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구치소로 가는 길은 의외로 가까웠다. 지난 7월14일 아침 일찍 집 가까운 역에서 출발해 한 번 갈아타고 30분 남짓 만에 도쿄구치소 면회소에 도착했다. 면회 대상자 신청용지에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라는 수인의 이름을 쓴 뒤 ‘관계’란에 사실대로 ‘기자’라고 쓸까 하다 ‘지인’이라고 적었다. 사전에 면회 예약을 해준 시게노부의 후원조직 관계자가 기자 신분을 밝히면 면회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니 지인이라고 쓰는 게 좋겠다고 권유해 이를 따랐다.
1평 남짓한 2층 면회실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시게노부 후사코가 여교도관과 함께 들어왔다. 올 2월 암 수술을 받은 64살 초로의 혁명전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해맑은 얼굴이었다. 온몸으로 풍기는 풍모는 적어도 ‘테러의 여왕’이란 별명과는 걸맞지 않았다.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면회 신청자와 수감자 사이에 설치된 칸막이 유리벽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기자도 손바닥을 마주 댔다. ‘전공투(전학공투회의·1960년대 말~70년대 초 일본 학생운동 세력)의 마돈나’라는 또 다른 별명이 생각났다. ‘그 별칭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친화력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러 혐의로 20년형 선고받아면회 허용 시간은 단 10분. 1970년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위해 유럽 등지에서 각종 테러를 자행한 혐의로 2000년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돼 20년형을 선고받고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일본적군’ 최고책임자에게 준비한 질문을 던져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무장투쟁 노선에 대한 반성부터 물었다. 지난 6월 에 실린, 자신의 과격한 운동 방식을 후회하는 듯한 그의 인터뷰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 곧바로 무장투쟁 노선은 올바르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팔레스타인 인민들과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무장투쟁 노선이 얼마나 관념적이었는지 깨닫고, 또한 1970년대 말 남미의 해방신학자들과 접촉하면서 민중의 삶 속에 뿌리 내린 변혁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이미 그때 노선을 변경했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10분의 면회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시게노부는 면회실을 나가기 전 또다시 기자에게 유리창 칸막이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구치소 면회소를 나오면서 바로 앞의 가게에서 그가 좋아한다는 장미 한 다발과 오렌지 여섯 알을 사서 영치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 묻지 못한 인터뷰 질문이 담긴 편지를 부쳤다.
기자가 시게노부 후사코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3월 일본의 반체제 영화감독인 와카마쓰 고지(72)의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였다. 1972년 2월 산악 군사훈련 과정을 전후해 동료 14명을 공산주의화 명목으로 린치·살해해 일본 학생운동을 결정적인 궤멸 상태로 빠트린 ‘연합적군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를 학생운동 내부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에 시게노부가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상고를 졸업한 뒤 간장회사에 다니면서도 향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1965년 메이지대학 야간학부 사학과에 진학한 그는 교사를 꿈꾸고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문학소녀였다. 우연히 등록금 인상 반대 데모에 참가하게 된 그는 일본공산당마저 체제 내 세력이라며 배척하는 급진 신좌익 운동권에 합류하면서 급속도로 혁명전사로 변신하게 된다. 전공투 운동의 과격화 과정에는 당국의 책임도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과격파로 불렸지만 그것은 권력과의 공방의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 더욱 폭력적인 것은 공안경찰이었다. 멋대로 ‘별건체포’하거나 파출소 안에서 밤중에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과격한 집단은 적군파보다 권력의 첨병인 공안당국이었다.”
그가 사회변혁 운동에 눈뜬 데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딸과는 정반대로 젊은 시절 우익 테러활동에 참가한 아버지이지만 “아름다운 산하의 일본은 악덕한 배금주의 정치가와 관료들에 의해 점점 악화됐다”는 젊은 시절 이야기를 어린 딸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아랍으로 가려는 딸에게 먼저 조국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지만, 쇄도하는 비난 전화에는 “딸을 믿고 있다”며 끝까지 딸을 감쌌다.
적군파 조직에 참가한 시게노부는 1971년 2월 적군파의 투쟁 노선인 국제근거지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세계 동시 혁명의 요체라는 생각으로 레바논으로 건너갔다. 그 뒤 시게노부 등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좌파 단체인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텔아비브 총기 난사 사건을 비롯해 대사관 점거와 항공기 납치 사건 등 각종 ‘무장투쟁’을 감행하다 1974년 12월 적군파와는 별도 조직인 ‘일본적군’을 결성했다.
짧은 옥중 인터뷰로는 충분히 묻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면회 열흘 뒤쯤 9장짜리의 두툼한 편지에 담겨 도착했다. 때마침 출간된 그의 저서 도 궁금중 해소에 도움이 됐다.
시게노부는 편지에서 자신의 운동 노선이 올바랐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서술했다.
“사회운동, 학원투쟁, 지역투쟁, 노조운동, 반전투쟁 등 다양한 차원의 투쟁이 있었지만 우리는 혁명과 무장투쟁으로 해결의 길을 찾았다. 상황을 고려해서 전술·전략을 세운 것이 아니라 상황에 쫓기고, 그런 가운데 승리를 위한 투쟁의 방도로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타도할까라는, (대중성이나 사회성을 결여한) 권력과의 공방에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연합적군 사건’이란 끔찍한 사태도 “무장투쟁에 대한 환상을 갖고 돌진한 데서 생긴 것”이다. 사건 당시 아랍에 있던 그는 라디오에서 연합적군의 동료 살해 사건을 듣고 주저앉아 통곡했다. 같은 적군파에 소속돼 운동을 같이 했던 절친한 여자친구도 살해됐다. 그는 사건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이런 혁명은 필요 없다. 동료를 살해할 권리는 누구도 갖지 못한다. 동지들은 당신들의 혁명의 사물화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무장투쟁이라는 방법을 자기 목적화해온 우리 투쟁의 존재 방식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팔레스타인과 아랍은 환상의 ‘무장투쟁’이 아니라 역사·사회·정치적인 근거를 갖고 인민운동으로 무장투쟁에 의해 조국을 해방하려는 싸움의 장소였다. 그 지역, 그 나라의 역사와 조건에 비춰 투쟁의 방도가 있고 팔레스타인에는 팔레스타인의 투쟁이 있는데, 우리는 자신을 협소화한 투쟁밖에 해오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무장투쟁으로 나가기 이전에 좀더 다양한 방법과 전술로 사회변혁의 요구를 실현하는 투쟁을 해오지 못했다고, 안이하게 무장투쟁이라는 방법에만 의지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노선뿐 아니라 적군파를 포함해 당시 일본 학생운동권의 조직 운영 방식과 체질에 대해서도 신랄한 자기반성을 했다.
“자신들의 ‘올바름’과 ‘유일당’이라는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 이후의 체질을 당은 줄곧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데 가치를 부여한 채 ‘우치게바’(당파 간 폭력적 싸움)라는,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적인 독선에 빠졌다. 이런 잘못된 리더십이 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
그는 몇 년 전 옥중 면회를 온, 전 적군파 의장이자 당파 싸움 끝에 반대 세력을 야밤 습격해 폭력적 해결 방식을 주도한 시오미 다카야(68)에게도 과거 운동 방식에 대한 강력한 반성을 요구했다고 일본적군의 옛 멤버이자 후원조직의 일원인 야마모토 마리코(69)는 귀띔했다.
연합적군 사건이라는 비극 이후에도 전공투 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주카쿠파’(중핵파)와 ‘가쿠마루파’(혁명 마르크스주의파)는 같은 뿌리임에도 1970년대 끊임없는 우치게바로 100명의 사상자를 내 학생운동에 대한 환멸감을 증폭시켰다. “대의를 위해서는 무엇을 해도 좋다”는 사고가 당시 운동권에 만연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조직 운영에서 개선했어야 하는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람들의 자치·자결·자립과 연대로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다양한 활동과 투쟁을 축으로 재구축해야 하는 것”이라며 대사관 점거와 비행기 납치 등 일본적군의 맹목적인 무장투쟁에 반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양심과 휴머니즘에 비춰 주저하게 되는 투쟁은 결국 자신들을 불건전하게 만든다. 우리도 1970년대 인질작전 등을 했다. 다른 사람의 여권을 부정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혁명의 프로세스가 건전하면 전망 또한 건전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와 같은 방식의 혁명은 아니지만 더욱더 (혁명이) 필요한 세계가 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여전히 혁명을 꿈꾼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 거세게 불어닥친 세계 동시 불황과 함께 신자유주의식 글로벌 경제체제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그의 투쟁 의욕은 어느새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현재 세계가 근본적으로 전환을 꾀하는 시대로 돌입하고 있음을 후대 역사가들은 기술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기구를 비롯해 현재 각국 정치·경제의 지도력으로는 변혁이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파탄난 대증요법을 거듭한 채 희생을 국민에게 떠넘기고 있다.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과거 소련과 동구, 중국처럼 국가 관료와 권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아니라, 법에 따른 평등화의 방향으로 사회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이론이나 정책이 태어날 것이다.”
“자각한 시민…” 노무현의 말 인용
그는 뜻밖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 속에서 찾아냈다.
“당신의 나라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는 자각한 시민의 조직화된 힘’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자국의 권력에 대한 이의 제기와 변혁을 횡적 연대로 해서, 국경을 넘은 시민의 힘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때 세계 동시 혁명을 꿈꿨던 옛 혁명전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변혁의 시대에 무엇보다 ‘자명’한 것으로 생각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일본 헌법 9조(해외에서 무력 불사용)를 철저히 실현함으로써 일본에서 변혁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아시아 침략에 대해 반성하고 핵 없는 세계에 대한 염원을 주도하는 일본으로 변혁해가도록 민주주의의 힘, 자각된 시민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
과거 기존 체제를 폭력을 써서라도 타도하거나 바꾸려던 그의 혁명 목표는 40년 세월을 지나 소박하지만 소중한 평화운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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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일본)=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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