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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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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인상안, 폭발한 민심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 유가보조금 인상안 내자 “부패 먼저 척결” 하야 시위 폭발…
수하르토·메가와티 전 대통령 낙마 도화선 됐던 유가 인상 연기했지만, 2014년 대선까지 불씨 남아
등록 2012-04-27 06:44 수정 2020-05-02 19:26

“SBY(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는 하야하라!”
지난 3월30일 오후 3시께, 1만여 명의 성난 시위대가 자카르타 남부 스나얀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국회의사당 앞 도로를 점거했다. 모스크에서 금요 기도를 마친 뒤 모여든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은 정부 발의로 국회에 상정된 정부 보조금 석유가 인상안 통과를 막으려고 총력전을 펼쳤다. 올 초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은 국제 유가 인상으로 인해 정부의 유가보조금 예산 부담이 커지자 정부 보조금이 지급되는 유류가를 4월1일부터 33%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날 시위대는 ‘대통령 하야’ ‘유가 인상 결사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국회 담장을 부수고 영내에 진입하는 등 격렬하게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정부 지출 20% 차지하는 유가 보조금
경찰은 그날 저녁 7시부터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는 등 강제 해산 작전에 들어갔다.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는 2시간가량 이어지다 시위대가 해산되며 끝났다. 그러나 이날 밤늦게까지 9개 정당이 대표 연설로 시간을 끌자 화가 난 일부 시위대가 본회의장에 난입해 국회가 잠시 정회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경찰청에 따르면, 이날 국회의사당 앞 외에도 대통령궁 등 자카르타 주요 거점에서 벌어진 시위에 1만2천 명이 참가하는 등 전국적으로 8만1천여 명의 시민이 유가 인상 반대 시위에 나섰다. 1998년 민주화 시위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다.
유가 문제는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98년 5월 정부가 유가 인상을 단행한 뒤 식품 가격이 크게 올랐고, 이에 반발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번진 항의 물결은 민주화·개혁 반정부 시위로 이어져 32년간 철권통치 하던 수하르토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유가 인상 반대 시위가 대권을 위협하는 기시감은 5년 뒤에도 재연됐다. 공공요금·유가 인상에 반대한 시민들이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당시 대통령의 하야 시위를 벌였고, 이후 그의 대선 낙마로 이어진 것이다.
반면 집권 2기를 보내고 있는 유도요노 현 대통령은 유가 인상 문제를 영리하게 돌파해내며 민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가를 인상하는 대신 빈민층을 대상으로 한 석유보조금 제도를 함께 도입한 것이다. 2005년과 2008년에 유가를 각각 26%와 28.7%씩 인상하며 석유보조금 실비와 쌀을 지급해 유가 인상 조처의 충격을 완화했다. 일부 야당 정치인들은 포퓰리즘적 정책이라고 비난했지만, 유도요노 대통령의 유가보조금 정책은 2009년 재선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이 유가보조금이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정책적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규모의 유가보조금을 지급하는 나라다. 중앙정부 전체 지출의 최대 20%가 유가보조금으로 쓰인다. 최근 국제 유가 상승과 함께 인도네시아 원유 생산량이 줄어 유가보조금이 150억달러에 이르게 되자 2012년 정부 예산(약 1577억5760만달러)을 압박하고 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3월18일 유가 인상 조정안을 국회에 제출해 정면 상황 돌파에 나섰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인이 된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등 모든 지도자가 유가 인상을 꺼렸고 (나 역시) 민주당을 위해 안전한 길을 택할 수 있었지만 지도자로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며 유가 인상 계획이 정략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시사주간지 의 율리 이스마르토노 영문판 편집장은 “지금 올리지 않으면 다음 대선 때 현 집권 여당인 민주당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민주당 정권이 예산 운용을 비효율적으로 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밀실 회동 뒤 찬성 돌아선 제1 야당
이런 정치적 셈법은 당장 생활비 걱정이 앞서는 서민들의 걱정과 분노를 부채질한다. “정부 비리로 새나가는 세금이 얼만데, 부정부패가 제대로 근절되지 않는 한 유가 인상 정책은 필요 없어요.” 자카르타 타나아방 빈민지원의료센터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할리다 바리(46)는 유가 인상으로 생긴 여유분의 예산을 인프라 건설과 복지정책에 쓰겠다는 정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현재 유가가 아랍 국가를 제외하고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낮다며 국민을 설득하고 나섰지만 녹록지 않은 모양새다. 노동운동가 안디토 수위그뇨는 과 한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시위는 그동안 외국계 기업과 투자자의 배를 불려주는 유도요노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표심을 의식한 각 정당의 정치적 행보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현재 인도네시아 제2당인 골카르당은 초반 유가 인상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가 아부리잘 바크리 당 대표가 유도요노 대통령과 밀실 회동을 한 뒤 찬성으로 돌아섰다. 바크리 대표와 유도요노 대통령 사이에 거래가 오갔기 때문이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바크리 대표의 대선행을 가로막고 있는 ‘라핀도 진흙 홍수 사태’ 피해자 보상 문제 부담을 정부가 덜어주는 대신 골카르당은 의회에서 유가 인상안에 찬성하기로 한 것이다. 라핀도 진흙 홍수 사태는 바크리 대표 일가가 소유한 석유·가스 시추회사 라핀도의 2006년 5월 동부 자와 시도아르조 지역 시추 과정에서 지하 진흙이 분출돼 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사고로 현재까지도 뿜어져나오는 진흙을 막지 못하고 있다.
메가와티 전 대통령이 당 대표로 있는 민주투쟁당(PDI-P)은 골카르당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메가와티 대표는 지난 1월 “세계적 정황을 고려해 유가가 인상돼야 한다”는 의견을 발표했지만, 민심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반대 의견으로 돌아섰다. 민주당과 집권 연정에 속한 번영정의당(PKS)은 연정 내 비주류 입지를 쇄신하고 당의 협상력을 높이려고 반대표를 던져 존재감을 드러냈다.
정당들의 이런 행보에 대해 인도네시아주립대 사회학과 로베르투스 로벳 교수는 “이번 시위를 통해 생활밀착형의 민감한 사안이 정치적 엘리트들의 이권다툼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모든 정당이 오로지 정치권력 챙기는 데만 신경을 쏟았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단체 한자리에 모으는 계기”
결국 유가 인상 계획은 연기됐다. 3월31일 새벽까지 이어진 본회의 끝에, 2012년 국가 예산안에서 추산하는 배럴당 인도네시아산 원유가격(ICP) 105달러가 6개월 내에 15% 이상 오르거나 떨어지면 보조금 석윳값을 정부가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이 채택됐다. 사스미토 하디 위보워 통계청(BPS) 물가담당국장은 최근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유가 인상을 시도한다면 라마단(이슬람력의 금식월)과 르바란(라마단의 끝을 알리는 날) 연휴가 끝난 뒤인 9월이나 10월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시위를 주도한 인도네시아 금속노조(SPMI) 보니 부위원장은 “유가 인상안 철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시위가 시민사회단체를 한자리에 모으는 계기가 됐다. 오는 5월1일 노동절 행사에서 유가 인상, 최저임금 문제 등에 대비한 조직력과 전략을 다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201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가 인상 문제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 있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이슬기 통신원 skidolm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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