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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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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스코어 박살

등록 2008-11-11 14:22 수정 2020-05-03 04:25

오바마 이야기는 충분히 했다. 이번엔 그 극적인 승리의 반대쪽 이야기, 즉 어쩌다가 미국 보수파는 이 신출내기 유색인 정치가에게 더블스코어(선거인단)로 박살이 나고 말았는가를 좀 해보자. 승부는 항상 양쪽이 함께 빚어내는 송편이다. 떡 위의 예쁜 꽃 모양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찍어낸 거무튀튀한 나무틀도 볼 일이다. 오바마의 승리의 요인을 뒤집어보면 미국 보수파의 패배의 원인이 나올 것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는 지난 30년간 무적의 위력을 발휘했던 미국 보수파의 정치적 무기들이 그 효력을 소진해버렸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편가르기·반지성 통하지 않았다

더블스코어 박살 (일러스트레이션/ 이기량)

더블스코어 박살 (일러스트레이션/ 이기량)

첫째, 대중의 마음속 두려움과 증오라는 기제를 자극하는 ‘편 가르기’의 정치 기술이 그것이다. 이들은 9·11 테러 사건을 이용해 대중의 마음속에 한없는 두려움과 증오의 감정을 증폭해놓았고, 이는 미국인들을 전세계를 들쑤시며 전쟁을 벌이는 선불 맞은 멧돼지로 만들어버렸다. 사회·경제 정책은 중산층들로 하여금 빈곤층과 유색 인종들을 자신들의 세금과 안전을 위협하는 자들로 혐오하고 기피할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 여기에 우파 기독교도들과 맹목적 애국주의 세력들이 뛰어들어 온갖 복잡한 사회문제들을 ‘옳은 것’과 ‘틀린 것’으로 금을 짝 갈라 사람들에게 어느 쪽에 설 것이냐며 윽박질렀고, 다른 쪽에 선 사람들을 온갖 흉측한 이름으로 저주해 마지않았다. 미국 보수파는 나라 안팎에서 새로운 ‘적’을 계속 찾아내어 이 ‘편 가르기’의 아수라장을 확대재생산했고, 그 분열의 틈을 고스란히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으로 활용했다.

둘째, 반지성의 정치다. 이 무지막지한 외교·사회·경제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게 되면 이를 모두 ‘아이비리그 출신의 도시 엘리트들로 구성된 리버럴 먹물들의 헛소리’라고 몰아붙이면서, 단순무식의 사고방식이야말로 ‘보통 미국인들’의 ‘미국적 가치’라고 찬양하는 기묘한 포퓰리즘을 창궐시킨 것이다. 그래서 실로 조삼모사의 경제학이라고 불러 마땅할 ‘감세=경제성장’ 또는 노골적인 제국 이데올로기인 ‘선제공격 독트린’ 따위가 과학적 진리인 듯 대학과 매체에서 설파되는가 하면, 부시 대통령 이하의 정치가들은 저마다 자기 코를 가리키며 ‘나야말로 보통 사람이다’라며 청바지에 맥주 마시는 서민‘삘’을 풍기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이번엔 어느 쪽도 통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페일린 여사께서 ‘립스틱 바른 하키맘’ 행세를 하고 다녀도, 매케인 할배가 독이 오른 채 세금을 올리면 사회주의가 온다고 외쳐대도, 보수 우익들이 소리 없이 백인종의 단결을 호소하며 ‘후세인’을 조심하라고 사방에 공갈을 때리고 다녀도 결과는 더블스코어였다. 미국인들은 레이건에서 시작된 이 미국 보수파의 한판 쇼가 그 막차를 탄 아들 부시의 치하로 이어지면서 누더기가 된 나라 꼴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이며, 최근의 경제위기로 카운터펀치를 맞고 말았다. 그래서 이들은 보수파의 모습과 행태를 거울에 비춘 듯 정반대로 뒤집은 오바마의 모습과 행동에 기울어졌고, 그 약속 위로 마음속 깊숙이 오래 움츠러들어 있었던 ‘희망’을 꺼내 살포시 얹어 표로 던졌다. 지금 그 희망과 대속(Redemption)의 밝은 에너지가 전 미국을 뒤덮고 있다.

더욱 딱한 것

이제 미국 보수파에게 앞날이 있을까. 강력한 철학적·사회과학적 논리로 무장하고 레이건과 같은 탁월한 대중 정치인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나라를 새로 조립할 수 있었던 30년 전의 모습으로 이끌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기껏 이야기 나오는 2012년의 대선 주자라는 게, 옷치장으로 세 달간 2억원을 뿌리면서 상대편 후보를 빨갱이 테러리스트라고 몰아붙이는 참주 선동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공주병’(Diva) 페일린 여사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프랑스의 사르코지 같은 이는 그래도 오바마 당선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 것으로 보아 정치적 역동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셈이니 또 모르겠다. 더욱 딱한 것은 한반도 남쪽의 보수파들이 아닐까. 미국 것이라면 소곱창도 달게 받아먹는 이들은 이 약발 다한 미국 보수파의 행태들을 무슨 최선진 정치 기법이나 되는 양 고스란히 옮겨왔고, 그 결과 벌써부터 촛불과 ‘주가 747’ 등 온갖 위기에 휘말려들고 있다. 그래도 이들이 믿을 구석이 하나는 있다.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한국의 반대 세력들도 못지않게 ‘편 가르기’와 ‘사오정식 반지성’으로 철갑을 두른 상태이니까. 최소한 당분간은.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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