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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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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공화국 개혁, 쿠데타에 미끄러지나

차베스와 손잡은 개혁 드라이브에 대법원·의회·군부 반발…
파자마 차림 셀라야 대통령을 체포해 국외 추방
등록 2009-07-10 06:23 수정 2020-05-02 19:25

‘바나나 공화국.’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바나나 따위의 한정된 농산물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부패한 독재자와 그 수하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를 업신여겨 이르는 말이다. 작가 오 헨리가 1904년 펴낸 단편집 에서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냉전 시절 미국의 안마당처럼 휘둘리던 중미의 엘살바도르, 그레나다, 니카라과, 과테말라 등이 ‘바나나 공화국’의 대표 격이다. 그 언저리, 온두라스도 마찬가지였다. 기실 1896년 2월 은행 근무 시절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오 헨리가 장인의 도움을 받아 보석으로 풀려난 뒤, 재판을 피해 도망한 곳도 바로 온두라스였다. ‘바나나 공화국’의 모델인 게다.

‘개혁 동지의 쓸쓸한 포옹’. 6월29일 니카라과 마나과의 산디니스타당 본부에서 추방당한 온두라스 셀라야 대통령(왼쪽)과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만났다. 사진 REUTERS/ TOMAS STARGARDTER

‘개혁 동지의 쓸쓸한 포옹’. 6월29일 니카라과 마나과의 산디니스타당 본부에서 추방당한 온두라스 셀라야 대통령(왼쪽)과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만났다. 사진 REUTERS/ TOMAS STARGARDTER

아메리카 대륙을 남과 북으로 잇는 잘록한 허리 자리에 위치한 온두라스는 남서쪽으로 엘살바도르, 남동쪽으로 니카라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웃나라만큼, 아니 그보다 조금 더 가난한 처지다. 최근 몇 년 새 연평균 4~6%의 경제성장을 꾸준히 이뤄냈지만, 막대한 외채에 치여 형편은 별반 나아진 게 없다. 지난 2007년 말을 기준으로 세계은행이 추정한 온두라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1600달러 정도다.

미 다국적 농업자본이 총독 노릇

19세기 초반 독립과 함께 미국 자본이 들어와 시작된 바나나 플랜테이션은 온두라스 경제의 버팀목이었다. 치키타(옛 유나이티드프루츠)와 돌푸드 등 두 미국계 다국적 식품업체가 오랜 세월 온두라스 정치와 경제를 좌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 싱크탱크 ‘미주문제위원회’(COHA)는 지난해 8월 펴낸 자료집에서 “지난 20세기 말 온두라스는 수출의 60%가량을 바나나 산업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며 “유나이티드프루츠 등 미국계 다국적 농업자본이 온두라스에서 사실상 총독 노릇을 해왔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온두라스 수출의 약 70%, 수입의 약 50%를 점하는 최대 교역국이기도 하다.

유엔 자료를 보면, 2008년 말을 기준으로 온두라스의 인구는 약 720만 명에 이른다. 노동인구 10명 가운데 4명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서비스업 종사자도 비슷한 규모다. 공업생산에 투입된 인구는 전체 노동 인구의 20% 남짓에 불과하다. 빈부 격차도 극심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는 약 370만 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공식 실업률만도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27.9%, 약 120만 명이 일자리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

2005년 11월 대선에 야당인 중도보수 성향의 자유당 후보로 나서 극우 성향의 집권 국민당 후보 포르피리오 페페 로보를 간발의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된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이 직면한 현실이 이랬다. 선거운동 기간에 셀라야 대통령은 강력범죄 소탕과 빈곤 근절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그의 집권 이후에도 범죄는 줄지 않았고 물가마저 폭등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화려한 팡파르 속에 2006년 미국-중미 자유무역협정(CAFTA)이 발효되면서 관세가 철폐되는 등 반전의 기회를 맞는 듯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되레 무역적자는 쌓였고, 비슷하게 가난한 이웃 나라들과 자본투자를 따내기 위해 저임금 경쟁에 내몰리는 처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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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의 어려움에 직면한 셀라야 대통령에게 든든한 우군이 돼준 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비롯한 남미 좌파 정권이었다. 지난해 8월 셀라야 대통령은 중남미와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이 일종의 ‘대안 자유무역협정’으로 결성한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 동맹’(ALBA) 가입을 결정했다. 그를 배출한 자유당 쪽에선 눈을 부라렸지만, ALBA 가입은 이내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왔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하루 2만 배럴의 원유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거래 조건도 ‘환상적’이라 할 만했다. 원유 수입 대금을 연간 1%의 이자율로 25년에 걸쳐 나눠 갚거나, 아예 현금이 아닌 현물로 상계할 수 있도록 한 게다.

최저임금 인상 등 나름의 개혁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셀라야 대통령이 개헌을 처음으로 언급한 건 지난해 11월께다. 당시 그는 올 11월 말로 예정된 대선에서 개헌을 위한 제헌의회 소집 찬반을 묻겠다고 밝혔다. 375개 조항으로 이뤄진 온두라스 헌법은 의회 제적 인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개정이 가능하다. 단, 대통령의 임기와 대통령직 승계 절차와 관련된 8개 조항은 개정이 불가능하도록 규정돼 있다. 제헌의회를 소집하려는 목적이 대통령 단임제 규정을 개정해 연임의 길을 열려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지난 3월 국민투표 관련 대통령령을 내렸다. 제헌의회 소집 찬반 여부를 묻는 투표함을 11월 대선 당일 투표소에 설치하는 것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6월28일 실시하겠다는 게다. 온두라스 정치권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대법원은 국민투표 자체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고, 의회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군부는 투표 준비에 착수하라는 셀라야 대통령의 명령을 무질렀다. 셀라야 대통령은 로메오 바스케스 육군참모총장 해임으로 맞섰지만, 대법원이 다시 나서 바스케스 총장 해임을 무효화했다.

그리고 투표 개시 1시간여를 앞둔 지난 6월28일 이른 아침 그예 사단이 벌어졌다. 현지 영자매체 는 6월28일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살라야 대통령이 일요일 아침 군 정예요원 12명에게 체포됐다. 앞서 이날 새벽 200명가량의 병사들이 탱크의 엄호를 받으며 대통령 관저를 포위했다. 경찰은 관저 주변에 몰려든 시위대 몇백 명을 최루가스를 쏴 해산시켰다. 체포된 셀라야 대통령은 수도 테구시갈파 외곽에 자리한 공군기지로 이송돼 곧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로 망명길에 올랐다.”

현직 대통령이, 일요일 아침, 자신의 침실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총을 겨눈 군인들에게 붙들려 국외로 추방됐다. 지루하게 탄핵 절차를 밟아나가느니, 차라리 쿠데타가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라고 느꼈던 걸까? 셀라야 대통령은 코스타리카에 도착한 뒤 “복귀해 임기를 마치겠다”고 강조했지만, 쿠데타 세력은 주저 없이 로베르토 미첼레티 의회 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귀국한다면 “공항에서 반역죄로 체포될 것”이라고 을러댔다. 수도 테구시갈파에는 통금 조처가 내려졌고, 전기와 버스 운행이 끊겼다.

1994년 아이티 쿠데타를 기억하라

“지난 1994년 온두라스보다 더 가난한 땅 아이티에서 쿠데타가 벌어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축출됐을 때, 미국은 그의 복권을 추진하면서 조건을 내걸었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받아들이라는 거였다. 아리스티드 대통령으로선 마다할 입장이 아니었다. 미군의 지원 속에 복귀엔 성공했지만, 아이티 경제는 송두리째 내려앉았다. 빈곤이 심화하면서 더욱 격한 혼란으로 빠져들던 2004년 다시 쿠데타가 벌어졌고,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다시 축출됐다. 미국은 쿠데타 세력을 두둔했다.”

미 시사주간지 은 6월30일 인터넷판에서 새삼 옛일을 들춰냈다. 앞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6월29일 “쿠데타가 정권 교체 수단으로 이용되는 시대로 퇴보해선 안 될 것”이라며 “셀라야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유지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쿠데타 세력으로선 움찔했을 터다. 7월3일 현재 셀라야 대통령은 미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가난한 조국의 대통령 자리로 돌아온다면, 이를 도운 세력이 또다시 ‘총독’ 노릇을 하려 들지 모른다. 산 너머에도 산이 있는 형국이다. ‘바나나 공화국’의 서글픈 멍에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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