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초대형 블록버스터 첩보물이 한 달 넘게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화려한 출연진에 국경을 넘나드는 스릴이 있다. 음모와 배신, 암살과 추적, 그리고 힘있는 각국 정치인들의 카메오 출연까지. 흥행작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췄다. 영화보다 훨씬 영화 같은 현실이다.
지난 1월20일 오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특급호텔 알부스탄 로타나 230호실에서 중년의 한 사내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별다른 외상은 없었다. 심장마비에 의한 자연사일까? 하지만 주검의 신원을 확인한 두바이 경찰 당국은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숨진 이는 팔레스타인 저항단체 하마스의 고위 인사인 마무드 마부(50)였다.
마부는 1960년 2월14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의 자발리아 난민캠프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중반 중학교를 중퇴하고 일찌감치 반이스라엘 운동에 뛰어든 그는 1978년 ‘이슬람형제단’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가담했다. 1987년 고향인 자발리아에서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제1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직후 마부는 하마스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인티파다가 한창이던 1989년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살해하는 데 간여한 직후 망명길에 올랐다. 이집트와 리비아를 거쳐 시리아에 정착한 그는 최근까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무대로 활동해왔다.
이스라엘 당국은 그동안 마부가 “이란 쪽에서 무기를 구해 가자지구로 밀반입시킨 책임자”라고 지목해왔다. 이번에 두바이에 간 것도 “이란을 통해 무기를 밀매하기 위해서”라는 게다. 하마스 쪽도 이를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불법 무기 거래 시장은 ‘음산하고도 위험한 세계’로 통한다. 계약이 틀어지면 때로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오랜 세월 그 세계에 몸담았던 마부의 목숨을 노릴 만한 세력이 적지 않을 것이란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비난의 화살은 오직 한곳으로 모이고 있다. 바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다. 정황은 충분하다.
우선 모사드는 지끔껏 여러 차례 마부의 목숨을 노렸다. 몇 차례 독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1999년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그를 납치해 이스라엘로 압송하다가 막판에 놓치기도 했다. 가자지구에서 날아드는 로켓을 이유로 지상군을 동원해 전면 침공까지 나섰던 이스라엘이다. 그리로 향하는 무기를 대주고 있는 마부는 첫손에 꼽을 만한 눈엣가시였을 게다. ‘범행 동기’는 충분하다는 얘기다.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두바이 경찰 당국이 일찌감치 “모사드의 소행임이 99% 확실하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두바이 경찰이 지금까지 밝혀낸 사건의 전모를 재구성해보자.
지난 1월18일 다마스쿠스 공항에 ‘마무드 압둘 라오프 모함마드’란 이름의 남성이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분을 위장한 마부였다. 그는 에미리트항공 912편에 탑승해 두바이로 향했다. 영국 〈BBC방송〉은 2월18일 인터넷판에서 “어딜 가든 경호원과 동행하는 마부가 혼자서 비행기에 오른 까닭은 같은 항공편의 또 다른 좌석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경호원들은 이튿날 두바이에서 마부와 합류하기로 돼 있었단다.
마부가 두바이로 향하고 있을 무렵인 이날 밤 12시께, 독일 여권을 지닌 미하엘 보덴하이머란 남성과 영국 여권을 지닌 폴 존 킬리란 남성이 두바이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30여 분 뒤엔 아일랜드 여권을 손에 쥔 개일 폴러드란 여성이 역시 아일랜드 여권 소지자인 케빈 데이브런이란 남성과 함께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이들은 각각 따로 택시를 타고 두바이 시내의 서로 다른 호텔에 투숙했다. 이후에도 아일랜드·영국·프랑스·독일·오스트레일리아 여권을 지난 ‘관광객’과 ‘사업가’ 20여 명이 파리·뮌헨·카타르 등지를 거쳐 속속 두바이로 입국했다.
마부는 1월19일 오후에야 두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두바이 경찰 당국이 공개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화면을 보면, 이날 오후 3시17분께 입국 수속을 마친 뒤 짐을 찾는 마부의 곁에는 티셔츠 차림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성이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미행조였다. 공항을 빠져나온 마부는 곧장 인근 알부스탄 로타나 호텔로 이동했다. 체크인 시각은 오후 3시25분께. 그가 투숙 수속을 하고 있는 주변에선 테니스 라켓을 든 남성 2명이 배회하고 있었다. 수속을 마친 마부가 객실 안내요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그중 1명도 올라탔다. 마부의 방 번호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게다.
그로부터 약 30분 뒤, 알부스탄 로타나 호텔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 호텔 237호실을 예약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마부가 투숙한 230호실 맞은편 방이었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한 마부는 짐을 부린 뒤 곧 외출에 나섰다. 그가 방을 비운 새 4명의 남성이 미리 준비한 열쇠로 문을 따고 마부의 방으로 잠입했다. 마부가 객실로 돌아온 것은 이날 저녁 8시30분께. 두바이 경찰 당국은 “암살자들이 마부를 급습해 베개 등으로 질식시켜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입국한 지 5시간30분 남짓 만의 일이다.
공개된 호텔의 CCTV 화면을 보면, 이날 저녁 8시52분께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로 지목된 남녀 한 쌍이 유유히 호텔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마부 암살 작전은 마무리됐다. 암살범들은 살해 현장을 빠져나가면서 방문에 ‘방해하지 마시오’란 표식을 걸어두는 치밀함까지 보였단다. 아랍에미리트 영자지 는 2월24일 인터넷판에서 경찰 당국자의 말을 따 “19시간 남짓 두바이에서 ‘작전’을 펼치는 동안 암살범들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선불제 휴대전화 7대를 이용해 서로 연락을 취했으며, 역시 남의 명의로 발급받은 신용카드 17개를 사용했다”며 “CCTV 화면에 모습이 찍힐 때마다, 용모와 복장을 지속적으로 바꾸는 등 신분 위장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전했다.
‘작전’이 치밀했던 만큼 동원된 인력도 대규모다. 애초 11명으로 알려졌던 용의자는 수사가 진행되면서 18명으로 늘더니, 두바이 경찰 당국이 3차 수사 결과를 발표한 2월24일엔 신원이 확인된 용의자만 26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두바이에 들고 나기 위해 사용한 것은 각각 영국(12명)·아일랜드(6명)·프랑스(4명)·오스트레일리아(3명)·독일(1명) 여권이었다. 는 두바이 경찰 당국자의 말을 따 “이 가운데 23개는 남의 명의를 도용해 공식적으로 발급받은 ‘진품’이고, 위조된 여권은 3개에 불과하다”며 “명의를 도용 당한 이들 상당수는 현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이중 국적자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충격적이다. 공포를 느낀다.” 이스라엘 북부 나쇼림 키부츠에서 살고 있는 영국계 이스라엘인 폴 존 킬리는 마부 암살 사건 용의자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직후 현지 일간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근 몇 년 새 여권을 잃어버리거나 외국 여행을 한 일도 없다”며 “암살사건 수사 발표에 내 이름이 나온 것을 본 뒤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 두바이 당국이 ‘용의자’로 지목한 마크 데니얼 스클라는 현지 텔레비전 과 한 인터뷰에서 “이러다가 700만 이스라엘 국민 모두의 이름이 도용되는 거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모사드가 명의를 도둑질해 여권을 만들거나, 위조한 여권을 사용한 전례는 부지기수다. 1973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작전 도중 붙잡힌 실비아 파라엘 요원은 캐나다인 사진기자 퍼트리샤 록스버그 명의로 된 여권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함께 붙잡힌 다른 요원들도 각각 영국과 프랑스 여권을 사용했다. 또 1997년 요르단 암만에서 하마스 최고지도자 칼레드 마샬을 독살하려다 체포된 모사드 요원 2명도 캐나다 여권을 사용했다.
두바이 경찰의 수사가 급물살을 타던 지난 2월21일 영국 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 1월 초 메이어 다간 모사드 국장에게서 마부 암살 계획을 전해듣고, 이를 최종 승인해줬다”고 전했다. 1997년 칼레드 마샬 독살 미수 사건 당시에도 이스라엘 총리는 베냐민 네타냐후였다. 신문은 모사드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의 말을 따 “마부 암살 사건의 여파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모사드 지휘부는 요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일단 중동 일대에서 비슷한 첩보 작전을 잠정 중단하기로 한 상태”라며 “다간 국장의 자리도 위태로워 보인다”고 전했다. 마부 암살의 배후에 모사드가 있음을 기정사실화한 게다.
‘첩보 스릴러’에 배신이 빠질 수 없다. 두바이 경찰 당국은 이미 마부 암살 직후 요르단으로 도주했던 팔레스타인인 용의자 2명의 신병을 넘겨받아 범행 가담 여부를 추궁하고 있다. 시리아 당국도 다마스쿠스에서 마부의 측근을 붙잡아 사건 연루 여부를 캐고 있다. 내부 정보가 흘러들지 않고는 오랜 도피 생활로 신분 위장에 치밀한 마부를 암살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이들이 조만간 입을 연다면, 암살의 전모가 드러날 수도 있을 터다.
암살의 배후에 모사드가 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음에도 이스라엘 정부는 짐짓 여유를 부리고 있다. 용의자들이 사용한 여권의 발행국가 정부는 자국 주재 대사를 소환하는 등 상황 파악에 나서고 있지만, 이스라엘 쪽에선 “증거가 없지 않느냐”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아비그도르 리에베르만 외교장관은 2월2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일랜드·영국 외교장관과 잇따라 만나 “언론 보도 내용을 빼고 이스라엘이 이번 사건에 관련돼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애초 사건 발생 직후만 해도 리에베르만 장관은 ‘전략적 모호성’을 들먹이며 “정보 활동과 관련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게 관행”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사드 배후설’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게다. 하지만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파문이 커지자, 슬며시 적극적인 부정 쪽으로 말이 바뀌고 있다. 이를 두고 는 2월23일 인터넷판에서 “지금 리에베르만 장관은 (모사드의 활약상을) 떠벌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마부는 절명했다. 암살 용의자는 전원 무사히 도주했다.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긴 했지만, 마부 암살 작전을 실패작으로 보긴 어렵다. “모사드보다 낫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치밀하게 사건을 파헤치고 있는 두바이 경찰 당국이 더 구체적인 수사 결과를 내놓기 전까지, ‘모사드 배후설’은 그야말로 ‘설’에 불과하다. 그래서다. 과거 모사드가 벌인 여러 사건과 마찬가지로, 지금으로선 마부 암살 사건 역시 ‘영구 미제’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권 파동’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과거의 경험 탓이다. 해당국 정부는 한동안 ‘주권 침해’라며 목소리를 높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스라엘의 든든한 우방국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하긴, 어디 이스라엘뿐인가. 국제법 절차를 무시하고 전쟁을 벌이거나, 멋대로 테러 혐의자를 고문·구금·처단하는 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로선 쏟아지는 비난이 억울할 법도 하다. 미국이 이번 사건에 대해 아예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외국의 정보기관이 마부 암살에 책임이 있다면 당연히 국제법을 무시한 ‘초법적 처형’에 해당한다.” 는 2월20일치에서 필립 앨스턴 유엔 초법적 처형 관련 특별보고관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앨스턴 보고관은 “설령 범죄에 연루된 혐의가 있는 인물이라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체포해 기소해야 하며, 자의적으로 냉혹하게 살해한 것은 어떤 법적 정당성도 있을 수 없다”며 “이런 식의 정치적 살인은 국제법의 근간을 뒤흔들고, 갈등의 불길을 확산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핵무장·유엔 무시 ‘깡패국가’ 버릇은 언제쯤영국 은 2월19일 인터넷판에 올린 기고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마침내 국제사회가 ‘깡패국가’에 단호히 맞서야 할 때가 왔다. 몰래 핵무장을 하고, 유엔의 각종 제재 조처를 무시하고, 일삼아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반인도적 인종분리 정책을 유지하고, 국제법을 어겨가며 정치적 반대자를 표적 암살하는 행태를 더 이상 두고 봐선 안 된다. …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언제쯤이나 이스라엘을 침공할 겐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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