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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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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해 방콕의 폭탄은 터졌나

레드 셔츠가 ‘에어로빅 시위’ 를 하는 동안 5월 저항의 중심가에서 ‘마침’ 터진 폭탄…
아피싯 정부의 비상사태 연장 명분 살려줘
등록 2010-08-04 11:48 수정 2020-05-02 19:26
타이 방콕의 룸피니 공원에서 레드 셔츠들이 지난 4~5월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숨진 이들을 기억하려 ‘시체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타이 방콕의 룸피니 공원에서 레드 셔츠들이 지난 4~5월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숨진 이들을 기억하려 ‘시체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띠니 미 콘 따이!”(여기서도 사람이 죽었다!)

7월25일 일요일, 우기의 선선한 저녁께 타이 방콕 남부의 룸피니 공원에 삼삼오오 모여든 시민 수백 명의 외침이 이어졌다. 어떤 이는 레드 셔츠를 입었고, 어떤 이는 레드 밴드만 하거나 레드 신발만 신었다. 4∼5월 유혈 진압으로 숨진 90명의 사망자를 상징하려는 듯 수십 명은 군중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나름대로 ‘시체’임을 표현하려 애썼다. 실제 룸피니 공원은 5월 진압 당시에 격전지였고 인근에서 숨진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방콕의 레드 셔츠는 지금 ‘시체 퍼포먼스’를 벌이는 중이다. 누구도 유혈 진압의 책임을 묻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가운데 동료의 죽음을 기억하려는 이들에게 이날 ‘발칙한’ 계획이 하나 더 있었다.

“우리의 이번주 활동 첫 번째는 에어로빅, …현장에 도착하는 이들은 워밍업으로 뜀박질을 하자. 배드민턴 라켓이 있는 자는 배드민턴을 치고… 귀신 분장을 한 이들은 경찰 앞에서 운동을 하자. …만일 에어로빅이 저지당하면 즉각 뜀박질로 들어가라. 경찰을 에워싸며 계속 뛰어라. 오후 6시 타이 왕국의 국가가 울려퍼지면 꼿꼿이 서서 부르다 국가가 끝나면 모두 바닥에 드러누워 이렇게 외치자. ‘여기서도 사람이 죽었다!’라고.”

에어로빅·달리기·배드민턴 저항

소셜 미디어 ‘페이스북’을 통해 퍼져나간 이 메시지가 수백 명의 레드 셔츠를 룸피니 공원으로 이끌었다. 레드 셔츠가 운영하던 잡지·라디오·방송은 물론 비판적 언론 대부분이 강제 폐쇄된 가운데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는 효과적인 동원 수단이다(물론 페이스북도 감시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인근 주민들이 이따금 집단 에어로빅댄스를 추는 룸피니 공원에서 그 에어로빅을 패러디하며 시위하는 레드 셔츠는 지난 주말에도 5명 이상 모이는 걸 금지한 비상사태령을 피해가는 방식으로 시위를 해왔다.

앞서 7월11일에는 방콕 중심가 랏차쁘라송 교차로에서 ‘랏차쁘라송’이라 적힌 거리 입구 간판 받침대에 붉은 끈을 다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시위를 주도한 활동가 솜밧 분나르마농은 경찰에 연행된 뒤 풀려났다. 18일에는 홈리스 문제를 다루는 비정부기구(NGO) 이사라촌 재단의 활동가 나띠 손와리가 같은 장소에서 “나는 이곳에서 죽은 사람을 봤다”는 구호를 외치다 사복 경찰들에게 사지가 들려 잡혀간 뒤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사지가 들린 채 그는 “나는 혼자 왔다”고 외치며 5명 이상 모일 수 없는 비상사태를 조소했다. 타이 북부 도시 치앙라이에서는 학생 5명이 유사한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돼 조사받았고, 이 중 일부는 7월30일 시위 정국을 관할하는 비상사태해결센터(CRES)로, 다른 일부는 8월2일 경찰서로 출두하게 된다. 이들 중 한 명인 16살의 고등학생은 7월19일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에게 노트북을 빼앗겼다고 그의 어머니가 전했다. “치앙라이 학생들이 소년감호소에 수감이라도 된다면, 우린 치앙라이로 올라가 항의시위를 벌일 것이다.” 계속되는 일요시위를 주도하는 솜밧이 에어로빅을 마친 뒤 말했다.

그러나 이런 산발적 퍼포먼스조차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우려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방콕 레드 셔츠들이 시체 퍼포먼스를 벌이던 7월25일 오후 5시50분께, 에어로빅댄스가 끝나기 무섭게 룸피니 공원에서 3km가량 떨어진 랏차쁘라송 ‘빅시’(Big C) 슈퍼마켓 앞 버스정류장에서 폭탄이 터졌다. 쓰레기통 안에 감춰진 폭탄은 버스를 기다리던 시민 타왓차이 통막(51)의 목숨을 앗아갔고 행인 10명이 다쳤다. 지난 4~5월 수만 명의 레드 셔츠가 가득 메우던 그 거리, 특히 5월19일 시위 진압 막바지에 불타오른 센트럴월드 쇼핑몰의 건너편이자 마찬가지로 불타오른 대형 슈퍼마켓 빅시 앞에서 터진 폭탄은, 누구의 소행이더라도, 복합적 메시지를 담은 ‘정치 폭탄’임이 별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집권당 선거 승리도 가린 폭발

이날 터진 폭탄은 오히려 아피싯 정부의 비상사태 유지에 좋은 명분을 안겨주었다. 정부 대변인 빠니탄 와따나야꼰은 “이날의 폭탄은 비상사태 유지가 불가피함을 일깨워주었다”고 말했고, 국방부 장관 프라윗 웡수완은 치안을 더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비상사태 연장 반대에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를 보이던 여론조사 결과도 달라졌다. 폭발 사건 직후 수안두짓라자밧대학이 실시한 조사는 비상사태 지지율 47%를 보이며 비상령 유지에 힘을 실어줬다.

최근 아피싯 정부는 비상사태 해제 압력을 국내외에서 받아왔다. 한 예로 7월5일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은 진정한 화해를 위해 타이 정부가 레드 셔츠 지도부에 대한 테러리즘 혐의를 기각하고 비상사태를 해제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다음날 정부는 방콕과 동북부 19개 지역의 비상사태를 연장했다. 정부 주도로 구성된 ‘전국개혁위원회’의 아난드 파냐라촌 위원장조차 최근 비상사태 해제를 권고한 바 있지만, 29일 해제된 6개 지역을 포함해 9개 지역에서만 비상사태가 해제됐을 뿐이다. 7월28일 현재 전국 10개 지역(레드 시위 이전인 2004년부터 폭탄 테러가 있던 남부 3개 이슬람 분쟁 주를 포함하면 총 13개 지역)에 여전히 비상사태를 유지하고 있는 정부는 만에 하나 다른 지역은 비상사태 해제를 검토하더라도 방콕은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흥미로운 건 옐로 셔츠인 민주주의민중연대(PAD) 시위대 수백 명이 7월27일 오후 방콕 유네스코 건물 앞에서 비상사태령에도 아랑곳없이 시위를 벌였다는 점이다. 캄보디아 정부가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해 자국 소유로 판명받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브라질에서 진행 중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회의에 문화유산 후보로 올려놓자 PAD가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PAD는 이 사원의 소유 문제를 두고 극우적 캠페인을 벌이며 2년 전 양국의 무력 분쟁까지 촉발한 바 있다.

아무튼 PAD처럼 비상사태령을 무시할 수 없는 레드 셔츠는 법망을 피해가는 옥외 시위를 여러 형태로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레드 셔츠는 8월1일 민주기념탑 부근에서 퍼포먼스와 토크쇼 등을 벌일 계획을 페이스북을 통해 알리고 있다. 아울러 레드 셔츠 안에서 급진적 입장을 가진 ‘레드 시암’ 조직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폭탄은 같은 날 치러진 방콕의 제6선거구 보궐선거에서 득표율 8%포인트 차로 당선된 집권 민주당 파닉 비킷스렛 후보의 승리에 쏠린 이목도 분산시켰다. 타이 영자 일간지 은 ‘폭탄이 파닉의 승리에 초를 쳤다’고 제목을 달았다. 민주당은 사실 독점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와 접전을 벌인 레드 셔츠 지도부이자 프어타이당이 공천한 코캐우 피쿨통(43) 후보는 테러리즘 혐의로 방콕 리멘드 감옥에 수감 중이고, 선거운동을 위한 보석 석방을 계속 거부당해왔다.

“이 사회에 불의가 있다고 믿는다면 유권자가 나를 찍어주길 바란다.” 선거 직전 기자와 가진 옥중 인터뷰에서 그는 선거운동을 거의 못하지만 결과에는 승복하겠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불공정한 선거운동을 업고 이겼다는 눈길을 받는 민주당의 승리는 투표 종료 직후 폭탄 뉴스까지 터져 더욱 어색해진 셈이다.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랏차쁘라송 거리가 쇼핑가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 여전히 대형 백화점이 밀집한 시암 스퀘어에는 사람들이 북적이지만, 랏차쁘라송 교차로에서 펫차부리 방향으로는 예전 같은 교통 체증이 보이지 않는다. 68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 돌아가는 이 구역에서 터진 폭탄의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아울러, 폭탄이 터지는 방콕 도심이 또다시 불타는 건 ‘만일’이 아니라 ‘언제’의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우려스럽게 전망한다. 극심한 서열 체제와 소수 엘리트가 독점하는 타이 사회에 순응해온 사회 구성원 다수의 눈과 귀가 트여버린 이상, 그들이 다시 순응하는 인간형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 법망을 피해가며 끈질기게 모여들어 퍼포먼스를 벌이고 에어로빅댄스를 추는 군중의 모습은 분명 그 신호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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