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총리에 오른 지 한 달 된 사막 순다라웻 전 타이 총리는 〈CNN〉 등 유수의 해외 언론과 잇따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때마다 사막 전 총리가 유독 ‘공세적’으로 답변한 내용이 있다. 바로 32년 전 발생한 ‘탐마삿 학살’에 관한 대목이다. 당시 〈CNN〉과 한 인터뷰 한 토막을 들어보자.
“당신의 과거를 비판하는 이들은 ‘당신 손에도 피가 묻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당시 아웃사이더였다.”
“공식 사망자 수는 몇십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1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
“아니다. (사망자가 없다고 하려다가) 단지 재수 없는 놈 하나가 사남루앙 광장에서 맞은 뒤 불에 타 죽었다.”
“당신의 극우적 선동 탓에 당시 상황이 더욱 커졌다는 얘기가 있는데….”
“극우가 어때서? 극우는 왕과 함께, 극좌는 공산주의자와 함께였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1976년 10월6일 새벽, 방콕의 탐마삿대학 안에는 몇천 명의 시민과 학생 시위대가 모여 있었다. 3년여 전 10월 민주항쟁으로 쫓겨난 군부 독재자 프라스 차르사티엔과 타놈 끼띠카쫀이 망명 생활을 접고 스님이 되겠다는 핑계로 그해 8월과 9월 각각 귀국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확산되던 때였다. 극우파들은 시위대를 ‘빨갱이’라 불렀다. 밀림에서 타이공산당(CPT)이 무장투쟁을 벌이던 시기라, 타이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는 한국 사회 못지않았다.
사건의 표면적 발단은 같은해 9월25일 나콘빠톰 지방에서 경찰에 맞아 죽은 시위대 2명의 주검이 벽에 대롱대롱 매달리면서부터다. 10월4일 탐마삿대학에서는 그 사건을 풍자한 학생들의 연극 공연이 벌어졌고, 다음날 극우 신문 과 영자 일간지 1면에 실린 사진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배우의 얼굴이 타이 왕자와 닮은꼴로 나간 것이다. 바로 그날, 친군부 라디오는 “(왕실을 모독한) 공산주의자들을 죽이자”고 대대적인 선동전을 펼쳤다.
10월6일 새벽 2시께, 학교를 둘러싸고 있던 극우 민병대 ‘레드 가우어’(Red Gaur)와 그 형님 격인 ‘나와폴’(Nawapol), 그리고 왕실 충성파 민병대인 ‘빌리지 스카웃’과 그 형님 격인 ‘국경순찰대’(BPP) 등이 군경과 함께 학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차별 총격을 퍼부었고, 로켓포까지 동원해 비무장 시위대를 사남루앙 광장으로 끌어냈다. 시위대의 목을 매달고 학교 여기저기에 방화까지 한 그날의 끔찍한 폭력은 몇 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공식적으로만 사망자 46명, 부상자 몇백 명 그리고 수천 명의 구속자를 낳았다. 당시 내부무 차관이던 사막 순다라웻은 바로 ‘장갑차’라는 이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선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사건 뒤 언론은 희생자들을 ‘베트콩’이라 불렀다. 키티우도라는 이름의 승려는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건 죄가 아니다”라고까지 했다. 지난 2001년 시민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활동한 바 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권력의 ‘어느 선’까지 연루됐는지조차 입을 여는 이들은 거의 없다. 타이 현대사에서 탐마삿 학살은 32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입에 올려선 안 되는 ‘터부’로 남아 있다.
미리 준비된 수순을 밟아 진행되다“그해 10월5일 아침 신문을 보고 학생들이 기자들을 불러 해명까지 했다. 풍자극에서 왕자의 모습 따위는 없었다고. 그리고 그 해명이 다음날 신문에 나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 전에 폭력 사태가 터진 거다.”
명문 출라롱콘대학 학생회장 출신 언론인으로 탐마삿 사건 뒤 타이공산당 게릴라 투쟁에 동참했던 피룬 찻바니쿨의 말을 듣자면, 사진과 큰 관련 없이 폭력 사태는 미리 준비된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2001년 진상조사위 공동의장으로 활동한 바 있는 짜이 웅파곤 출라롱콘대 교수(정치학)는 사진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학생 배우 한 명이 왕자와 비슷하게 생긴 우연을 극우세력들이 이용한 것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진에 집착하지 마라. 언론들이 사진을 미스터리로 몰아가면서 학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미스터리란 없었다. 베트남전쟁 말미이던 당시 타이 정세는 이미 좌파와 우파 간의 긴장관계가 증폭되고 있었다. 왕실, 군부, 각 정당 그리고 경찰, 특히 국경순찰대 등 타이 사회의 전체 지배계층은 학생운동을 폭력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하고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가 공산정권에 넘어가면서 ‘공산화 도미노’ 막기에 혈안이 된 타이 정권은 ‘대공산당 게릴라전’을 명분으로 우익 민병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렇다면 탐마삿 학살에 미국의 역할은 없었을까? 진상규명위의 또 다른 의장 촐띠야 사띠야와따나 랑싯대학 타이-아시안 연구센터 소장은 “증거는 없지만 슈퍼파워가 개입된 사건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짜이 웅파곤 교수의 입장은 좀 다르다.
“미국의 물리적 개입은 없었다고 본다. 만약 미국이 개입했다면 탐마삿 학살로 되레 타이공산당을 키워놓았으니 멍청한 짓을 한 게 되는데….”
‘30밧 의료제도’의 제안자그의 말대로 몇천 명의 학생들이 타이공산당의 근거지인 산악 밀림으로 향하면서 학살 뒤 타이공산당의 무장투쟁은 한껏 힘을 받았다. 당시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촐띠야 역시 그 대열에 동참했던 인물이다. 밀림으로 떠나며 작별 인사하러 오는 제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게 그를 흔들어놓았다고 했다.
“행복했다. 뭐랄까…, 내 신념을 실천한다는 그런 만족감이 컸다.”
밀림 생활 7년 반.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던 그는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다짐하며, 치료를 위해 1983년 잠시 밀림을 떠났다. 하지만 구속과 출산이 이어지면서 되돌아가지 못했다. 이미 1980년대 들어 정부가 취한 당근 정책, 이른바 ‘앰네스티(사면) 정책’은 탐마삿 학살 뒤 밀림으로 향했던 상당수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다시 도심으로 돌려놓았고, 캠퍼스로 돌아온 학생들은 묵묵히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앰네스티’라고는 하지만, ‘꼬리표’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경찰서에 출두해 ‘관리’를 받는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사실상 ‘전향’이었던 게다. 이를 거부했던 피룬 같은 이는 구속된 뒤 군사재판을 받아 5년2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사이 타이공산당은 소멸돼갔다. 공산주의가 뭔지도 잘 몰랐다는 피룬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싸웠다기보다는 전체주의적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헌법과 자유를 위해 싸웠던 것”이라고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타이공산당의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세대를 타이 사회는 ‘툴라(10월) 세대’라 부른다. 이들은 오늘날 학계와 정치권, 시민·사회단체 등에 두루 포진돼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폐인”이라며 하산했던 학생운동 지도자 섹산 파셋쿨은 탐마삿대학 정경대 학장까지 지낸 바 있다. 또 다른 지도자였던 통차이 위니차쿨은 미 위스콘신-매디슨대학에서 진보적 역사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2008년 여름 ‘탁신 옥빠이(물러나라)’ ‘사막 옥빠이’를 목청껏 외쳤던 극우 성향의 반정부 시위대(PAD) 진영에도, 그 반대편인 친정부-친탁신 시위대 진영에도 ‘툴라 세대’가 버티고 있다.
특히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이 도입해 타이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30밧 의료제도’(‘30밧으로 병원에’란 구호로 상징되는 탁신의 의료보장제도) 같은 정책은 바로 툴라 세대의 참여로 가능했다. 부패한 관료와 엘리트 정치에 지친 타이 농민·빈민들과 부패한 경찰 출신의 억만장자 정치인 탁신을 이어준 것이 툴라 세대란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지난 2월 탁신이 영국에서 일시 귀국했을 때 공항까지 마중 나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빈민 여성들의 모습은, 단지 ‘탁신의 돈에 매수당한 우둔한 표’(반정부 시위대 PAD식 논리에 따르면)를 투영한 것으로만 보긴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친탁신도, 반탁신도 아닌 ‘제3의 독립적 입장’을 주도하는 마르크시스트 학자 짜이 웅파곤은 이렇게 되묻는다.
“(탁신 진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연속해서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면, 그건 유권자들이 그쪽 정책에 호감을 갖고 투표했다는 것 아닌가? ‘30밧 의료제도’ 같은 정책은 타이 빈민층이 오랫동안 열망해온 제도였다.”
그럼에도 일부 친빈민 정책을 제외하면 탁신 진영에 동참했던 툴라 세대가 탁신 정권의 온갖 부패상과 인권침해를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는 회의적이다. 급기야는 1970년대 자신들을 탄압하는 데 선두에 섰던 사막 순다라웻 전 총리와도 한 배를 타게 됐으니 말이다. 반대편에 선 툴라 세대도 마찬가지다. ‘극우는 왕과 함께….’ 한때 왕정 타도를 외쳤던 10월 세대 다수가 극우 보수의 위태로운 줄타기에 지지를(일부는 ‘비판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게다가 타이공산당의 쓰라린 패배 경험으로 ‘말랑말랑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선호하게 된 타이 시민사회는 작금의 정치적 위기 국면에서도 적극적인 발언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순치’돼 있다. 그나마 발언을 하는 건 개중 규모가 작은 ‘제3의 독립파’ 단체들뿐이다.
원칙도, 청산 절차도 없이 세월은 흘러갔다. 하여, 굴복과 타협 그리고 패거리짓기로 버무려진 타이 현대사는 오늘 다시 타이 민중에게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32년 전 탐마삿 학살을 야기한 타놈처럼 올해 초 영국 망명 중이던 탁신이 ‘승려가 돼 귀국할 것’이란 소문이 돈 것도, 1992년 민주항쟁의 유혈 진압 책임자인 수라윳 출라논 장군이 2006년 9월 쿠데타 이후 과도정부 총리로 화려하게 중앙무대로 복귀한 것도 모두 잘못된 역사를 끊어내지 못한 탓이다. 32년 전 학살을 선동했던 사막 전 총리는 〈CNN〉과 한 인터뷰에서 시치미를 떼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과거에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오늘 이 자리(총리직)에 오를 수 있었겠나?”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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