메드 전 대통령과 샤리프 하산 전 의회 의장을 비롯해 지난 3년여 부패 추문의 중심에 섰던 인사들이 줄줄이 출사표를 던졌다. ‘이행기’를 마친 뒤 들어설 소말리아 새 정부에 대한 비관론이 나오는 이유다. 이미 새 연방의회에 진출한 이들이 당선을 위해 부족 원로들에게 돈을 뿌렸다는 풍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과도정부 성과마저 무너질 수도

“정치권은 철저히 분열돼 있고, 투명성도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도 생략된 채 의회가 소집됐다. 이들의 손으로 부패로 얼룩진 인사들을 대상으로 새 지도부를 선출할 예정이다. 소말리아의 향후 정치 상황이 과도정부 시절과 다를 것이란 보장은 없다.” 다국적 외교·안보 전문 싱크탱크 국제위기감시그룹(ISG)은 지난 8월20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 단체는 “알샤바브 반군의 세가 약해지긴 했지만 아예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다”라며 “이른바 ‘이행기’의 혼란이 가중된다면 이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해 지난 3년여 어렵사리 일궈온 인도적 성과가 쉽게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대체 어쩔 것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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