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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공개제도가 되레 성범죄 부추긴다는데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 ‘원조국’ 미국에 이는 신상공개 무용론… ‘낙인찍기’가 ‘갱생 의지’ 꺾어 성범죄 억제 효과 없거나 재범률 되레 높여
등록 2012-08-07 14:19 수정 2020-05-03 04:26

1994년 7월29일의 일이다. 미국 뉴저지주 머서 카운티의 해밀턴 지역에 사는 제시 팀멘데쿼스(당시 33살)가 이웃에 살던 7살 소녀 메건 캔커를 “강아지를 보여주마”고 집 안으로 꾀었다. 참혹한 일이 뒤를 이었다. 팀멘데쿼스는 아이를 성폭행하고는 목졸라 살해했다. 주검은 나무상자에 담아 가까운 공원에 내다버렸다. 이튿날 들이닥친 경찰에게 그는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007년 12월17일 뉴저지주가 사형제를 폐지해, 팀멘데쿼스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감형돼 복역 중이다.

“당신 이웃은 성범죄자”통지의 효과는?
사건에 앞서 팀멘데쿼스는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두 차례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뒤 그가 살던 집에는 성범죄로 실형을 살고 나온 이들이 3명이나 함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동네 사람 누구도 알지 못했다. 캔커가 무참히 살해된 직후 민심이 분노로 들끓었던 이유다.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뉴저지 주의회는 성범죄자의 신상정보를 폭넓게 공개하도록 하는 이른바 ‘메건법’을 통과시켰다. 2년 뒤인 1996년엔 연방의회가 ‘메건법’을 통과시켜, 이런 분위기는 미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로써 미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를 갖춘 나라가 됐다.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 캡처.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 캡처.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등도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를 도입하긴 했다. 하지만 관련 정보는 경찰의 방범활동에 활용될 뿐,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반면 미국에서는 성범죄자의 자세한 신상이 인터넷 등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경우에 따라선 ‘통지 의무’를 수반해, 정부가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 우편으로 “당신 이웃은 성범죄자”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할 정도로 수위가 높다. 최근 경남 통영 어린이 피살 사건 이후 정부와 새누리당이 추진하는 성범죄자 신상공개 확대와 소급 적용은 이런 미국의 정책을 본뜬 것이다.

하지만 막상 성범죄자 신상공개의 ‘원조국’인 미국에서는 최근 제도 무용론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5년간 축적된 주별 제도 운용과 범죄율 관련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신상공개를 적극적으로 시행한 주의 성범죄 억제 효과는 미미한 반면 일부의 경우 성범죄 재범률이 되레 높아지는 등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게 이유다.

제임스 프레스콧 미국 미시간주립대 법대 교수와 조나 로코프 미국 컬럼비아 경영대 교수 연구팀은 지난 10년간 미 15개 주에서 성범죄자 정보공개 수위와 범죄율 추이를 분석한 보고서를 최근 내놨다. 연구팀은 주별로 △신상정보 등록 △통지 방법 △제도 도입 시점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이들 변수와 성범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체 범죄율과 소득 등 다른 변수와의 상관관계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분석 결과, 경찰이 출소한 성범죄자의 거주지와 현황을 추적하고 최소 1년에 한 차례 면담을 의무화한 성범죄자 등록 방식은 성범죄를 미미하게나마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이 순찰시 전과자에 주목하고, 유사 범죄 발생시 쉽게 용의자를 골라낼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런 성범죄 억제 효과는 범죄자 바로 옆에 사는 이웃과 지인에게만 해당될 뿐, 멀리 사는 이들을 노린 성범죄율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정보공개 채택한 주의 재범률 더 높아

더구나 신상정보 등록을 통한 성범죄 예방 효과는 전과자의 신상이 경찰이 아닌 일반 주민에게까지 공개되는 경우엔 물거품이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재범률 증가다. 성범죄자 개인정보가 인터넷 등으로 널리 공개되고, 경찰이 이웃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이 이웃에 사니 조심하라”고 알리는 제도의 도입은 성범죄자의 재범률을 오히려 높이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연구팀은 성범죄 전과자들의 얼굴과 세부 주소 공개 같은 ‘낙인찍기’가 이른바 ‘갱생 의지’를 꺾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웃의 멸시와 조롱, 따돌림이 되레 ‘잘못하면 다시 감옥에 간다’는 두려움을 상쇄시키고, 자포자기한 전과자들이 성범죄를 다시 저지르기 쉽게 만든다는 것이다. ‘적극적 신상공개’가 재범률을 높이는 한편으로, 같은 지역에서 범죄를 저지른 적 없는 초범의 범죄율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은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연구팀은 보고서에서 “과다한 신상정보 공개와 통지는 성범죄 전과자들에게 불필요한 심리적·사회적 비용을 부과해 재범의 기회비용을 낮춘다”며 “성범죄자 신상등록 제도는 유지하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우편 공개와 통지 제도는 축소 내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맨다 애건 미국 시카고대 교수(경제학)도 성범죄 신상정보 공개 시점이 다른 여러 주의 성범죄율을 비교해 2011년 발표한 논문에서 비슷한 지적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재범률이 신상정보 공개 여부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보공개를 채택한 주의 재범률이 되레 약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특히 애건 교수는 특정 지역을 구와 동 단위로 세밀히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인구 대비 성범죄자 거주 비율과 성범죄 발생 비율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못박았다.

성범죄자 신상공개 등록제도는 출발 초기부터 “논리적·법적 허점으로 얼룩진 제도”란 비판을 받아왔다. 이미 죗값을 치른 이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법이 금하는 ‘이중 처벌’이란 비판이 나온 이유다. “이웃에 성범죄자가 사는지 알 권리가 있다면, 도둑이나 살인자가 사는지도 알 권리가 있다”며 법·제도에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상세 주소 공개는 성범죄자와 함께 사는 가족에 대한 ‘연좌제’라는 비판도 꼬리를 물었다.

‘솜방망이’법 바꿔 강력 처벌이 먼저

그럼에도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대한 여론은 한국이나 미국 모두 대체로 긍정적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믿기 때문일까? 특히 성범죄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겐 제도의 실효성을 떠나 범인의 신상공개·등록 자체로 ‘짐승의 얼굴을 세상에 공개했다’는 정서적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 평가에 한 몫하는 듯싶다. 성폭력에 비교적 ‘관대한’ 한국 사법 체계와 삼진아웃제 등 가중 처벌과 화학적 거세 등 강력한 처벌을 내리는 미국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제도 도입만으로 ‘기대’했던 효과를 얻어낼 수 없다는 점이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성범죄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문제라면, 법을 바꿔 형량을 늘리는 게 먼저일 터다.

뉴욕(미국)=서수민 통신원 seosoom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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