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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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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캄보디아의 오래된 ‘총풍’

수백 년 동안 되풀이돼 온 타이와 캄보디아 갈등의 역사…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장되는 분쟁에 희생되는 힘없는 민초들
등록 2011-05-05 04:43 수정 2020-05-02 19:26

2003년 1월29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수천 명의 캄보디아인이 타이 대사관에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일부는 대사관을 점거하고 불을 질렀다. 타이인 소유 기업이나 타이어 간판이 붙은 건물도 공격당했다. 사태는 타이군이 군용 수송기 4대를 프놈펜으로 보내 외교관 등 500여 명의 타이인을 본국으로 긴급 수송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세계적 불가사의로 꼽히는 캄보디아의 고대사원 앙코르와트에 관해 타이 여배우가 했다는 말이 화근이었다. “앙코르와트의 진정한 주인은 타이다. 앙코르와트를 타이에 넘겨줄 때까지는 절대로 캄보디아에서 공연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말은 2년 전 방송된 드라마의 대사가 와전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두 나라의 오랜 앙금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이다.

» 지난 4월22일 캄보디아 군인들이 타이군과 무력 충돌을 빚은 프레아비히어 사원 인근으로 이동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AFP연합

» 지난 4월22일 캄보디아 군인들이 타이군과 무력 충돌을 빚은 프레아비히어 사원 인근으로 이동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AFP연합

충돌의 현장인 프레아비히어 사원

8년이 흐른 2011년 4월. 타이와 캄보디아 국경에 위치한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둘러싼 두 나라의 충돌도 역사의 유탄을 맞은 현장이다. 지난 4월22일 이후 양쪽의 충돌로 15명이 숨지고 수만 명이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도대체 이 사원이 무엇이기에 이러는 것일까? 독도를 둘러싼 한-일 사이의 갈등보다 심하다.

이 사원은 동남아시아 크메르 제국(802~1431)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로, 캄보디아-타이 국경에 걸쳐 있는 당렉산 해발 525m 정상에 있다. 시바신을 모시는 이 힌두교 사원은 9세기에 건축이 시작돼 10~11세기에 걸쳐 대부분 지어졌다. 앙코르와트에 비하면 건축양식이나 규모가 뒤지지만, 크메르인의 예술적 재능이 감탄을 자아낸다. 캄보디아 대평원이 지평선까지 보이는 전망도 압권이다.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둘러싼 분쟁은 1954년 프랑스에서 캄보디아가 독립하자 타이가 이 사원을 무력으로 점령하며 시작됐다. 발끈한 캄보디아는 1959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1962년 6월 재판소는 9 대 3의 표결로 이 사원이 캄보디아에 속한다고 판결했다. 1907년 타이와 프랑스가 공동 제작한 지도에 이 사원이 캄보디아에 속해 있는 게 결정적 근거였다. 당시 재판소는 “타이 정부가 지도 제작 당시나 그 뒤 수년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국경선에) 동의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소 판결 뒤인 1963년 1월, 캄보디아는 1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공식 행사를 열어 이 사원이 국제법상 캄보디아 소유임을 못박았다. 하지만 이 사원을 ‘프라위한’(Phra Wihan)이라 부르는 타이는 재판소가 사원과 그 주변 땅에 대한 관할권을 캄보디아 소유로 인정했을 뿐, 산 전체의 관할권을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해, 긴장이 계속돼왔다.

갈등에 불을 붙인 것은 이 사원의 2008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다. 캄보디아의 신청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캄보디아 소유로 거듭 공인된 것이다. 이에 타이 여론이 들끓었고 타이는 사원 인근에 군인 수천 명을 배치하는 등 지금까지 충돌을 빚고 있다. 2008년 7월 양쪽 간 전투로 7명이 숨졌다. 2009년 4월 충돌 때는 사원에 있는 66개의 돌이 파손됐다. 지난 2월에도 무력 충돌이 빚어져 10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원은 캄보디아에서 접근하려면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힘들고 타이 영토를 통해 접근하는 게 훨씬 쉽다. 이 때문에 사원은 두 나라 사이의 긴장관계에 따라 개방과 폐쇄를 오가고 있다.

프레아비히어 사원은 타이와 캄보디아 사이 충돌의 현장일 뿐이다. 서로 침략하고 침략당한 두 나라의 역사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역사적으로 타이-캄보디아 관계에서 먼저 우위를 차지한 나라는 캄보디아의 고대 앙코르 왕국이었다. 앙코르 왕국은 크메르 제국의 황금기였다. 당시 자야바르만 7세(1181~1218)는 현재의 타이, 버마(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일부 지역까지 앙코르 왕국의 지배권을 확장하며 대제국을 건설했다. 타이가 국가로 형성된 13세기 이전에는 앙코르 왕국이 현 타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자야바르만 7세가 숨진 뒤 앙코르 왕국은 쇠락했다. 13세기 후반부터는 인도차이나반도의 왕국들이 세력권에서 벗어났다.

이후 타이족이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다. 1219년 타이족은 타이 중부를 장악한 뒤 크메르족을 공격하고 1257년 수코타이 왕국(1257~1350)을 건설했다. 13~14세기 타이족이 남하 및 동진 정책을 펴자 앙코르 왕국은 수차례 침략에 시달렸다. 결국 타이족 아유타야 왕조(1350~1767)의 공격을 받아 앙코르 왕국은 1431년 크메르 제국의 수도인 앙코르를 정복당한다. 앙코르 왕국이 현재의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긴 배경이다. 14세기 본격화된 타이족의 침공으로 앙코르 왕국은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캄푸치아’로 불리며 타이와 베트남의 침략에 시달렸다. 15세기 말 앙코르 왕국의 멸망을 초래한 게 타이족이다. 18세기 캄푸치아는 타이의 속국으로 전락해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훈센의 피로 나의 발을 씻겠다”

끔찍한 일화가 있다. 16세기 아유타야 왕국이 버마에 침공당해 혼란한 사이 크메르의 사타왕이 쳐들어왔다. 그 복수로 아유타야 왕국 나레수안왕은 크메르에 쳐들어가 라웨악왕을 참수한 뒤 그 피로 발을 씻었다고 한다. 2008년 7월 타이-캄보디아 분쟁 당시 현 타이 외무장관인 카싯 피롬야가 “훈센(캄보디아 총리)의 피로 나의 발을 씻겠다”고 말한 연원이다. 타이의 과거 식민주의적 시각이 반영된 발언이다. 이처럼 타이와 캄보디아의 갈등 역사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 타이-캄보디아 분쟁지역

» 타이-캄보디아 분쟁지역

꼬일 대로 꼬인 두 나라 역사를 더 얽히게 만드는 것은 국내 정치다. 타이 집권세력은 오는 6월 말이나 7월 초에 총선을 앞두고 있다. 이에 캄보디아와 긴장을 고조시켜 군사력을 과시하고 여론 결집을 노린다는 분석이 나왔다.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반탁신 성향의 아피싯 웨차치와 타이 총리가 민족주의를 부추겨 선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려 한다는 해석이다. 또 다른 분석도 있다. 타이 군부가 민족주의 세력과 손잡고 군부 중심으로 2006년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축출 이후 5년간 지속된 정치 위기를 해결하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정권으로서도 이 사안은 활용 가치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은 4월24일 “많은 분석가들은 두 나라의 분쟁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장된 면이 있다고 본다”며 “캄보디아 정부는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려고 역사적 경쟁자를 상대로 군사력을 과시하고, 캄보디아 훈센 총리는 자신과 불편한 관계인 타이 집권세력을 당혹스럽게 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사실 세계 최대 석조건물로 꼽히는 앙코르 유적은 세계인이 찾는 캄보디아인의 자존심이다. 크메르 왕국 이후 캄보디아의 국기가 수차례 바뀌었지만 어떤 국기에도 앙코르 사원의 모형이 빠진 적이 없다.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2008년 다녀온 소설가 유재현씨는 “캄보디아인은 비록 지금은 국경을 접한 타이보다 경제적으로도 못살고 국력이 뒤진다는 열등감이 있지만 앙코르 왕국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한데, 이런 정서를 민족주의가 들쑤셔서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프레아비히어 사원은 2008년 분쟁 때도 타이 국내 정치에 휘말렸다. 탁신 전 타이 총리가 캄보디아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이를 위해 이 사원을 양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08년 7월 당시 탁신의 측극인 사막 순다라벳 총리가 집권 중이던 타이 정부는 이 사원이 캄보디아 문화재라고 지지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외무장관이 공동성명에 서명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옐로셔츠’로 불리는 반탁신 세력은 ‘매국노 탁신을 처벌하라. 잃어버린 타이 영토를 되찾으라’고 요구했다. 타이-캄보디아 공동성명에 타이 외무장관이 서명한 것은 위헌이라고 헌법재판소에서 판결까지 나왔다. 결국 사막 총리가 물러나는 빌미가 됐다.

쉽지 않은 분쟁의 해결

이처럼 두 나라는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타이와 캄보디아 두 나라는 4월28일 7일간의 충돌 뒤에야 휴전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파니탄 와타나야곤 타이 정부 대변인은 “휴전 합의는 예비 단계며 현 상황이 지상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켜봐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양국 사이의 휴전회담은 4월27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막판에 타이 국방장관이 회담을 취소하는 홍역을 치렀다. 결국 이번 사태는 캄보디아에서 8명, 타이에서 6명의 군인이 숨진 뒤에야 끝났다. 타이인 4만5천 명, 캄보디아인 3만 명이 무력 충돌을 피해 가족과 함께 국경지대를 떠난 뒤다.

프레아비히어 사원은 힘없는 민초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1975~78년 크메르루주 공산정권 통치 당시 수십만 명이 학살과 내전을 피해 타이로 몰려들었다. 1979년 6월 타이 군사정부는 4만2천 명의 캄보디아 난민을 모아 버스로 태운 뒤 이 사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캄보디아 난민들이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캄보디아를 향해 아래로 내려가도록 명령했다. 난민들이 비틀대며 국경을 내려갈 즈음, 타이 군인들은 큰 돌들을 굴려 떨어뜨렸다. 그 아래에는 크메르루주 정권이 묻어놓은 지뢰가 있었다. 난민들은 사람들이 죽은 위를 밟고 지나 약 5km를 걸어서 당시 크메르루주와 전쟁을 벌이던 베트남군 진영으로 몸을 피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는 당시 3천 명이 숨지고 7천 명이 실종됐다고 밝혔다.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두고 되풀이되는 갈등은 국경선을 둘러싼 역사적 갈등이 치료되지 않는 한, 언제 다시 수많은 민초를 희생시킬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독도처럼 분쟁의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참고 문헌

‘태국-캄보디아 관계의 역사적 변화와 역동성: 2003년 1월 폭력사태를 중심으로’, 이동윤. . 2004.

‘캄보디아와 태국 간 프레아비히어 사원 분쟁’, 조흥국,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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