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학자들이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 극우에 맞서 지금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2년 전 겨울인 2008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는 프랑스와 일본의 수교 15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프랑스 현지에서 개최됐다. 그 일환으로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라는 싱크탱크에서는 수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재단, 역사 왜곡 지원 활동
이 행사는 ‘프랑스-일본 재단’(Fondation Franco-Japonaise)이 후원을 통해 자금 지원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외무부도 프랑스-일본 수교 150주년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이 학술행사에 공동 후원자로 참여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문제는 이 행사의 주 후원기관인 프랑스-일본 재단의 실체였다. 이 재단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의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사사카와 료이치라는 극우 인사가 일본 국내외에 설립한 수십 개 ‘사사카와 재단들’ 중 하나였다.
사사카와는 20세기 초반 이탈리아 독재자인 무솔리니를 따라 일본에 파시스트당을 건설하려던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인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혐의로 종전 뒤 A급 전범으로 기소돼 수감 생활을 했다.
그러나 출옥 뒤 일본 극우 정치권의 지원하에 경정 도박사업을 독점 운영하면서 천문학적인 자금을 축적하게 된다. 이러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일본 극우 세력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1962년 일본선박진흥회라는 공익재단을 설립해 운영한다.
일본선박진흥회는 나중에 일본재단(Nippon Foundation)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이들은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도 수많은 유사 재단을 설립하고, 이 재단들을 통해 각종 학술문화 행사, 연구 활동 등을 지원하며 사사카와의 극우 행적을 미화하고,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 왜곡을 적극 지원해왔다.
그런데 프랑스 외무부가 이러한 사사카와 관련 재단이 후원하는 학술행사에 참여한다고 하니 프랑스 학계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결국 프랑스의 일본학 및 동아시아학 관련 학자 50여 명은 행사 개최를 몇 주 앞두고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공동성명서를 전격 발표하게 된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그동안의 학계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사사카와의 행적을 고발하면서, 프랑스 정부가 사사카와 관련 재단이 후원하는 이번 행사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학계의 이례적인 강한 논조의 성명을 접한 프랑스 외무부는 상당히 당황했다. 그래서 행사 개최를 불과 일주일여 앞둔 시점이었음에도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무부 장관은 지체 없이 행사 참여 재검토를 지시했고, 프랑스 외무부는 행사 개최 직전까지 고심하다가 마침내 이 행사를 공동 후원하지 않겠다는 최종 결정을 내린다.
결국 이 행사는 처음 기획과는 달리 프랑스 외무부의 이름은 빠진 상태로 개최됐고, 이후 논란은 프랑스 학계와 외교가의 후일담으로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질 무렵인 2009년 가을, 사사카와 재단 쪽은 뜻밖의 일을 벌인다. 당시 서명 작업을 주도한 학자 중 한 명인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국제관계연구소의 카롤린 포스텔 비네 박사를 지목해, 프랑스 학자들의 공동성명서가 사사카와 료이치와 그가 세운 재단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프랑스 법원에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보복성 손해배상 소송 “학문 자유 위협”특히 당시 성명에 참가한 학자 50여 명 전체가 아닌 단 한 명의 학자에게만 ‘본보기’ 성격의 소송을 제기하고, 소송 통보 과정에서도 카롤린 박사의 주거지나 사무실이 아닌 공개적인 교내 학술행사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소장을 전달하는 모욕적인 방법을 택했기에 파문은 더 컸다.
이에 프랑스 내 학술연구단체들은 일제히 강력하게 반발했다. 프랑스 정치학회는 지난 2월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공익재단이 연구자의 학술 활동에 대해 이런 소송을 벌인 사례는 거의 전무하며, 소송 내용이나 과정 또한 학문 연구의 자율성을 억압하기 위한 본보기 성격이 짙다”고 항의했다. 프랑스 일본학회도 성명을 발표해 “사사카와 료이치의 극우 행적은 학문적으로 이미 수많은 학자가 검증한 사안인데, 이런 학문적 사실에 근거한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 “학문의 자유를 위협하는 행위를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프랑스의 역대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대부분을 배출해온 파리정치대학 교수 및 연구자들도 이례적으로 기명 공동성명을 내 “우리는 카롤린 포스텔 비네 박사를 지지하며, 연구 활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연대할 것”이라고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프랑스의 한 일본학 연구자는 “사사카와 관련 재단 쪽의 이번 대응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하던 그들의 역사 왜곡이 위기에 처했다는 방증”이라며 “서구 국가 중 일본에 가장 우호적이던 프랑스 학계에서의 영향력 행사에 균열이 생긴 데 대한 보복 성격이 짙다”고 말했다.
사사카와 관련 재단이 제기한 소송의 희생양이 된 비네 박사는 소송 문제로 벌써 수개월째 정상적인 연구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밖에도 30년 넘게 일본을 연구해온 프랑스의 대표적인 일본학 연구자로서 받게 된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 압박은 상당하다.
“일본재단에 관대한 한국, 의외다”“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누리는 학자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성실한 감시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잘못된 것이 있을 때에는 ‘용감한 고발자’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특히 이번 사건에 대한 프랑스 법원의 판례는 앞으로 다른 나라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사사카와 재단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나오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 학자들을 위해서라도 학문의 자유와 역사적 진실을 지키기 위해 힘들지만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비네 박사의 말이다. 그는 또 “한국의 일부 대학들에서 사사카와 관련 재단의 연구자금 유입과 관련한 논란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 사회가 일본 극우 세력의 과거사 왜곡을 뒷받침하는 사사카와 관련 재단에 관대하다는 점은 의외”라고 말한다.
일본 극우의 역사 왜곡에 가장 경계심을 가져야 할 한국 사회가 오히려 프랑스 사회보다 이 문제에 둔감하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다. 최근 유명 한류 연예인이 사사카와 가문의 일본재단을 사실상 홍보하는 역할을 맡기로 한 것은 이 문제에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둔감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비네 박사를 포함한 50여 명의 프랑스 학자들은 지금 1898년 에밀 졸라가 그러했듯이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외침으로 해외에서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 극우 세력을 고발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외침에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떤 반향으로 연대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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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프랑스)=윤석준 통신원 파리정치대학 유럽학연구소 박사과정 연구원 sem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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