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웰컴 투 남아공…복수혈전의 나라

백인우월단체 농장주 살해사건으로 흑백갈등 고조… 토지개혁 둘러싼 갈등도

제806호
등록 : 2010-04-13 11:18 수정 : 2010-04-16 10:58

크게 작게

“우리는 마침내 정치적 해방을 이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을 빈곤과 박탈과 차별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는 완전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할 것임을 밝힙니다. 우리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든 국민이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함께 걸어가는 사회를 만들 것을 약속합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을 경험하는 일이 다시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4월6일 테르블랑슈 살인 용의자들에 대한 첫 재판이 열린 벤테르스도르프 지방법원 앞에서 경찰들이 흑인 군중과 테르블랑슈 지지자들을 떼어놓기 위해 철조망을 치고 있다. REUTERS/ SIPHIWE SIBEKO

AWB, 백인만의 국가를 꿈꾼다

1994년 5월10일, 76살의 노투사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화합과 공존을 역설했다. 수십 년간 이 나라를 찢어놓았던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지배집단의 인종분리주의 정책)에 대한 ‘공식적인’ 사망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지난 4월3일. 한 백인이 남아공 북서쪽 벤테르스도르프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흑인 노동자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주검은 머리와 얼굴이 흉기와 둔기로 얻어맞은 상처투성이였고, 아랫도리는 무릎까지 벗겨져 있었다. 남아공은 살인·강도 등 강력범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일 만큼 치안이 불안한 곳이지만, 이 사건의 파장은 단순한 살인 사건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피살자는 외젠 테르블랑슈(69). 남아공의 악명 높은 백인우월주의단체 ‘아프리카너저항운동’(AWB·Afrikaner Weerstandsbeweging)의 공동 창설자였다.

남아공 경찰은 범행 용의자들이 피살자 농장에 고용돼 일하던 28살 청년과 15살 소년이라고 밝혔다. 임금체불 때문에 테르블랑슈와 다툼을 벌여오다 해결되지 않자, 이날 농장을 찾아가 마침 잠을 자고 있던 ‘나쁜 농장주’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테르블랑슈의 농장에서 받던 월급은 고작 300랜드(약 4만6천원)였다. 남아공 검찰은 즉각 이들을 살인 및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했다.


AWB는 남아공에 백인만의 국가를 건설하고 흑인에게는 임시 노동자 자격만 부여할 것을 주장해온 극우 백인우월주의 단체다. 1993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협상장에 폭탄 차량을 돌진시켰고, 흑백 통합 정부가 들어선 이듬해에도 보푸타츠와나에서 21명을 숨지게 한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보푸타츠와나는 이전 백인 정부가 만든 흑인국가였다가 남아공에 통합된 지역이다. 이 단체의 이름에 들어간 ‘아프리카너’는 남아공의 정치·경제적 실권을 장악한 네덜란드계 토착 백인인 ‘보어’(농민이란 뜻)를 가리킨다. AWB의 대부였던 테르블랑슈는 1997년 흑인 경비원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뒤 6년형을 선고받고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복역한 바 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테르블랑슈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놓으려던 선동가였다”고 평가했다.

폭력 사태 번질까 노심초사하는 정부

이번 사건은 얼기설기 봉합돼온 남아공의 분열과 차별의 상처를 다시 헤벌려놓았다. 그렇게 벌어진 상처 틈에선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구조화된 사회·경제적 모순이 고름처럼 흉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사건 몇 시간 만에 신속히 성명을 내 “모든 남아공 국민에게 진정할 것을 호소한다”며 “선동가들이 이번 사건을 인종 혐오를 촉발하거나 부채질하는 데 이용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또 “범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어떤 식으로 정당화하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못박았다. 주마 정부의 장관들은 이 사건이 인종 간 폭력 사태로 번질까 노심초사하며 테르블랑슈의 빈소를 찾았다.

흑인 사회에서는 테르블랑슈의 피살을 인과응보로 여기는 분위기다. 남아공 최대 일간지 <더 스타>는 “흑인이 살해 용의자들을 ‘영웅’으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AWB의 앙드레 비사기 사무총장은 사건 다음날인 4월4일 “우리는 행동을 취할 것이며, 구체적 행동은 5월1일 총회에서 결정할 것”이라며 보복을 다짐했다. 다음날 AWB의 피터 스테인 대변인이 “어떤 형태의 폭력적 보복 행위도 하지 않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인종 간 증오심과 사회적 긴장까지 가라앉은 것은 아니다. 또 인종갈등이 백인 쪽의 도발에서만 비롯된 것도 아니다. 한때 만델라의 투쟁조직이었으며 지금은 남아공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청년동맹 의장 줄리우스 말레마도 최근 정치집회에서 “보어를 쏴 죽여라”라는 후렴구가 들어간 투쟁가를 즐겨 부르다가 법원의 금지 명령을 받았으나 불응해왔다. AWB는 이 노래가 백인에 대한 테러를 조장하며 테르블랑슈 살해 사건도 이런 분위기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지난 4월6일 살인 사건 용의자들에 대한 첫 재판이 열린 벤테르스도르프 지방법원 앞에서도 흑인과 백인 사이에 한때 일촉즉발의 긴장 상황이 재현됐다. AWB 회원 등 백인들은 법원 주변에서 과거 백인 정권 시절 남아공 국가였던 <남아프리카의 외침>을 부르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앳된 얼굴의 한 어린이는 붉은색 바탕 가운데 흰색 원 안에 ‘ㄱ’자 모양의 검정색 꺾쇠 3개가 붙어 독일 나치 깃발을 연상시키는 AWB의 깃발을 펼쳐들고 있었다. 흑인 용의자들을 지지하는 흑인도 문제의 투쟁가를 부르며 맞섰다. 경찰이 양쪽 사이에 가시 철조망을 둘러 접촉을 차단했으나, 한 백인 여성이 흑인 시위자에게 음료수를 뿌리면서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남아공의 흑백갈등은 경제적·사회적 격차가 큰 요인이다. 4월6일 법원 앞에서 테르블랑슈 살인 용의자 중 한 명을 본 흑인 군중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REUTERS/ SIPHIUE SIBEKO

흑백 간 소득 격차 7배

남아공 정부는 4월7일 ANC 청년동맹을 비롯한 산하단체에 백인을 자극하는 일체의 행위를 삼가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지난해 6월 집권한 흑인 대통령 제이컵 주마의 리더십이 확고하지 못한 현실에서, 흑백 어느 쪽도 현실에 대한 불만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범아프리카청년의회(PAYCO)는 다음날 성명을 내 “흑인 농장 일꾼들은 남아공의 민주정부 아래에서도 소똥을 먹고 짐수레나 끄는 존재로 만들어져왔다”며 “흑인에 대한 야만적 처우가 계속되는데도 전국적인 소동이 벌어지지 않다가, 백인 한 명이 죽자 정부 각료가 앞다퉈 달려가고 온 나라가 이중 기준의 가식에 동참하고 있다”고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 단체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테르블랑슈의 장례식이 치러진 4월9일에도 “(극우 인종주의 단체인) AWB 지도자의 주검을 아프리카 땅에 묻는 것은 아프리카에 대한 모욕”이라며 바다에 수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아공 정의화해연구소(IJR)가 지난해 발표한 ‘사회분열 실태’ 여론조사 결과는 남아공이 사회 통합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응답자의 46%는 “다른 인종과 결코 어울리지 않겠다”고 답했고, “가능하다면 다른 인종과 대화하겠다”는 사람은 28%에 불과했다. 또 응답자의 39%는 “다른 인종을 신뢰할 수 없다”고 답했고, 59%는 “다른 인종의 생활양식과 풍습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남아공의 뿌리 깊은 인종갈등은 사회·경제적 수준 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아공은 전체 인구 4930만 명 중 흑인 인구가 79%로 절대다수다. 백인과 혼혈이 각각 9% 정도다. 그러나 흑백 간 소득수준은 인구 비율과 정반대다. 중립 성향의 민간 싱크탱크인 남아공인종관계연구소(SAIRR)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통계조사를 보면, 2008년 국민 1인당 연간소득이 3만2599랜드(약 499만원)였다. 이를 인종별로 세분해보면, 백인의 연간소득은 평균 13만5707랜드(약 2076만원)인 반면 흑인은 1만9496랜드(약 298만원)에 불과했다. 흑백 간 소득 격차가 7배에 이른다. 실업률도 심각하다. 지난해 4분기 남아공의 공식 실업률은 23.6%인데, 구직 활동을 포기한 실질적 실업까지 합치면 거의 40%에 이른다. 백인 실업률이 4.6%에 불과한 반면, 흑인 실업률은 31.6%에 이른다. 이는 남아공 내 경작지와 공장 등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소수 백인이 독차지하는 사정과 무관치 않다. 남아공에서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1년간 백인 농장주와 흑인 노동자 간 분쟁으로 1248명이 숨졌다. 흑인 원주민을 위한 토지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이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월드컵 보이콧·테러 위협도

제이컵 주마 정부의 농촌개발토지개혁부는 지난 3월 ‘전략계획 2010~2013’이라는 제목의 토지개혁 방향 보고서를 발표했다. 두 가지 방안의 미래 토지 이용 모델을 제안한 것이었다. 첫째는 모든 생산 가능한 토지를 국가 자산으로 하되, 그 이용에 대한 대가로 노역이나 현물 납부 대신 현금지대의 허용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 둘째는 현행 토지소유권 제도를 인정하되, 토지 소유에 상한을 두는 쪽으로 관련 정책과 법규를 재검토한다는 것이 뼈대다. 백인 지주들은 이 조처가 자신들의 사유재산인 토지를 국가가 무상몰수해 국유화하는 공산주의식 토지개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웃나라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정권이 2008년 11월 토지개혁을 하면서 백인 소유 농장을 몰수한 것을 의식한 것이다.

물론 남아공 백인 지주들이 믿는 구석도 있다.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재판소는 “짐바브웨의 토지개혁은 인종차별적 행위이므로 불법”이라며 몰수 농장을 지주들에게 돌려주라고 판시한 바 있고, 남아공 법원도 최근 이 판결을 수용했다. 또 남아공 인종관계연구소는 정부의 토지 국유화 방안은 농업 투자와 고용 격감, 중소 농촌공동체 파탄, 식량생산 급감과 이농 현상 가속화, 재정적자 급증 등의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남아공은 오는 6월 지구촌 최대의 축구 축제인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있다. 일부에선 공공연한 보이콧과 테러 위협도 나온다. 아파르트헤이트 종막 16년, 남아공은 지금 화해와 공존의 통합 사회로 나아갈지,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더욱 키우는 분열 국가로 전락할지 중대한 시험대에 서 있다.

조일준 기자 한겨레 국제부문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