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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을 위한 아메리카는 없다

서브프라임 위기로 급증한 미국의 노숙인… 100명에 1명꼴 추정되나 연방 공식 통계도 없어

제787호
등록 : 2009-11-24 12:01 수정 : 2009-11-2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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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18일 미 동부 로드아일랜드주 크랜스턴 지역의 쉼터 앞에서 한 노숙인이 처연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물고 있다. REUTERS / BRIAN SNYDER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는 ‘천사들의 도시’로 불린다. 미국 안에서도 부자가 많이 살기로 유명한데, 약 380만 인구 가운데 ‘백만장자’만도 약 25만 명에 이른단다. 그 도시의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노숙인의 수도’가 그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1월12일치에서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만 노숙인이 10만 명을 넘어섰다”고 전했다.

LA는 노숙인의 수도, 1만5천여 명 집 잃어

지난 11월2일 오후 6시,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자리한 ‘건강한 공동체를 위한 센터’(CHC)에서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라켈 롤닉 유엔 주거권 특별보고관이 참석한 노숙인 관련 ‘타운홀 미팅’이 열린 게다. 브라질 출신 건축가인 롤닉 특별보고관은 지난해 5월 임명된 뒤 서브프라임(비우량주택담보대출) 위기로 주택 가압류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미국 공식 방문조사를 추진했지만, 조지 부시 당시 행정부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18일 일정으로 나선 이번 방문조사에서 롤닉 특별보고관은 뉴욕·워싱턴·시카고 등 6개 대도시와 사우스다코다주 파인리지의 인디언보호구역 등을 둘러봤다. 그는 마지막 방문조사 지역으로 로스앤젤레스를 골랐다.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다가 해고됐다. 집 한 채를 빌려 둘이서 나눠 살았는데, 일자리를 잃으면서 더는 집세를 낼 수 없게 됐다. 거기로 나앉을 수밖에….”

<가디언>은 이날 행사에 참가한 데버라 버튼(57)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그는 “처음엔 거리에 텐트를 치고 생활했는데, 오전 6시 이전에 텐트를 철거하지 않으면 경찰이 와서 단속을 했다”며 “단속을 당하면 기록이 남아 나중에 공공주택 추첨도 받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버튼은 이어 “아무도 노숙인으로 살아가는 걸 원치 않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고 만 것”이라며 “그럼에도 노숙인을 인간 이하로 여기거나 범죄자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단다.

버튼은 미국에서 최근 급증하고 있는 ‘신규 노숙인’의 전형이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벌어진 지난해 로스앤젤레스에선 주택 가압류가 무려 18배나 늘었단다. 이에 따라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만 모두 1만5500여 명이 살던 집에서 쫓겨났단다. 게리 블레이시 캘리포니아대 교수(법학)는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자리를 잃어 고정수입이 끊기면, 담보대출금과 이자를 상환하지 못하게 된다. 이들이 어떻게 살게 될지는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처음엔 친구나 친지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하지만 그들 역시 어려운 처지다. 다음 단계는 차 안에서 생활하는 거다. 하지만 그마저 견인돼 가거나 고장이라도 나면 결국 텐트촌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아예 거리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미 연방정부는 노숙인 관련 공식 통계자료를 단 한 차례도 내놓은 적이 없다.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의 추정치도 150만 명부터 300만 명까지 편차가 큰 편이다. 3억 인구의 나라에서 노숙인이 300만 명이라면, 100명에 1명꼴로 거리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오랜 기간 노숙생활을 한 이들이지만, 지난해 경제위기 이후 새로 노숙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단다. 전미노숙인연합(NCH) 등 7개 노숙인 지원단체가 지난 10월 내놓은 ‘주택 가압류에서 노숙까지’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새로 노숙생활을 시작한 이들 10명 중 1명이 주택 가압류를 노숙의 이유로 꼽았다.

“주거 마련 실패는 치욕 중의 치욕”

특히 생계지원금에 의지해 홀로 살아가는 이들은 쉽게 노숙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들이 받은 지원금은 한 달 평균 221달러에 불과한 반면, 도시에서 웬만한 방 한 칸 빌리는 비용은 그 2배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롤닉 특별보고관은 지난 11월8일 조사활동을 마감하면서 내놓은 성명에서 “미국처럼 부유한 나라가, 그 많은 자원이 있음에도, 국민에게 적절한 주거를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라고 지적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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