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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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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익에는 고문이 필요해?

고문 사실보다 고문이 ‘알려진 게’ 더 거슬리는 부시 행정부 인사들…
“공화당이 반대하면 상원이 직접 진상 조사”
등록 2009-05-01 08:39 수정 2020-05-02 19:25

‘목불인견’이라고 했던가. 지난 4월16일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테러 용의자에게 가해진 온갖 고문수법이 공개된 이후 부시 행정부 출신 인사들이 보이는 행태가 꼭 그렇다. 차마 눈 뜨고 지켜보기도 버겁다. 지난 8년여 세월 미국의 도덕성이 얼마나 무뎌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반인도적 범죄, 유죄!’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딕 체니 전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왼쪽부터)을 비꼰 탈인형을 쓴 인권활동가들이 지난 2006년 6월 백악관 앞에서 이들을 처벌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REUTERS/ JOSHUA ROBERTS

‘반인도적 범죄, 유죄!’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딕 체니 전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왼쪽부터)을 비꼰 탈인형을 쓴 인권활동가들이 지난 2006년 6월 백악관 앞에서 이들을 처벌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REUTERS/ JOSHUA ROBERTS

“벽은 딱딱하지 않았고” 유튜브 인기 동영상

“고문을 가하기 전에 정보를 모두 얻어낸 것으로 드러났다. 고문 뒤에 추가 정보를 얻어낸 게 없었다. 얼굴을 때리고, 무참히 벽에 밀어 던지고….”

부시 행정부의 마지막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낸 마이클 헤이든 예비역 공군 대장이 지난 4월19일 우익 성향의 대담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시 행정부 시절의 ‘강화된 심문기법’에 대해 질문을 받던 그가 갑자기 앵커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잠깐, 사실관계를 바로잡을 게 있다. 벽은 (충격 흡수가 가능할 정도로) 그리 딱딱하지 않았고, (고문당하는 사람의) 목 주변에 보호장치를 대 심하게 다치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가 ‘변명’이랍시고 한 이 발언을 담은 영상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서 ‘상한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인류는 고문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해 엄히 금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고문을 ‘정책의 수단’으로 삼았다. 퇴임 이전까지 ‘고문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던 부시 전 대통령과 그 수하들에게 물고문이나 잠 안 재우기, 벌레가 가득한 관 속에 집어넣기 따위는 다소 ‘강화된 형태’의 심문기법에 불과했다. 그러니 고문수법이 공개된 이후에도 이에 대한 ‘회한’이나 ‘반성’이 있을 리 없다. 케이블 방송 의 인기 토크 프로그램 를 진행하는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가 표현한 것처럼 “고문을 했다는 사실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이 더 거슬리는 모양”이다. 하나같이 되레 큰소리다.

1987년 발효된 ‘유엔 고문방지협약’ 제1조는 “정보를 빼내거나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심한 정신·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고문으로 규정한다. 협약 제2조는 “어떤 경우에도 고문은 용납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전시에도, 공공의 안전이 위태로울 때도 예외는 없다. 상관의 명령일지라도 고문을 해선 안 된다. 고문은 ‘반인도적 범죄’이기 때문이다. 88년 4월 협약에 가입해 94년 10월 의회 비준을 거친 미국도 협약 회원국으로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고문이 자행되지 않도록 할 국제법적 책임이 있다. 미 연방 고문방지법은 수감자를 고문하거나, 고문하겠다고 위협하는 행위를 최고 20년의 중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라이스 국무장관, 2002년 4월부터 알아

“(고문수법 공개로) 이제 ‘강화된 심문기법’은 더 이상 효과를 보기 어렵게 됐다. 완전히 망쳐버렸다.” 부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던 칼 로브 전 백악관 정치고문은 에 출연해 이렇게 ‘개탄’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존 엔자인 상원의원(네바다주)도 “이제 알카에다가 테러범들에게 고문에 대처하는 훈련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은 각종 언론에 잇따라 나와 “고문수법만 공개하지 말고, 고문을 통해 얻어낸 ‘성과’도 함께 공개하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까지 지냈던 무소속 조 리버먼 상원의원(코네티컷주)은 “미국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테러와 관련해 사로잡은 죄수에게 원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심문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다”며 “고문 관련 메모를 공개한 것은 적들만 이롭게 할 뿐 미국의 국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다.

‘고문’의 책임은 권력의 최정점까지 뻗쳐 있다. 미 상원 정보소위원회는 4월22일 고문 관련 내용을 정리한 중앙정보국 문건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다. 이 문건은 존 록펠러 전 상원 정보소위원장의 요청에 따라 미 법무부가 지난 2월3일부터 분류작업을 벌인 끝에 선별된 내용을 묶어 4월19일 상원에 전달한 것이다. 모두 17쪽 분량의 이 문건에는 지난 2002년 3월부터 2005년 말까지 미 법무부 법무심의관실이 ‘강화된 심문기법’과 관련해 중앙정보국에 법적 조언을 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히 밝혀져 있다. 내용을 훑어보자.

고문의 시발은 2002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정보국은 당시 교전 끝에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알카에다 지도자 ‘아부 무바이다’가 미 본토를 겨냥한 테러와 관련한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일반적인 심문으로는 정보를 빼낼 수 없다고 판단한 중앙정보국은 그해 4월 법률고문을 통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법무부 쪽에 심문기법에 관한 법적 제한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공개된 문건을 보면, 당시 중앙정보국의 요청을 받은 국가안전보장회의 법률고문은 이를 국가안보보좌관과 백악관 법률고문, 법무장관 등에게도 보고했다.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다. 라이스 전 장관은 이미 이때부터 고문 관련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건 2003년 7월이다. 조지 테닛 당시 중앙정보국장은 변호사를 대동하고 체니 부통령과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 백악관 법률고문이던 앨버토 곤잘러스 전 법무장관 등과 만나 ‘물고문’을 포함한 ‘강화된 심문기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곤잘러스 전 장관이 당시 모임에 참석했다는 점은 체니 전 부통령은 물론 부시 전 대통령도 최소한 이 무렵엔 고문이 자행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 된다. 문건에는 “당시 모임 참석자들은 중앙정보국의 심문기법이 합법적이며,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했다”고 적혀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은 불충분하다. 2006년 이후에 자행된 고문과 관련된 문건도 모두 공개해야 한다.” 이번 문건 공개에 핵심적 역할을 한 록펠러 상원의원은 4월22일 성명을 내어 이렇게 강조했다. 앞서 지난 4월16일 오바마 행정부가 공개한, 고문수법이 구체적으로 적힌 법무부 문건 4가지도 모두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작성된 것들에 국한돼 있었다.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이대로 덮을 순 없다. 지난 4월20일 중앙정보국을 방문해 “법무부의 법적 자문에 따라 직무를 수행한 직원들이 기소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조금씩 태도를 바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원에선 ‘과거사 청산’을 위한 행보가 이미 시작되는 모양새다. 부시 행정부의 안보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러스 파인골드 의원(민주당·위스콘신주)은 4월21일 〈AP통신〉 등과 만나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졌는데도 관련자를 사법처리 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판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구성해 부시 행정부의 인권유린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패트릭 레이 법사위원장은 “만약 공화당 쪽에서 독립된 위원회 형태의 진상조사를 반대하고 나서면, 상원이 직접 나서 전면 조사를 벌이도록 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언제쯤 ‘숙취’에서 깨어나려나

“때로 그저 묻어두고 가는 게 좋은 일도 있다. 인생의 어떤 측면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겨도 괜찮지 않은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로 일했던 칼럼니스트 페기 누넌은 4월19일 〈ABC방송〉의 대담 프로그램 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8년의 끔찍스런 일방주의, 미국 사회는 언제쯤 그 ‘숙취’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갓 취임 100일을 넘긴 오바마 행정부의 과제일 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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